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이버시 지키며 대중과 공감을 꿈꾼다

<화가의 집> 중 클로드 모네의 거실에서 본 식당(사진제공=아트북스)
개인과 예술의 공간은 그 목적부터가 달랐다. 현대인들은 자신의 숨통을 조여 오는 현실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공간을 만들고 탐닉한다.

예술의 공간은 공유와 공감의 영역을 넘나들며 감성을 표현한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는 하지만 자유를 갈망하고, 감성을 그리워한다. 공간이라는 이름으로 인간은 이중적 양면성을 내보이는 것이다.

그렇다면 개인공간과 예술공간이 혼합된 영역은 없을까. 창작자들의 공간이야말로 매우 사적이면서도 감수성에 복받쳐 있다. 특히 예술가들은 공간 안에서 사적인 자존심을 지키며 대중과의 공감을 꿈꾼다.

그렇다면 창의적 공간은 어떤 법칙을 따를까.

"문학은 이곳에서 시작되었다."

<걸작의 공간>에서 작가 윌리엄 포크너의 공간(사진제공=마음산책)
행복과 고독은 한 끗 차이다. 이 말을 여실히 느끼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글쟁이, 작가들이다. 집중과 공상, 환상 등에 사로잡혀 글을 쓰다가도 문득 고독함에 치를 떨게 분명하다.

글을 완성이라도 할라치면 어김없이 해방감을 드러내며 행복에 젖을 그들. 작가들에게 고독과 행복은 동전을 뒤집듯 너무도 잦은 일이라 이상할 것도 없다.

그런데 누가 이런 기복 있는 상황들을 받아줄까? 결국 작가들은 혼자 분출해야 하고, 혼자 감내해야 한다. 마치 글쓰기의 통과의례처럼 굳어버린 이런 의식들 때문에라도 작가들은 프라이버시한 공간에 목을 맨다.

"이런 의식들은 반드시 필수적인 프라이버시 안에서 실행되고, 프라이버시에 헌신해야 한다"고 <걸작의 공간>의 작가 J.D. 매클라치는 말한다. 이 책 속에는 미국의 유명 작가들의 집과 그들의 집필 공간이 담겨 있다.

<작은 아씨들>의 작가 루이자 메이 올컷(1832~1888)은 프라이버시 공간을 누구보다 갈구했던 인물이다. 그녀는 평생 자신의 방을 원했다고 한다. 언니 애너와 침실을 같이 썼기 때문에 공간에 대한 그리움이 강했다. 마음껏 상상하고 웃고 떠들며 글을 쓰고 싶었기 때문이리라. 때문에 그녀는 침실에서 주로 글을 썼다고 한다.

<걸작의 공간> 속 작가 에밀리 디킨슨의 공간(사진제공=마음산책)
그러다 그의 아버지가 자그마한 그녀만의 공간을 마련해준다. 그녀의 방에 난 두 개의 창문 사이에 나무판자로 만들어 준 책상이 그것이다. 이 공간은 '과연 글이 써졌을까?' 할 정도로 매우 협소하다. 간신히 의자를 놓고 앉아 종이와 펜을 굴릴 수 있는 공간이다.

하지만 창문으로 들어오는 커튼 사이의 햇빛은 루이자에게 풍부한 상상력을 제공하기에 충분했다. 집중과 상상력이 극에 달했기 때문인지 루이자는 이 공간에서 <작은 아씨들>을 집필했다. 하루에 열네 시간이상 앉아 있곤 했다. 철로 만든 펜을 너무 꾹꾹 눌러 엄지손가락에 상처를 입을 정도였다고 하니, 그녀의 집필 공간이 이끈 힘을 알만 하다.

여류시인 에밀리 디킨슨(1830~1886)도 창가와 자그마한 책상이 프라이버시를 위한 공간이었다. 디킨슨은 "말로 할 수 없어서 시로 적었다"고 할 만큼 단아한 외모와 소극적인 성격을 지녔지만, 글만큼은 대범했다. 미국인들은 그녀에게 '괴상한 시를 썼다'고 평하기도 한다.

그의 검소한 프라이버시 공간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녀의 침실에 있는 집필용 책상은 책 한 권을 펼치면 가득 찰 정도로 작다. 창가에 붙어 앉을 수 있게 마련된 공간은 사색의 자유로움을 느끼게 해준다.

소박한 공간이지만 디킨슨은 이 장소를 좋아했을 게 분명하다. 그녀는 집을 나서는 대신 방 안에만 머무르며 글을 썼다고 한다. 특히 1862년과 1863년인 1년 사이에 수백 편의 시를 완성했다.

<걸작의 공간>에서 작가 내더니얼 호손의 공간(사진제공=마음산책)
너대니얼 호손(1804~1864)의 집필 공간은 폐쇄적이다. 호손은 집필용 책상을 전망이 보이지 않는 쪽으로 향하게 했다. 벽난로 옆에 나무판으로 짜 넣은 책상은 간신히 높이만 조절할 수 있었다. 벽과 씨름하며 고독을 삼키고 인고의 글이 탄생하기까지 그는 매일 네 시간씩 글을 썼다.

