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객수ㆍ수상 실적 뿐 아니라 제작, 배급 통로 다양해지고사회적 제작과 공동체 상영 등 독립 다큐 대안적 시도들방송ㆍ독립 다큐 교류 활발… 지속 가능 구조 만드는 게 과제

'강정'
"한국 다큐멘터리에 대한 관심이 요즘처럼 뜨거웠던 적도 없을 겁니다."

김유열 EBS 편성기획부 부장은 "다큐멘터리의 전성시대가 도래하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가 여기저기서 포착되고 있다"고 증언한다.

2009년 <워낭소리>가 300만 관객을 동원하며 다큐멘터리가 비주류 장르라는 공식을 깬 이후 <울지마 톤즈>, <아마존의 눈물> 등 극장으로 간 방송 다큐멘터리, <바보야>, <법정 스님의 의자> 등 종교 다큐멘터리의 잇단 흥행은 한국 다큐멘터리의 산업적 가능성을 입증했다.

해외에서 작품성을 인정받는 다큐멘터리도 늘었다. 2009년 박봉남 감독의 <아이언 크로즈>가 암스테르담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중편 경쟁부문에서 대상을 수상한 데 이어 작년 MBC의 <풀빵 엄마>가 에미상을 받았다.

관객수와 수상 실적은 한국 다큐멘터리 진화의 일부일 뿐이다. 가장 중요한 변화는 다큐멘터리가 제작, 배급되는 통로가 다양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소통 방식의 변화를 뜻한다. 사회적 제작과 공동체 상영 등 독립 다큐멘터리의 대안적 시도들은 단순히 현실을 기록하는 것을 넘어 현실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다큐멘터리의 사회적 역할을 강화하고 있다.

'오월愛'
매체 환경의 지각 변동 속에서 한국 다큐멘터리의 산업적, 미학적 가능성이 주목받고 있다.

미디어 빅뱅은 다큐멘터리를 필요로 한다

"TV 채널 간 경쟁이 심해질수록 EBS의 시청률은 더 높아지지 않을까요?"

종합편성채널 개국을 앞두고 지상파 방송사들의 근심이 깊어지고 있는 상황을 고려하면 김유열 부장의 자신감은 뜻밖이다. 하지만 이유가 있다. 다큐멘터리에 집중하는 전략을 추진한 2008년 이후 EBS의 시청률은 꾸준히 오르고 있다. 한 편을 만들더라도 잘 만들어 여러 번 방송한다는 원칙을 지킨 결과 질 높은 콘텐츠에 대한 시청자의 수요를 만족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최근에는 2년 전에 제작했던 작품을 재방송했는데 예전보다 오히려 시청률이 높아졌어요. 그만큼 다큐멘터리가 수명이 긴 콘텐츠인 거죠."

'트루맛쑈'
플랫폼이 많아질수록 '소비재'가 아닌 '내구재'로서의 콘텐츠의 가치가 중요해진다. 여러 번 반복해 방송되어도 수요를 창출해내야 한다. 질을 높이는 것이 관건이다. 제작비와 제작 기간을 충분히 보장하는 것이 '효율적' 전략이라는 뜻이다.

대중매체가 상업화될수록 반대급부로 교양적 콘텐츠에 대한 수요가 늘 것이라는 예측도 고품격 다큐멘터리의 효용을 뒷받침한다. 김유열 부장은 "새로운 밀레니엄을 앞둔 1999년, 모두가 미래와 첨단 기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을 때 <노자와 21세기>라는 프로그램을 기획해 성공시켰다.

사람의 욕구는 양면적이다. 새로운 것이 극성부리면 원형을 회복하려는 움직임도 함께 나타난다. 마찬가지로, 오락물이 넘쳐나면 지적인 만족을 주는 콘텐츠에 대한 수요도 커진다"고 설명했다.

