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 경쟁시대 스트레스, 트라우마, 호르몬 이상 등 원인불면, 불안, 짜증 등 다양한 증세… 여자가 발병률 더 높아

"솔직히 인정하기로 하자. 우리는 무엇이 우울증을 유발하는지 모른다. 우울증이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도 모른다. 왜 특정한 치료들이 우울증에 효과적인지도 모른다. 우울증이 어떤 진화 과정을 거쳐 왔는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들에겐 아무 문제도 없는 상황에서 왜 어떤 사람은 우울증에 걸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런 상황에서 의지가 어떻게 작용하는지도 모른다."

우울증을 겪고 있는 미국의 소설가 앤드류 솔로몬은 우울증을 집대성한 저서 <한낮의 우울>에서 이같이 털어놓는다.

이 책에서 그는 개인적 경험을 비롯해 역사적인 기록과 의학적인 발견,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내용을 망라해 우울증을 종합적이고 입체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어법은 지나치게 논쟁적이거나 주관적 감정이 개입되어 있지 않다. 개인적인 고통과 치밀하게 조사한 자료들을 하나씩 차분하게 꺼내 보이며, 그는 기존의 우울증에 대한 정의를 다시 내린다.

그의 이 같은 인정은 '기분이 가라앉는다 / 갑자기 살이 빠지거나 혹은 살이 쪘다 / 사고력이 저하됐다 / 잠을 이루지 못하거나 좀처럼 잘 깨지 못한다' 등의 간단한 테스트로는 우울증을 진단하기도, 치료하기도 어렵다는 의미일 것이다. 명확한 실체가 없이 모호한 존재이기에, 우울증은 그 경계를 가늠하기 어려운 자욱한 밤안개처럼 왠지 더 두렵게 느껴지는지도 모르겠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우울증이 2020년에 인류를 괴롭힐 세계 2위의 질병이 될 것이라고 전망한 바 있다. 주변을 보아도 입에 "나 우울해"를 달고 사는 사람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국내에서도 역시 우울증 및 조울증으로 병원을 찾는 환자의 수는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따르면 우울증 및 조울증으로 병원을 찾는 사람들은 2006년 48만 3312명에서 2008년 51만 9962명, 2010년 57만 1937명으로 증가해왔다. 4년간 우울증과 조울증은 각각 17.3%와 28.8%가 증가했다.

선명하게 보이지 않는 우울증이 사회적 위험성을 갖는 이유는 이것이 자살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조증 환자의 절반이, 우울증 환자 5명 중 1명이 자살을 기도한다.

지난해, OECD 발표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자살률은 21.5명(10만 명당)으로, OECD 평균(11.7명)의 2배에 달했다. 비단 세계화로 더 거세진 무한경쟁의 현대사회만이 시시때때로 우리를 우울의 늪에 빠뜨리는 것일까.

우울증은 어떻게 정의되는가.

수면장애, 주의력 결핍 그리고 삶에 대한 흥미상실을 주요 증상으로 하는 우울증(Depressive Disorder)은 생활 속에서 겪는 가벼운 우울증에서 치료가 필요한 병적 우울증까지 그 범위가 대단히 넓다.

그러나 정신의학에서 말하는 우울한 상태란 일시적 기분 저하상태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의 내용, 사고과정, 동기, 의욕, 관심, 행동, 수면, 신체활동 등 전반적인 정신 기능이 저하된 상태를 의미한다.

이런 우울증에는 일상생활의 먹고 자고 일하는 생활전반을 방해하는 전형적인 우울증부터 양극성 장애인 조울증, 그리고 출산 후 산모가 산후 1개월 내에 겪게 되는 산후우울증까지 10가지 이상의 다양한 증상을 찾아볼 수 있다.

우울증을 유발하는 원인을 현대의학에서는 크게 외상성신경증 즉 트라우마와 호르몬 이상으로 인한 뇌의 화학작용으로 본다. 그중에서 특히 원인의 무게중심이 지난 10여 년 이상 뇌의 화학작용에 쏠려있었고 이런 이유로 가장 흔한 우울증 치료는 뇌 속의 세로토닌 수치를 높이는 노력이었다.

