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포 종점'서 '압구정 날라리', '이태원 프리덤'까지삶의 터전의 아름다움 수용하기 시작했다는 의미

"음악이 있어, 세계가 있어. 이태원 프리덤, 저 찬란한 불빛, 오오오."

"UV는 이태원 갔어? 우리들은 홍대에 왔어"

"셔츠가 다 젖을 때까지~압구정, 돈이 없어도 오늘만은 날라리!"

노래 가사에 동네 이름이 등장할 때, 그것은 빼도 박도 못할 그 지역의 대표 이미지다. 최근 화제가 됐던 MBC <무한도전>의 '서해안고속도로가요제'에서는 출연진과 가수가 짝을 이뤄 만든 노래 7곡이 발표됐다. 그 중 유재석과 이적이 만든 노래 '압구정 날라리'는 유재석이 신인 시절 개그맨 선배들과 젊음을 불태웠던 압구정동의 나이트 클럽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어서 와요, 이쁜 그대. 몇 명이서 놀러 왔나요?" 같은 가사에는 90년대의 전형적인 작업 멘트와 지하 나이트 클럽에서 올라오는 짙은 향락의 냄새가 생생하게 살아 있다. "애프터는 기대 마요. 이 바닥이 그런 거예요."라는 구절에서는 당시 좀 논다는 날라리들의 이성관과 압구정동을 중심으로 일어났던 일회성 사랑을 짐작할 수 있다.

23일 서울 홍익대 앞 클럽 M2에서 열렸던 MTV '트루 뮤직 라이브' 녹화현장.
노래 속에서 젊은 시절로 돌아가 클럽을 휘어잡던 '킹카' 유재석은 노래의 마지막 부분을 "내가 살던 곳은 수유리"라는 애드리브로 마무리한다. 광란의 밤이 끝나고 궁상맞은 청춘으로 돌아와 돈을 모아 택시를 타고 집에 들어갔던 자신의 한때를 유머러스하게 자조한 것이다.

물론 수유리 강북구청장은 자신의 관할지가, 화려한 강남에서 땀 빼며 놀던 청춘들이 터덜터덜 돌아가는 '덜 화려한 지역'으로 묘사되는 것이 마뜩치 않을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대중 가요의 가사는 그 어떤 지역 정체성 연구 결과보다 더 간결하고 강력하게 동네의 이미지를 한 단어로 정리한다.

슬픔의 마포에서 자유의 홍대까지

한국 대중 가요에 지역명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꽤 오래 전부터다. 그때나 지금이나 가사에 언급되는 지역의 특징은 단 한 가지, 당시 '가장 주목 받는 곳'이라는 점이다.

지난해 청계천문화관에서는 '서울대중가요-서울을 노래하다'라는 제목의 전시회가 열렸다. 일제 강점기에서부터 현재까지, 서울 또는 서울 내 특정 지역을 주제로 한 대중 가요를 모은 이 전시회에서는 710명의 가수들이 부른 1114곡의 가요가 소개 됐다.

10cm
노래 제목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지역명은 서울이 단연 1위로 총 544곡이었으며 명동이 85곡, 한강이 70곡, 서울역이 55곡, 남산이 40곡, 종로가 39곡, 청계천과 여의도가 24곡, 이태원이 21곡이었다. 전시회에 자료를 제공한 대중문화평론가 최규성씨는 "대중 가요 가사만 봐도 당시 어디가 가장 번화한 곳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고 말한다.

"해방 이전 가요에 등장하는 지명은 모두 북촌에 집중돼 있었습니다. 해방 후에는 남촌의 충무로, 명동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고, 강남을 노래한 건 70년대 중반 (강북과 강남을 잇는) 다리가 놓이고 개발이 시작되면서부터죠. 9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신세대 문화가 꽃핀 압구정동과 청담동 등지가, 2002년 월드컵 이후에는 클럽 문화로 뜬 홍대가 가사에 등장했습니다."

우리끼리만 아는 그때 그 골목

가사에 동네 이름을 넣는 이유는 무엇일까? 가요의 노랫말에 친근한 지명이 등장함으로 인해 얻을 수 있는 효과가 있을까? 수유리, 성산동, 영등포 같은 익숙한 동네 이름은 같은 문화를 공유한 이들에게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문학 평론가 이성우씨는 시적 배경을 친숙한 장소로 설정할 경우 "특정 장소에 대한 내밀한 기억을 불러내는 과정에서 독특한 공감의 효과를 산출한다"고 말했다.

