영상자료원 '발굴, 복원, 초기영화로의 초대'전총 43편 영화와 영상물 선보이며 성과 공개

김기영 감독 '나는 트럭이다'
서울 상암동 DMC로 옮겨간 후 꾸준히 발굴, 복원한 작품들을 기획전으로 선보이고 있는 한국영상자료원(원장 이병훈)이 올해도 '발굴, 복원, 초기영화로의 초대'라는 제목으로 그간의 성과를 공개하고 있다.

제목처럼 '발굴', '복원', '초기영화로의 초대'라는 세 가지 섹션으로 분류된 이번 행사에서는 그동안 책에서만 접할 수 있었던 총 43편의 영화와 영상물들이 공개돼 관계자와 마니아들의 발길을 끌고 있다.

숨어 있던 역사들의 귀환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지난해 발굴, 수집한 영화들이 상영되는 '발굴전' 섹션은 말 그대로 유실됐던 영화사의 증거들을 발굴해 보여주는 부문이다. 이 섹션에서는 주로 1950~60년대의 우리나라 상황을 담고 있는 영상물들이 주를 이룬다.

지난해 작고한 원로 이형표 감독과 1950년대 국제연합 한국재건단(UNKRA)에서 함께 활동했던 테드 코넌트(Theodore Conant)의 컬렉션은 대부분 한국전쟁 이후 재건에 관련된 모습들을 기록한 10~20분 정도의 짧은 기록물들이 모였다.

험프리 렌지
또 1960년대 주한 미국공보원(USIS) 영화과에서 50여 편의 문화영화 제작에 참여했던 (Humphrey W. Leynse)가 소장했던 영화 자료들도 있다. USIS 문화영화들로 구성된 이 컬렉션에서는 한국감독이 연출한 중·단편의 교육 목적의 기록영화가 대부분이다.

무엇보다 이번 발굴전의 핵심은 김기영 감독의 초기영화들이 발굴돼 최초로 공개된다는 점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주목되는 것은 데뷔작으로 알려진 '죽엄의 상자'(1955)이다. 그동안 유실된 것으로 알려졌던 이 영화는 지난해 영상자료원의 김한상 연구원이 미국 국립문서기획관리청(NARA)에서 찾아내 필름의 복사 수집에 성공했다.

이 작품이 미국에서 발견된 이유는 김 감독이 당시 주한 미국공보원의 산하 영화제작사인 '리버티 프로덕션'에서 작품을 연출했기 때문. 영상자료원 수집부의 김봉영 부장은 "제작 여건상 정부기록물로 분류된 영상물은 이후 미국공보원의 다른 자료들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갔고, 지금껏 NARA의 보관 하에 있다가 발견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영화계는 신상옥, 이강천, 유현목 등 1950년대를 대표하는 감독들의 데뷔작이 유실된 상황에서 김 감독의 데뷔작을 찾은 것은 영화사적으로 큰 의미가 있다고 평가하고 있다. 영상자료원은 이뿐만 아니라 김 감독이 리버티 프로덕션에서 연출한 '나는 트럭이다', '수병의 일기', '사랑의 병실' 등도 함께 발굴하는 성과를 거뒀다.

최초 공개된 김기영 감독의 데뷔작 '죽엄의 상자'

유실됐다가 지난해 발굴된 김기영 감독의 데뷔작 '죽엄의 상자'가 지난 5월 26일 한국영상자료원 시네마테크KOFA 상영관에서 처음으로 공개됐다. '죽엄의 상자'는 동시녹음했던 최초의 영화이지만, 이날 시사회에선 아쉽게도 사운드가 없는 상태로 상영됐다.

김종원 한국영화평론가협회 상임고문은 "소리가 빠져 절반의 성공에 그치긴 했지만, 필름의 발견으로 그 형태나마 갖추게 돼 김기영 필모그래피의 중요한 한 부분을 채울 수 있게 됐다"고 평가했다.

