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시대 공적 현실과 일상의 접점서 새로운 진실 발견

'꿈의공장'
진실을 탐구하는 다큐멘터리의 고전적 미덕은 다양한 양식으로 진화하고 있다. 진지함을 넘는 집요함으로 사회적 이슈의 의의를 드러내고, 기술을 활용해 사라진 역사를 되살리기도 한다.

세계의 무게 중심이 개인으로 기운 디지털 시대의 감성은 공적 현실과 일상의 접점에서 새로운 진실을 발견해낸다. 지금, 한국 다큐멘터리의 최전선에 있는 작품들을 소개한다.

음악도 현실이다, <꿈의 공장>

"노동자가 없으면 음악도 없다, 음악이 없으면 삶이 없다 No Workers No Music, No Music No Life"

출퇴근길에, 속상할 때, 그리움을 어쩔 수 없을 때 음악에 그렇게 기대어 살면서도 우리는 그 음악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모른다. 음악은 작곡가의 머릿속이나 가수의 성대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다. 악기를 만드는 노동자의 손에서, 기타 공장을 둘러싼 정치, 경제적 현실도 음악의 일부다.

'청계천 메들리'
김성균 감독의 <꿈의 공장>은 세계적 기타 브랜드의 하청 작업으로 국내 최대 기타 회사로 성장한 콜트/콜텍의 공장을 찾아간다. 회사측이 인천 콜트 공장 노동자 3분의 1을 정리해고하고 대전 콜텍 공장을 폐업시킨 2007년 이후, 이 곳의 노동자들은 "부당한 조치"라고 주장하며 기약 없는 투쟁을 벌이고 있다.

영화는 5년째 계속되고 있는 투쟁의 현장에 있다. 노동자들과 함께 폐허가 된 공장에 있다가 사측이 고용한 용역 업체 직원들과 부딪히고, 인디 뮤지션과 노동자가 연대해 열린 공연에서 어깨를 들썩인다. 이들이 세계 곳곳의 음악, 악기 관련 행사를 찾아가 상황을 알리는 동안, 카메라는 행인들에게 묻는다.

"기타만 좋으면 상관 없나요? 열악한 노동 환경에서 생산되었다고 해도 지갑을 여시겠습니까?" 순간 머뭇거리는 표정, "글쎄요, 가격이 싸다면 사겠죠" 라는 대답에서 초국적 자본주의 체제의 소비자들 중 누구도 자유롭지 않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기타 소리는 노동자이자 소비자인 우리 모두의 자기 분열을 볼모로 울려 퍼지고 있는 것이다. 기타뿐이랴, 오늘날 거의 모든 소비재들은 자신의 출처를 감춘다. 싼 가격에는 대가가 있고, 누구도 그 부메랑의 고리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꿈의 공장>은 이런 아이러니를 직시함으로써 관객 각자의 처지를 투쟁의 현장으로 만들어 버린다. 성실한 태도로 딜레마를 쉽게 외면하지 못하게 한다. 노동조합이 없다는 이유로 사측에서 대전 콜텍 공장을 '꿈의 공장'이라고 불렀을 때 그 꿈은 누구의 꿈이었을까.

'신들의 땅, 앙코르'
희망과 절망은 끝내 교차한다. 일본과 미국의 뮤지션들이 합세하면서 노동자들의 투쟁이 공감대를 넓혀가고, 고등법원은 부당해고 판결을 내린다. 하지만 우리의 일상은 윤리적 가치가 거세된 상품으로 가득차 있고, 판결은 3년이 지나도록 이행될 기미가 없다.

사라진 제국을 되살리다, <신들의 땅, 앙코르>

"이곳은 신의 판타지였습니다. 천장에는 연꽃 무늬가 가득했고, 신들의 이야기가 벽을 채웠습니다."

내레이터의 설명이 끝나자 낡은 회색 건물에 화려한 색과 문양이 입혀진다. 풍화된 세월을 겅중겅중 돌이킨다. 여기는 12세기 앙코르, 크메르 제국의 절정기다.