협소한 공간의 힘은 작가들에게 집중을 호소한다. 작가 플래너리 오코너와 윌리엄 포크너도 공간이 주는 위안을 책상에서 찾았다. 책상의 아늑함으로 작품을 써내려 갔다.

어니스트 헤밍웨이(1899~1961)는 두 번째 아내 폴린이 만들어준 작업실에서 집필했다. 커다란 두 개의 창은 공간을 열어주는 역할을 했으리라. 커다란 책장과 수많은 책, 둥근 테이블의 조화는 남성적인 힘을 느끼게 한다.

그는 일이 되는 날은 "연필 일곱 자루가 있는 아침"이라고 했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와 <킬리만자로의 눈> 등 장·단편 소설들을 쏟아냈다. 1945년 노벨상을 받은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 쓰는 것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글쓰기는, 기껏 잘해야 고독한 삶이다."

화가의 공간은 화풍이 된다

<걸착의 공간> 속 작가 플래너리 오코너의 공간(사진제공=마음산책)
"내가 죽고 나면 내 가련한 작품들이 어떻게 될지 걱정이다. 정말 힘들게 모았는데, 결국 모두 흩어져서 사라지고 말겠지. 이렇게 전부 한 곳에 있어야 비로소 내가 어떤 예술가였는지 조금이나마 알려줄 수 있을 텐데. 이 그림들 사이에서 잠이 들면 얼마나 행복했던가."

작가의 공간이 고독의 산물이었다면, 화가의 공간은 화풍이 되거나 갤러리가 되었다. <화가의 집: 화가가 머물고 그림이 태어난 집을 찾아서>에는 화가들의 집이란 예술적 영감의 원천이며, 작업의 연장이자 무대가 된다고 설명한다. 즉 화가의 공간은 예술 작품으로서 표현돼 작업의 연장이자, 그 무대가 되기도 한다.

자신의 그림들을 사랑했던 화가 귀스타브 모로(1826~1898)는 죽음의 두려움보다 작품의 소실이 더 걱정이었다. 결국 모로는 자택을 미술관으로 개조해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작품들을 남겨두었다. 책은 그의 공간을 두고 '삶과 기억으로 빼곡히 채운 미술관'이라고 칭한다.

화가들의 공간은 다분히 작업을 위한 곳만은 아니다. 그들의 아틀리에는 화폭에 담기는 것도 모자라 모로처럼 미술관으로 만들어버렸다.

20세기 전반 영국에서 활동한 지식인, 작가 집단이었던 블룸즈버리 그룹의 화가 던컨 그랜트 (1885~1978)의 작업 공간은 그야말로 깔끔하다. 밖을 바로 내다볼 수 있는 창가에 의자를 놓고 누드화나 풍경화, 정물화를 그리는 그의 모습이 상상된다.

<화가의 집> 중 화가 귀스타브 모로의 2층 계단(사진제공=아트북스)
어쩌면 이젤 옆의 거울 속 장면을 그려보지 않았을까 하기도 한다. 그도 그럴 것이 그랜트는 자신의 거실 벽면에 직접 그림을 그려 넣었다. 공간을 공간으로 인식하지 않고 미술로 한 단계 더 승화시킨 모습이다. 공간을 활용하는 감각을 지녔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공간의 한계를 극복한 화가도 있다. 클로드 모네(1840~1926)는 그의 공간을 아틀리에로 한정 짓지 않았다. 그가 심취한 건 정원과 연못. 말년 그의 작품을 보면 꽃향기가 가득한 색채가 가득하다. 모네는 프랑스 지베르니의 저택을 사랑해 집 자체를 작업의 공간으로 여겼다.

그는 정원에 정성을 쏟으며 새로운 품종의 꽃을 심고, 그림을 그리기 위한 구조로 정원의 배치를 변경했다고 한다. 일례로 <수련> 연작은 이런 과정을 거쳐 탄생한 작품이다.

또한 그가 좋아했던 장소는 부엌과 식당도 포함된다. 그는 글을 쓰는 작가들보다 공간을 넓게 활용하며 사색과 표현을 함께했다. 모네는 생활공간이 예술을 하는 데 있어서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줬다. 공간이 주는 영감의 원천이 해당 작가의 화폭에 고스란히 담기는 셈이다.

화가 앙드레 드랭(1880~1954)도 마찬가지. 그는 19세기 말 지어진 아름다운 저택, '장미원'을 구입해 그 곳에서 그림을 완성했다. 드랭도 모네처럼 장미원의 정원을 꾸미며 공간의 개념을 넓혀갔다.

책 <화가의 집> 중 화가 던컨 그랜트의 아틀리에(사진제공=아트북스)
채소밭을 꾸미거나 동물들을 기르며 장미원을 목가적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저택으로 만들었다. <숲의 빈터>나 <오디세우스의 귀환> 등 기묘한 역사화들은 이런 공간의 파괴에서 온 화가의 또 다른 심리가 아니었을까.

결국 화가에게 공간이란 때 묻은 바깥세상과 분리될 수 있는 안식처이면서, 영감을 얻는 고귀한 곳이다. 화가와 공간이 맺어가는 궁합은 후대에게 그들의 작품의 색깔까지도 연결 짓게 하는 요소이기도 하다.



강은영 기자 kiss@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