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면 속 두 남녀가 얼굴이 닿을 정도로 가깝게 마주보며 서로를 노려보고 있다. 이상하게 점점 커지는 두 사람의 숨소리. 그 순간 화면 위에서 갑자기 붐 마이크가 내려오면서 촬영은 중단된다. 피곤해서 졸다가 마이크를 놓친 스태프는 혼이 나지만, 동료가 사주는 피로회복제로 다시 웃으며 힘을 낸다.

직장인의 노고와 애환을 박카스가 달래준다는 내용의 광고다. 항상 일상 속의 에피소드로 서민적인 이미지를 구축해온 제품답게 이 광고도 직장인들의 공감을 노렸다.

하지만 야근에 시달리는 직장인들에게 이 광고는 결코 개운치 못한 뒷맛을 남긴다. 이미 수없이 많은 박카스를 들이킨 사람이라면 그것만으로 근본적인 피로가 해소될 리 없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피로'마저 마케팅으로 연결시키는 사회

사람들은 늘 피곤해한다. 현대사회에서 만성피로와 편두통은 어느새 살아있음의 흔적처럼 받아들여진다. 심지어 이런 고통은 출세와 성공을 위한 당연한 과정처럼 포장되기도 한다.

한 두통약 광고는 '당신이 머리아픈 건 남보다 더 열정적이기 때문'이라고 격려한다. 광고에서 위안을 얻은 사람들은 그 원인을 제거하려는 노력보다, 약을 먹으면서 고통을 감내하는 쪽을 택한다. '두통 환자'를 '열정적인 사람'으로 치환시킨 광고 전략의 승리다.

피로감은 이미 관련 상품의 마케팅에서 중요한 키워드가 됐다. 올해 제약업체의 '피로 마케팅'은 어느 해보다 대성공을 거두고 있는 중이다. 특히 이 전략의 최대 수혜자는 간 기능 개선제를 비롯한 간장약이다.

지난 1분기 간장약 시장은 우루사 광고가 공전의 히트를 친 덕분에 매출이 36%나 오른 것으로 나타났다. 차두리의 CM송 '간 때문이야'가 노래방까지 진출할 정도로 대히트를 친 우루사는 전년 동 기간 대비 100%가 넘는 매출신장을 기록하며 상반기 최고의 인기제품으로 등극했다.

하지만 많은 전문의들은 간 질환은 피로의 가장 주요한 원인이 아니라고 지적한다. 만성피로의 경우 50~80% 정도가 우울증 같은 정신적인 원인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 피로감은 수면시간이 부족할 때도 2배 정도 증가한다. 결국 피로할 때는 약을 복용하기보다는 적절한 휴식을 취하는 것이 급선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현실은 또 다시 사람들을 일터로 내몬다. 오늘도 철의 직장인들은 박카스와 우루사 세트로 피로를 견뎌내며 밤을 샌다. 해당 제품들의 판매량의 증가는 단지 광고의 효과 때문만은 아니다. 이는 피로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많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쉬지 못하는 한국인, 그 끝은 '탈진'

그러나 개미처럼 쉼 없이 일만 하는 삶은 인간들에게 필연적으로 부작용을 일으킨다. 대표적인 것이 '번 아웃 신드롬(Burn out Syndrome, 탈진증후군)'이다.

일에만 매진하는 사람들이 주로 겪는 이 증상은 무기력증이나 자기혐오를 비롯해 이명, 우울증, 심지어 자살이라는 비극을 낳기도 한다. 이는 생산성 증대에만 초점이 맞춰진 한국의 기업문화가 초래한 폐해로 지적되고 있다.

최근 웅진씽크빅이 온라인 리서치 전문업체 엠브레인에 의뢰해 진행한 설문조사는 이런 번 아웃 신드롬의 높은 가능성을 말해주고 있다.

