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9일 서울 서초동 대법원에서 최은배 인천지법부장판사의 FTA관련 페이스북 발언과 관련한 윤리위원회가 열린 가운데 정문 현관위에는 '자유, 평등, 정의'란 글자가 새겨져 있다. 조영호기자
페이스북은 사적 영역인가?

판사에게도 표현의 자유가 있을까?

한ㆍ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안이 국회에서 통과되자 정치권 못지 않게 사법부에서도 시끄럽다. 최은배 인천지방법원 부장판사가 페이스북에 쓴 FTA 반대 글을 쓰자 법조계와 학계에선 찬반 양론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다.

최은배 판사가 쓴 페이스북 글은 진보와 보수 세력의 갈등으로 확대됐다. 대법원 공직자윤리위원회가 윤리강령을 어겼는지 조사하자, 우리법연구회 소속 판사들은 징계를 반대한다는 의사를 밝혔다. 이런 가운데 최은배 판사가 회장으로 있는 우리법연구회에 대한 관심도 급증했다.

우리법연구회는 88년 제2차 사법 파동 당시 사법부 독립과 자성을 촉구했던 판사들을 중심으로 결성됐다. 초대 회장이었던 박시환 전 대법관은 제3차 사법 파동이 벌어졌던 93년엔 강금실 전 법무장관과 함께 서울지법 평판사회의를 주도했다. 우리법연구회는 사법부 개혁과 인권 문제에 관심을 갖고 연구해 사법부 개혁 세력의 버팀목 노릇을 해왔다는 평가를 받는다.

양승태 대법원장
노무현 전 대통령이 집권한 뒤 우리법연구회 출신 법관은 요직에 중용됐다. 박시환 초대 회장은 2005년 대법관에 임명됐고, 강금실 전 법무장관과 박범계 전 청와대 법무비서관도 노 전 대통령에 의해 발탁됐다. 우리법연구회는 법원에 공식으로 등록된 학술 단체로 헌법과 형법, 노동법을 주로 연구해왔다.

한나라당은 지난해 1월 몇몇 재판의 배후에 진보 판사의 모임인 우리법연구회가 있다며 해체를 요구했다. 당시 안상수 원내대표는 우리법연구회를 이념 지향적인 정치 성향을 가진 단체로 규정하고 우리법연구회 해체가 사법 개혁의 핵심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한나라당 등 보수권이 좌편향이라고 공격한 민노당 강기갑 대표 사건과 MBC PD수첩 사건을 맡았던 판사는 우리법연구회 소속이 아니었다.

우리법연구회 회장 출신인 박상훈 변호사는 당시 "논란이 된 무죄 판결은 모두 우리법연구회와 무관한 판사들이 선고했다"면서 "각 판결을 논리적으로 비판할 자신이 없으니까 색깔론을 동원해 마녀사냥을 하고 있다"고 반박했다. 보수 세력이 사법부 좌경화를 주장하며 색깔론을 펼쳤지만 우리법연구회는 세종시 문제로 수세에 몰리자 색깔론을 들고 나왔다며 반발했다.

우리법연구회 최은배 회장은 FTA 비준안이 통과된 지난달 22일 페이스북에 "뼛속까지 친미(親美)인 대통령과 통상 관료들이 서민과 나라 살림을 팔아먹은 2011년 11월 22일, 난 이날을 잊지 않겠다"란 글을 올렸다. 정치권이 활용하는 트위터와 달리 페이스북은 사적 영역이란 측면이 강한 쇼셜네트워크서비스(SNS). 그러나 몇몇 언론에 보도되면서 최 회장이 남긴 페이스북 글은 사회 문제가 됐다.

민주 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과 우리법연구회 등은 "페이스북 등 SNS는 친구나 회원만 공유하는 사적 공간이다"고 주장했다. 법관이란 이유로 사적 영역에서조차 표현의 자유를 제한해선 안 된다는 논리. 그러나 대법원 관계자는 "SNS는 쉽게 전파되고 공개되기 때문에 사적인 공간으로만 볼 순 없다"고 밝혔다.

대법원 윤리위가 SNS를 신중하게 사용하라고 권고하자 반발하는 판사들이 급속도로 늘고 있다. 서울북부지법 서기호 판사는 법원 내부망인 코트넷에 "판사도 인간으로 직무와 무관한 사적 영역에서는 표현의 자유를 최대한 누릴 권리가 있다"면서 "대법원 권고는 페이스북 내 표현의 자유를 위축시킬 우려가 있다"고 반발했다. 서 판사는 우리법연구회 회원이 아니다.

페이스북에 한미 FTA를 비판하는 법관의 글이 잇따르는 가운데 한미 FTA가 불평등 조약이라는 주장까지 나왔다. 인천지법 김하늘 부장판사는 1일 코트넷에 "국민적 논란이 되고 있는 한미 FTA와 ISD(투자자-국가간 제소제도) 조항에 대해 법률의 최종적 해석 권한을 갖고 있는 사법부가 어떤 가이드 라인을 제시해줘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재판권을 제3의 중재 기관에 맡긴다는데 법원이 가만히 있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는 뜻이다.

페이스북에 오른 글 하나가 사법부 전체에 태풍을 몰고 온 셈이다.

페이스북 논란 일지

"뼛속까지 친미인 대통령과 통상 관료들이 서민과 나라 실림을 팔아먹은 2011년 11월 22일, 이날을 잊지 않겠다."(최은배 판사ㆍ11월 22일 페이스북)

, 최 판사를 윤리위 회부 "법관은 모든 언동과 처신에서 늘 자제하고 성찰해야 한다."(11월 25일)

"최 부장께 납득할 수 없는 징계 등 불이익을 줄 처분이 내려진다면 더 이상 침묵하지 않겠다."(송승용 판사ㆍ11월 26일 법원 내부 게시판)

대법원 윤리위 권고 "판사는 사회적 논란의 중심에 놓이거나 공정한 재판에 우려를 낳지 않도록 신중히 처신하라."(11월 29일)

대법원 권고에 반대 "판사도 인간으로 직무와 무관한 사적 영역에서는 표현의 자유를 누릴 권리가 있다."(서기호 판사ㆍ11월 30일)



이상준기자 ju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