미디어 빅뱅은 한국 다큐멘터리에 또 다른 활로가 되고 있다. EBS에서 제작한 국내 최초 3D 다큐멘터리 <신들의 땅, 앙코르>는 미국의 다큐 전문 채널 스미소니언에 역대 최고가로 수출됐다. 전세계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3D 콘텐츠 확보 경쟁의 영향이다.

수출을 염두에 둔 블록버스터급 다큐멘터리에 대한 정부의 제작 지원 정책도 맞물렸다. <신들의 땅, 앙코르>의 제작비 중 절반인 5억 원은 인터넷 진흥원이 지원했다. EBS는 전파진흥원의 지원을 받아 또 다른 3D 다큐멘터리 <위대한 바빌론>과 <위대한 로마>도 제작하고 있다. 두 작품 모두 내년 안에 완성될 예정이다.

독립 다큐멘터리,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넓히다

100일만에 완성하는 것을 목표로 지난 6월말 촬영에 돌입한 <강정> 은 독립 다큐멘터리의 사회적 역할을 적극적으로 실험하는 프로젝트다. 제주 강정마을에서 벌어지고 있는 해군기지 반대 투쟁에 힘을 싣기 위해 독립 다큐멘터리 감독 8명이 나섰다. 짧은 기간 동안 여러 명의 감독이 찍은 분량을 모아 옴니버스 영화로 만드는 '잼 다큐멘터리' 방식은 사회 현안에 기민하게 대응하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일반인들에게 후원을 받아 제작비를 마련하고 작품 소유권을 사회에 환원하는 사회적 제작 방식은 관객을 공공의 사안에 참여시킨다. 프로젝트가 진행된지 60일 만에 천만 원 가량이 모였다. 총 제작비 3천만 원의 3분의 1이다. 다큐멘터리 제작 진행 상황은 블로그(blog.naver.com/jamdocu)를 통해 공유되고 있다.

풀뿌리 민주주의의 한 사례 같은 이런 제작 방식은 상업적 콘텐츠를 넘어선 다큐멘터리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독립 다큐멘터리의 대안적 소통 시도가 SNS의 활성화 등 사회 변화와 맞물려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학교와 도서관, 일터와 마을 회관 등을 극장으로 활용하는 공동체 상영도 자리잡고 있다. 일반 극장 개봉이 쉽지 않은 독립 다큐멘터리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배급 방식으로, 관객이 직접 신청해 관람하게 된다.

독립 다큐멘터리 전문 배급사 시네마달의 김일권 대표는 "사회적 제작, 공동체 상영 등은 풀뿌리 민주주의와 연관된다. 관객들이 먹고 사는 문제뿐 아니라 주변 사안을 돌아보는 문화가 있어야 활성화될 수 있다. 공동체 상영이 안정적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은 한국에서도 이런 문화가 만들어지고 있다는 증거"라고 말했다.

한국 다큐멘터리, 협력의 네트워크를 향해

각개약진하던 방송 다큐멘터리와 독립 다큐멘터리 간 경계가 흐려지고, 교류가 활발해지고 있다는 사실은 시너지 효과를 기대하게 한다.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는 방송 다큐멘터리와 독립 다큐멘터리 간 협력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목적으로 DMZ Docs 다큐세미나 '틀자, 뜨자, 트자'를 지난 5월부터 4차례에 걸쳐 진행했다. 다양한 측면에서의 제작 노하우가 공유된 이 세미나의 내용은 영화제 기간인 오는 9월 26일 포럼을 통해 공개될 예정이다.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의 박혜미 프로그램팀장은 "해외에 비해 한국은 방송 다큐멘터리와 독립 다큐멘터리가 엄격하게 구분되어 있었다. 하지만 방송 다큐멘터리가 극장 개봉하는 등 플랫폼 차이가 사라지면서 그런 구분이 무색해졌다. 산업적 시스템을 갖추는 것이 우선이고, 이를 위해 교류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다"고 말했다.