남녀 직장인 1000명을 대상으로 '휴식에 대한 의식' 관련 질문을 한 이번 조사에서 '충분히 쉬고 있다'에 대한 응답은 전체 직장인의 12.7%에 지나지 않았다. 이는 한국 직장인의 대부분이 탈진 상태에 빠질 수 있는 환경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휴가가 있는데도 이들이 충분히 쉬지 못하는 이유는 뭘까. 이와 관련된 '보장된 휴가는 자유롭게 사용하느냐'라는 질문에 응답자의 대부분이 휴가를 사용할 때 눈치를 보는 것으로 나타났다. '혼자 쉬는 게 미안해서(34.8%)', '돌아왔을 때 밀린 일이 부담스러워서(29%)', '상사가 안 쓰니까(20.3%)', '인사고과에 나쁜 영향을 줄 것 같아서(15.6%) 등이 그 이유로 꼽혔다.

스트레스 해소를 위한 방법을 묻는 조항에서도 직장인들은 '음주가무(27.4%)'보다 '휴식(37%)'을 택했을 정도로 '제대로 쉬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이런 바람이 실현되지 못하는 것은 역시 기업의 경영문화가 큰 장애물로 작용하고 있다. '200만 원의 상여금을 받는 조건으로 연차 전부를 반납하고 일할 수 있나'라는 질문에 과반수 이상이 '그렇다'고 답한 것. 이는 결국 현재의 근무환경에서 탈진으로 인한 부작용은 시간문제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제대로 쉬기'의 중요성

이처럼 휴가가 있어도 제대로 쉬지 못하는 구조로 인해 한국은 OECD 회원국 가운데 가장 많은 연간 2256시간의 근무 시간을 기록하고 있다. 반면 여가 시간에서는 자연스럽게 최하위를 차지했다.

이런 삶이 지속된 결과 '행복지수(Better Life Initiative)'에서도 꼴찌에 가까운 26위를 기록 중이다. 2년째 1위를 유지하고 있는 자살률도 사회 전반에 만연한 성과제일주의와 이로 인한 우울증과 연결된 문제로 볼 수 있다.

게다가 오랫동안 제대로 쉬어보지 못한 사람들은 여건이 주어져도 이를 누리지 못하게 됐다. 이는 휴식이 돈이나 시간을 들여 하는 특별한 체험이라는 오해 때문이다.

최근 출간된 <행복의 중심, 휴식>에서 저자인 울리히 슈나벨은 이 오해를 해결해야 사람들이 다시 제대로 휴식을 누리게 된다고 말한다. 저자는 휴식이란 '밀도 있는 한가로운 순간'이라고 정의하며 자신과의 소통의 시간을 되찾으라고 권유한다.

물론 휴식 문화의 개혁은 개인 차원에서만 다루어질 문제는 아니다. 개인에게서 휴식을 빼앗아간 것은 어디까지나 기업과 사회라는 외부 환경이다.

<잃어버린 10일>의 저자인 사회학자 김영선 박사는 1970년대의 성장과 발전주의 이후 '장시간 노동문화'가 고착화됐고, 이 과정에서 휴가의 원래 의미가 변질됐다고 지적한다. 그래서 그는 오랫동안 통제의 대상이었던 휴가를 다시 개인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자유시간으로 바꾸자고 주장한다.

그럼에도 제대로 된 휴식은 사람들에게 여전히 사치처럼 여겨지고 있다. 하지만 노동의 환경이 근본적으로 재편되고 있는 지금, '쉬지 않고' '열심히' '오래' 일하는 것은 이미 업무 효율과는 먼 얘기가 됐다. 더군다나 지금의 한국인에게 제대로 쉬는 일은 더 이상 여유가 아닌 생존의 문제로 다가왔다.

장정빈 한국경영정책연구원장은 "일과 휴식은 인생이라는 수레를 떠받치는 두 바퀴와 같다"며 "어느 한쪽에도 치우침이 없이 균형을 이룰 때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다"고 조언한다.

이런 점에서 휴식은 단순히 개인의 선택이 아니라 행복한 삶, 더 나은 사회를 위한 이 시대의 현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송준호 기자 trista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