뇌의 화학작용으로 인한 우울증은 세로토닌 분비량의 감소,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티솔의 증가와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지나친 스트레스로 인해 코티솔 수치가 지속적으로 높아지면 인체의 호르몬 밸런스는 깨지게 되는데, 이로 인해 스트레스가 사라져도 코티솔의 수치는 떨어지지 않거나 조금만 긴장해도 코티솔 수치가 치솟게 된다.

따라서, 처음에는 스트레스를 제공하는 원인(애정관계의 상실, 신체적 질환, 역할 상실, 자아 관념의 상실이나 치욕감 등)으로 우울증이 발병하지만 만성화되면 별다른 이유 없이도 우울증은 스스로 자라난다. 정신은 황폐해지고 상대의 거절이나 거부에 극도로 민감해지며 자신감과 자존감을 상실해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게 되는 것이다.

우울증 환자를 더 두렵게 하는 것은, 희망의 상실이다. 그들은 이 같은 고통이 또다시 찾아올 것을 알기에 미래의 상실에 대한 반응인 불안증을 함께 느낀다. 미국의 정신의학자 피터 D. 크레이머는 '우울증을 특징짓는 것은 강도가 아니라 지속기간'이라고 지적한다.

우울증의 발병률은 남성보다 여성이 1.5~2.5배가량 높다. 그중 남편과 아이가 있는 여성과, 아내가 있는 남성과의 격차가 가장 크다. 이 시기에 겪을 수 있는 우울증의 종류는 산후 우울증, 폐경기 우울증, 빈둥지 증후군, 고부 갈등으로 인한 우울증 등 임신과 출산, 육아, 부부, 고부 관계와 관련이 깊다.

결국 여성의 성 역할과 우울증이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일하는 여성에게나 전업주부에게나 가정은 여전히 휴식처가 아닌 '일터'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캐나다 오타와 대학의 심리학 교수로, 우울증에 걸린 수많은 여성들을 상담 치료한 저자, 발레리 위펜은 <여자를 우울하게 하는 것들>에서 '성 역할'과 '인간관계의 고통'에서 그 원인을 찾는다. 분노와 짜증, 불안, 불면증과 과다수면, 단식과 폭식 등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는 우울증의 증가는 시대의 흐름을 좇지 못하는 전통적인 성 역할과 친밀한 인간관계를 중시하는 여성의 특성이 이유라고 분석한다.

결혼한 여성의 우울증은 비단 한 사람으로만 끝나지 않는다. 우울증 환자의 자녀는 다른 사람의 요구를 기민하게 감지하는 능력을 발달시킨다.

어릴 때부터 문제가 생기는 것을 피하기 위해 부모의 마음을 읽어내기 때문이다. 청소년기에 들어서면 자녀는 우울증에 취약해진다. 이렇듯 우울증을 치료하지 않고 그대로 방치할 경우 우울증 환자 개인은 물론 자녀나 가정까지 영향을 미치는 악순환에 빠지게 된다. .

우울증, 진단의 과잉 경계

기실 우울증의 원인이 되는 스트레스는 어느 사회, 어느 시대에나 존재했다. 사람의 의식이 깨어 있는 한, 인간은 미래를 불안해하며, 과거의 실수나 상처로 힘들어하고, 또 의무감이나 책임감에 부담을 느끼게 마련이다. 하지만 우울증은 언젠가부터 소리 없이 우리 사회에서 가장 위험하고 널리 퍼진 질병 중 하나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우울증 앞에 익숙한 수식어처럼 붙은 '마음의 감기'라는 문구는 그것을 환절기 때면 찾아오는 감기처럼 별것 아니게 치부하게 하면서도 감기처럼 만연한 것으로 당연시하게 한다. 때로 이것은 현대인들의, 모자랄 것 없는 중산층의 일상적인 병처럼 여기기도 하지만 그것은 '병'이라고 이름 붙여지기 훨씬 이전부터 '멜랑콜리'라는 이름으로 인간의 삶 속에 내재해왔다.