EBS에서 제작한 국내 최초 3D다큐멘터리 <신들의 땅, 앙코르>는 앙코르 유적과 문화를 복원한 디지털 영상으로 눈을 사로잡는다. 3D 기술은 입체적이고 과학적인 당시 건축을 정확하게 설명하는 데 쓰였다.

건물과 벽이 층층이 겹쳐 있고 해자로 둘러싸인 앙코르 사원의 풍경은 3D로 볼 때 경건하고 과시적인 위용, 거기에 투영된 황제의 야망과 시대상을 더 분명히 드러낸다. 보는 즐거움과 앎의 즐거움이 완벽하게 일치한다.

유적에서 추출한 크메르 제국의 흥망성쇠는 드라마틱하다. 사원 벽면에 부조로 남아 있는 황제의 대관식, 해상 전투 등이 대규모 장면으로 재현된다. 하늘에서 내려다 본 군중, 전투 도중 어지럽게 오가는 화살 등이 생생하다.

<신들의 땅, 앙코르>는 3D 기술이 눈요기를 넘어 역사적 사실을 전달하는 데 얼마나 유용하게 적용될 수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다.

한국 사회의 기원을 찾아서, <청계천 메들리>

식민지, 전쟁 경험이 그림자를 드리운 한국의 근현대는 기원부터 불온하다. 할아버지의 상처는 아버지의 야욕이 되었고, 아버지의 야욕은 아들들을 강박에 몰아 넣었다.

박경근 감독은 오래 전부터 반복해 꾸던 악몽의 기원을 찾아 할아버지의 역사를 더듬는다. 끊임없이 과거가 지워지고 공허한 미래만 맴도는 이 도시에 과연 세대를 넘어 지속되고 있는 역사적 장소가 있을까. 감독은 할아버지가 철공소를 운영했던 청계천으로 향한다.

<청계천 메들리>는 재개발 되기 직전 청계천을 배경으로 한국 사회의 기원을 탐색한 작품이다. 감독의 사적인 사연과 청계천의 기억, 공적 역사를 가로지르는 시점이 독특하다.

현실이란 기록이나 사실만으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욕망, 암암리에 유지되는 관습, 구조가 강요하는 질서 등이 뒤엉킨 상태임을 전제하고 있다.

영화의 출발점은 일제 강점기, 일본에서 고철 공장을 하다가 한국으로 건너와 일본인이 버리고 간 철공소를 맡게 된 할아버지의 이야기다. 침략 당하면서 시작된 한국 근대의 트라우마는 감독에게 "전쟁에 나가려고 칼을 갈고 또 가는" 악몽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그 쇠가 가족을 먹여 살렸다. 국가적 피해 의식은 야욕으로 대체되었고, 급속한 경제 성장으로 이어졌다.

그 흔적이 고스란히 쌓인 지층 같은 청계천을 <청계천 메들리>는 양가적인 심정으로 바라본다. 그곳에는 노동을 하는 와중에 소주 한 잔에 개불을 날것으로 먹는 전근대적 습성과 경제 성장기에 앞만 보고 달려온 것에 자부심을 갖는 기술자들, 규칙적인 기계의 움직임과 소리 등 근대를 매혹했던 기계 미학, 그리고 과거를 파괴하고 기상천외한 미래를 심으려는 포스트모던 자본의 이해가 공존한다. 때론 매혹적이고 때론 역겨우며, 때론 뜨겁고 때론 차갑다.

이것이 바로 한국 사회의 현재다. 일직선의 성장 신화에는 혼돈과 분열이 내포되어 있다. 하지만 의심을 품는 순간 포클레인이 땅을 갈아 엎고 있다. 성찰의 속도는 욕망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한다.

영화의 마지막, 마침내 청계천은 철거되고 사람들은 정부가 마련한 새로운 터전인 가든파이브로 옮겨 간다. 속사정에 대해서는 나오지 않는다. 다만, 일련의 의례들만 포착된다. 하염 없이 텅 빈 이 21세기의 개척지에서 사람들은 소금을 뿌리고 고사를 지낸다. 돼지 머리에 지폐를 꽂고 절을 올린다. 시대의 착종이 아득하다.



박우진 기자 panorama@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