방송사와 독립 프로덕션 간 불공정한 관계도 개선되고 있다. EBS는 간판 프로그램 중 하나인 <다큐 프라임>의 방영작을 공모로 수급하고 있다. 독립 다큐멘터리 감독들도 방송사 내부 PD와 같은 제작비와 제작 기간을 보장받는 것이다. 2차 저작물에 대한 권리 역시 공유된다. 이전에는 방송사가 모든 저작권을 독점해 왔다.

방송사 측에서도 이는 수준 높은 다큐멘터리를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는 방법이다. 김유열 부장은 "다큐멘터리 한 편을 만드는 데 15개월에서 길게는 3년까지 걸린다. 내부 인력만으로는 부족할 수밖에 없다. 더구나 방송사 PD와 독립 다큐멘터리 감독이 각자 잘 하는 분야가 있다. 역할 분담을 하는 셈"이라고 말했다.

방송 다큐멘터리의 대중성, 독립 다큐멘터리의 미학과 윤리가 서로에게 자극이 되기도 한다. 김일권 대표는 "독립 다큐멘터리 감독들이 극장에서 흥행하는 방송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관객과의 소통에 대해 더 깊이 고민하는 것 같다. 사회의 소외된 영역을 알리는 기존의 명분을 대중적인 방식으로 풀어내려는 시도가 많아졌다. 반면 방송사 PD들은 독립 다큐멘터리 감독들의 작가 의식, 대상과의 윤리적 관계 등에서 영감을 얻는 것 같다"고 말했다.

다큐멘터리의 힘이 필요한 시대

부당 해고를 당한 기타 공장 노동자들의 투쟁을 쫓으며 초국적 자본주의 체제 하 문화와 소비 생활의 딜레마까지 닿는 집념의 다큐멘터리 <꿈의 공장>, 전직 방송사 PD가 직접 음식점을 차려 TV에서 '맛집'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재현해낸 <트루맛쇼>, 광주 시민의 생생한 육성을 통해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밑으로부터의 역사 쓰기를 시도한 <오월愛>, 눈이 보이지 않고 귀가 들리지 않아 촉각으로 대화를 나누고 마음 안에 자신만의 우주를 지은 주인공의 삶을 시적으로 담아낸 <달팽이의 별>, 종로의 게이 커뮤니티와의 소통을 통해 문화 운동으로서의 다큐멘터리 제작을 시도한 <종로의 기적>과 재개발 직전 청계천의 풍경과 감독 자신의 가족사를 씨줄 날줄 삼아 한국 근현대사에 대한 인상적인 태피스트리를 엮어낸 <청계천 메들리>... 최근 제작된 한국 다큐멘터리에서는 활기와 다양성이 두드러진다.

이는 단지 주제와 소재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김일권 대표는 "객관적 사실을 기록하는 것을 넘어 작가의 해석, 정치적 관점과 사회적 입장, 삶에 대한 보편적 이해를 담아내는 다큐멘터리가 중요해졌다"고 말한다. 현실이 단편적 정보들과 독단적 주장들, 복잡한 이해관계로 구성되어 있는만큼, 진실을 추구하는 다큐멘터리의 고민이 더욱 유효한 시대라는 것이다.

앞으로의 과제는 한국 다큐멘터리의 창의력과 성찰이 지속될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한지수 한국독립PD협회 글로벌전략위원회 위원장은 "미디어 빅뱅의 와중에 제대로 된 미디어 산업 구조와 다큐멘터리 제작 환경을 만들기 위해 판을 짤 수 있는 기회를 놓쳐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김일권 대표는 "다큐멘터리를 일종의 공공재로 접근하는 정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워낭소리> 이후 공공기관의 제작 지원 프로그램이 늘어나긴 했지만 아직도 수익성 콘텐츠의 잣대로 다큐멘터리의 가능성을 판단하고 있다. 매년 좋은 다큐멘터리를 선정해 학교, 도서관 등에 배포하는 정부 차원의 아카이브 사업 등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박우진 기자 panorama@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