앤드류 솔로몬은 다른 사회와 시대 속에 공기처럼 호흡된 우울증의 모습을 발견한다. 인구의 10명 중 8명이 우울증을 앓는다고 알려진 그린란드의 이누이트들은 매년 인구의 0.35%가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극심한 추위의 긴 겨울을 견뎌야만 하는 그들은 집 안에서 대가족이 몇 달간을 함께 지내야 하지만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거나 불평을 금기시하는 관습이 있어 그들의 심리적 부담은 가중된다.

한편 르네상스 시기에는 우울증이 심오함을 드러낸다고 여겨졌다. 이탈리아의 의사이자 철학자인 피치노는 '예술적인 창조물은 일시적인 정신 이상 상태에서 내려오는 뮤즈에 의존하므로, 멜랑콜리는 영감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이라고 보았다. 결국 우울증이 서양화된 생활습관을 가진 현대인들만의 질병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하다.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최근 우울증 진단 과잉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의 발표에 따르면 최근 5년간 우리나라 우울증 진료환자의 '항우울제' 투여횟수는 52% 이상 증가했다.

전술한 우울증 환자의 증가와 대비해서 보더라도 항우울제 투여횟수의 증가는 비교적 많은 편이다. 심각한 우울증 치료에 대해서는 항우울제가 도움을 줄 수 있지만, 그에 따른 부작용도 적지 않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있는 만큼 항우울제 처방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할 필요가 있다.

정신약물학 연구교수인 크리스토퍼 레인은 <만들어진 우울증>에서 인간의 일상적인 불안이나 수줍음이 어떻게 정신질환으로 탈바꿈되었는지를 폭로하고 있다.

그는 신경정신의학계와 정신분석학계의 오랜 갈등과 주도권 싸움이 그 배경이 되었음을 밝히며, 1970년대 진행된 DSM-Ⅲ(정신장애 진단 및 통계 매뉴얼)이 신경정신의학계의 승리의 종지부를 찍었다고 말한다.

덕분에 수백 가지의 정신장애가 약물 치료를 요구한다고 간주되고 있으며, 우울증과 사회불안증의 진단 건수는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1994년에 발간된 DSM-Ⅳ에는 총 350개 이상의 정신장애 목록이 업데이트되었다. 1968년보다 두 배로 늘어난 수치다. 더 큰 문제는 세계 곳곳에서 의심의 여지 없이 미국식 진단과 처방을 적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반드시 약물 치료를 해야만 하는 정신질환은 분명 존재한다. 하지만 적극적인 상담치료나 정신분석 요법으로 충분히 극복할 수 있는 '수줍음'과 같은 감정이 과도하게 '질환'으로 진단되어, 약물치료가 남발되는 현상은 우려할 만하다. 크리스토퍼 레인은 '불안에 시달린다고 해서 반드시 불안신경증을 앓는다고 말할 수는 없다'는 프로이트의 주장을 상기시킨다.

앤드류 솔로몬은 "우울증은 균형 감각을 빼앗고 망상에 빠지게 하고 거짓 무력감에 젖게 하지만 진실의 창이 되기도 한다"며 우울증에 대한 변화된 인식을 촉구한다.

아울러, 감기 바이러스에 대한 처방이 항생제가 올바른 답이 될 수 없듯이 마음의 감기라는 우울증의 치료 또한 오직 항우울제뿐일 수만은 없다. 오히려, 끝없는 무한경쟁 사회에서 많은 이들이 자신을 유사우울증 환자로 느끼는 것은 삶과 미래에 대한 희망을 상실한 때문이 아닐까.

참고 도서
<한낮의 우울>, 앤드류 솔로몬, 민음사
<만들어진 우울증>, 크리스토퍼 레인, 한겨레출판
<우울증에 반대한다>, 피터 D. 크레이머, 플래닛
<미국처럼 미쳐가는 세계>, 에단 와터스, 아카이브
<여자를 우울하게 하는 것들>, 발레리 위펜, 레드박스



이인선 기자 kelly@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