영화는 민심을 교란하기 위해 남파된 빨치산 대원과 경관의 대결을 그렸다. 표면적으로는 반공영화였지만 내용에서는 빨치산을 영웅으로 미화했다는 비판을 받아 개봉 당시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제목인 '죽엄의 상자'는 영화 속에 등장하는 유골함과 폭탄상자에서 비롯됐다. 각각 '주검의 상자'와 '죽음의 상자'를 가리키는 두 개의 장치는 그대로 제목에 반영돼 중의적인 의미를 보여주고 있다. 실제로 당시 영화 포스터에는 '주검의 상자'로 쓰이기도 했지만, 영화 속 타이틀에는 '죽엄의 상자'로 나와 '죽엄의 상자'로 표기되고 있다.

영화감독 박노식의 재발견

시네마테크 프랑세즈 복원작과 대만 뉴웨이브 복원작이 포진해 있는 '복원전' 섹션에서 가장 눈을 끄는 것은 오히려 박노식 '감독'의 복원작들이다.

박노식 감독 '광녀'
박노식은 액션배우로 유명하지만 액션영화 감독으로도 활발한 활동을 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영상자료원의 한 관계자는 "테크니스코프 방식으로 복원된 7편의 작품들은 감히 한국영화사 연구의 새로운 장을 열 것이라 단언한다"고 말하며 "1970년대 넘치는 열정과 호기로 액션영화를 찍었던 박노식 감독을 재발견하는 즐겁고 놀라운 시간이 될 것"이라고 추천의 말을 남겼다.

이번 상영전에서는 박노식 감독이 70년대에 연출한 '육군사관학교', '하얀 수염', '폭력은 없다', '집행유예' 등을 비롯해 지난해 복원된 임권택 감독의 '연화'와 '(속)연화', '맨발의 눈길' 등 10편의 복원작들이 관객을 기다린다.

해외 복원작 부문에선 장 엡스탱의 '이중의 사랑'을 포함해 오귀스트 제니나, 마르크 알레그레의 '자정의 사랑', 알렝 카발리에의 '약탈' 등 국내에서 만나기 어려운 프랑스영화 3편이 예정되어 있다.

또 영화팬이라면 한 번쯤은 봤을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은 세계영화재단과 볼로냐 필름 아카이브의 복원작으로 상영되고, 대만에서 디지털 복원된 '음식남녀'와 '애정만세' 등 대만 뉴웨이브를 상징하는 5편의 영화들도 리스트에 포함되었다.

언제나 그대로인 초기영화의 매력

박노식 감독 '집행유예'
영화사 연구자나 예술영화 애호가들에게 초기영화의 매력은 변치 않는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이번 '초기영화' 섹션에서는 이런 향수를 충족시킬 수 있는 초기 프랑스영화나 유럽 무성영화들을 대거 포진시켰다.

프랑스 무성영화에 한 획을 그은 루이 푀이아드 감독은 지난해 상영했던 '팡토마'에 이어 이번에는 1910년대 단편영화들로 다시 돌아왔다. '루이 푀이아드1'에서는 1907년에서 1911년까지의 작품들을, '루이 푀이아드2'에서는 1911년에서 1913년까지의 작품들을 상영한다.

5월 중 상영된 장 르누아르의 '성냥팔이 소녀'와 나루세 미키오의 '당신과 헤어져', 마르셀 레르비에의 '비인간', 자크 페이더의 '아틀란티스' 등 무성영화들은 일본과 독일 피아니스트의 연주로 상영돼 이색적인 느낌을 자아내기도 했다.

이번 영상자료원의 기획전은 특히 오랫동안 활자 텍스트로만 접했던 한국영화의 역사를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영상자료원에서는 이러한 영화적 지평의 확장과 역사적 인물과 사건들에 대한 폭넓은 정보 공유를 위해 대담과 강연 등 여러 가지 부대행사들도 마련해 이해를 돕고 있다.

문화관광부, 도이치 키네마테크, 영국 BFI, 이탈리아 볼로냐 아카이브, 일본국립필름센터, 프랑스 CNC, 시네마테크 프랑세즈, 세계영화재단의 후원으로 열리는 이번 행사는 6월 19일까지 무료로 진행될 예정이다.



송준호 기자 trista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