'무한도전'의 '서해안고속도로가요제'
한국에서 동네 이름이 불러내는 내밀한 기억이란 주로 애환과 연관되는 경우가 많았다. '언제나 언제까지나 이 청춘 시들도록 목 메어 불러보는 명동의 블루스', '외로운 사나이가 서글피 찾아왔다 울고 가는 삼각지', '외로움을 달래가면서 떠나가는 장충단 공원'. 최규성씨는 외국 가사와 한국 가사의 차이가 이것이라고 말한다.

"세계적으로 도시나 동네를 언급한 노래들은 주로 찬미를 통한 환상을 심어주는 역할을 합니다. 하지만 한국 가요의 경우 주로 슬픔을 환기하는 경우가 많았죠."

60년대 후반에 발표된 가요 '마포 종점'은 마포구 도화동에 살았던 작사가 정두수씨가 노랫말을 썼다.

"밤 깊은 마포 종점 갈 곳 없는 밤 전차. 비에 젖어 너도 섰고 갈 곳 없는 나도 섰다. 강 건너 영등포엔 불빛만 아른아른 돌아오지 않는 사람 기다린들 무엇하나. 첫사랑 떠나간 종점, 마포는 서글퍼라."

지금이야 월세 300만 원짜리 오피스텔이 즐비한 비싼 땅이지만 당시 마포는 이농 현상으로 도시에 몰려든 시골 출신 노동자들이 모여 살던 곳이었다. 그들은 하루 종일 격무에 시달리다가 밤늦게 전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고 마포는 그 전차의 종점이었다.

그러나 그 후 50년 간 일어난 한국의 급격한 변화는 마포의 땅 값도, 국민 정서도, 노래 가사도 바꿔 놓았다. 이제 가사에 나오는 동네 이름은 슬픔의 공유를 위한 매개체가 아닌 설레는 연애 감정, 환락에 대한 기대, 즐거웠던 젊음을 회상하는 도구가 되었다.

홍대를 기반으로 한 인디밴드 중 최근 가장 주목 받는 십센치의 노래 '사랑은 은하수 다방에서'도 마찬가지다.

"사랑은 은하수 다방 문 앞에서 만나 홍차와 냉커피를 마시며 매일 똑 같은 노래를 듣다가 온다네…그대 없는 홍대, 상수동, 신촌, 이대, 이태원 걸어 다닐 수도 없지."

은하수 다방은 홍대 근처에 실제로 있는 카페 이름으로, 가사는 그곳에서 인연을 만난 젊은 남자의 이야기와 헝그리 정신을 벗어던진 '요즘 것'들의 여유로운 생활상, 그리고 홍대의 젊은 아티스트들이 대체로 공유하고 있는 생활권까지 알려준다. 개그맨 유세윤과 가수 뮤지가 결성한 프로젝트 그룹 UV의 '이태원 프리덤'은 바뀐 정서의 결정판이다.

"요즘 심심할 땐 뭐해, 어디서 시간 때우나. 강남 너무 사람 많아, 홍대 사람 많아, 신촌은 뭔가 부족해. 새로운 세상 그곳을 말해봐. 음악이 있어, 또 사랑도 있어, 세계가 있어. 모두 모여 이태원, 젊음이 가득한 세상."

이태원은 미 8군 주둔지로서 여러 슬픈 역사를 가진 곳이지만 최근에는 한강진 역 부근까지 개발되면서 압구정동, 홍대, 가로수길을 잇는 최고의 번화가로 급부상했다. 후커힐과 게이바 등 기존의 유흥 업소들이 뿜어내는 자유로운 분위기에 세계 각국의 문화가 뒤섞여 다문화 시대에 어울리는 트렌디한 거리가 된 것이다.

동네를 노래한다는 것은 자신이 몸 담은 지역의 아름다움을 수용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몇 해 전만 해도 자국 문화에 대한 한국인들의 감정은 애증에 가까웠다. 늘 보는 마누라처럼 지겹고 무가치해 보이지만 누가 욕하면 화나는 것. 촌스럽지만 지켜주어야 할 무엇이었던 한국 문화는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보는 시각이 달라졌다.

최근까지 이어졌던 복고풍 패션은 한국의 과거 패션이 재발굴 된 최초의 사례다. 지금까지 한국에서 유행했던 복고 패션은 모두 80년대의 미국 패션이나 60년대의 영국 패션처럼 외국의 그것이었지만 이번에는 실제로 우리네 어머니와 할머니들이 입었던 꽃무늬 남방과 월남 치마가 거리를 휩쓸었다.

사대주의와 국수주의의 사슬에서 벗어난 건강하고 쿨한 애정이다. 뉴욕과 파리가 아닌 상일동과 가회동, 소격동을 노래하면서 우리는 너절한 골목과 전선으로 가득한 하늘이 있는, 동네의 가치를 발견하는 중이다.



황수현 기자 sooh@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