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권 인사들이 지난달 13일 오후 서울 마포구 서울가든호텔에서 민주진보통합정당 출범을 위한 연석회의 준비모임을 가졌다. 왼쪽부터 김두관 혁신과통합 상임대표, 손학규 민주당 대표, 박원순 서울시장, 문재인 혁신과통합 상임대표, 이해찬 혁신과통합 상임대표,정동영 최고.위원.
무협지를 보다 보면 자주 등장하는 이야기가 '무림의 숨은 고수'에 관한 것이다. 장안에서 소문난 제일 검객을 초야에 묻혀 있던 실력자가 나서 꺾는다는 내용이다. 숨은 실력자의 등장에 사람들은 환호하고 그를 응원한다. 그간 군림하던 기존의 검객을 꺾고 누르는 장면에서는 카타르시스마저 느낀다.

우리 정치판에도 이 같은 숨은 고수가 있을까. 현재의 정치판을 살펴보자.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연구원장이 박근혜 한나라당 전 대표를 상대로 최근 각종 여론조사에서 우위를 보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누가 봐도 여권은 박 전 대표, 범야권에서는 내부 경선이나 후보 단일화 방식 등을 거쳐 안 원장이 대선 후보로 나설 것이 유력할 것으로 관측된다.

여권은 박 전 대표 외의 다른 주자를 생각하기가 쉽지 않다. 여권의 내부 구조상 한나라당 최대 주주인 박 전 대표를 넘어설 후보가 마땅치 않다. 정몽준 전 대표와 김문수 경기지사, 아니면 장외의 오세훈 전 서울시장이나 당 밖의 이회창 전 자유선진당 대표 정도인데 지지율이나 정치적 무게감이나 어느 모로 봐도 박 전 대표가 사실상의 단수 후보라는 점을 부인하기 어렵다.

야권은 통합 야당이 만들어지면 손학규 민주당 대표와 문재인 노무현재단 이사장, 정동영ㆍ정세균 의원과 등이 유력 주자군에 속한다. 이들이 준준결승을 거쳐 승자가 안철수 원장과의 준결승을 한 뒤 최종 승자가 결승에서 박 전 대표와 맞붙게 될 것이란 게 현재로서는 가장 가능성 높은 시나리오다.

김두관 경남지사
그렇다면 내년 12월 대선이 단순히 이런 구도를 통해 '박근혜 대 안철수'의 여야 양자 대결 구도로 짜여질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정치만큼 '살아있는 생물'도 없다. 대선이 1년도 넘은 상황인 점을 감안하면 무수한 변수가 남아있다는 것이다.

安중도 포기 가능성 있나

여권은 그렇다 쳐도 야권은 아직 안개 속이라고 봐야 한다. 먼저 안 원장의 대선 완주 여부가 불투명하다. 안 원장이 끝까지 권력에 대한 의지가 있다면 범야권 후보로 옹립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을 수 있다. 제3 세력에 대한 국민적 갈망도를 감안하면 그렇다.

하지만 안 원장이 스스로 출마 카드를 접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장외 인사에게는 실제 역량보다 후한 점수를 주는 게 보통이다. 정치권이나 언론계도 그렇고, 네티즌들을 비롯한 시민들 사이에서도 제3의 인물에 대해서는 비판할 점이 있더라도 굳이 칼을 대지 않는 게 일반적이다. 더구나 안 원장처럼 재산을 기부하고, 컴퓨터 바이러스 백신을 무상으로 전 국민에게 나눠주는 '산타클로스'를 굳이 비판해야 할 이유도 없다.

하지만 링 위에 올라서는 순간부터 그를 보는 모든 시선은 180도 달라진다. 지금처럼 호의적인 분위기는 사라지고 냉엄한 검증의 잣대가 그에게 적용된다. 우리나라를 이끌어야 갈 지도자 감인지 아닌지에 대한 사회적 검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 때부터 안 원장에 대한 융단폭격이 가해진다. 적들에 의한 공격을 포함, 중간 지대에 있는 지지층조차 그에게 궁금한 점을 물어볼 수밖에 없다.

가령 한미자유무역협정(FTA)에 대한 견해를 묻는다 치자. 안 원장이 찬성이라고 밝히면 진보진영의 절반 지지층이 날아가고, 반대라고 하면 보수진영의 절반이 등을 돌린다. 원칙적인 찬성이지만 투자자ㆍ국가소송제도(ISD) 등 독소조항 철폐가 우선이라고 두루뭉실하게 넘어가려다간 자칫 양쪽 모두에게 배척당할 수 있다.

대북관도 그렇다. 연평도 포격사건과 북한 인권 문제 등 복잡한 북한 문제를 놓고 어떤 스탠스를 취하느냐도 안 원장에게는 고민거리가 된다.

좌우 양측의 공격을 딛고 일어선다면 당연히 차기 대선에 가장 가깝게 다가 설 수 있지만, 반대의 경우에는 한 순간에 스러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역대 대선에서도 '반짝 인기'를 타고 지지율 1위에 올랐으나 끝내 본선에 출마하지도 못하거나, 출마했다가 의미 없는 득표율을 기록한 경우가 적지 않다.

14대 대선 때 정주영 전 현대그룹 회장이 그랬고, 15대 대선에서는 박찬종 의원이 한때 선두로 나섰다가 낙마한 이후 이인제 의원이 출마했지만 3위에 그쳤다.

16대 대선에서는 정몽준 전 한나라당 대표가 지지율 1위에 올랐다가 노무현 후보에 단일 후보 자리를 내줬고, 17대 대선에서는 고건 전 총리가 지지율 1위를 지키지 못하고 불출마를 선언했다. 때문에 안 원장이 이들과 같은 길을 걷게 될지 모른다는 관측도 적지 않다.

김두관 등장 가능성은…

만일 안 원장이 출마 카드를 접을 경우, 야권 주자는 누구냐에 관심이 쏠린다. 지금 상황에서는 손학규 대표와 문재인 이사장이 각각 통합 정당에 대한 상당 지분을 확보하고 있어서 가장 유리한 편이다.

그러나 막상 대선레이스에 들어가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우리 정치지형상 통합 정당(민주당과 혁신과통합 측 합당)은 호남이 대주주 격이다. 여기서 한나라당 후보를 꺾을 만한 후보감을 누구로 보느냐에 따라 야권 레이스의 추세가 확확 달라진다.

지역, 이념, 노선, 종교 등 대선 주자의 덕목 중에서 득표력과 가장 직결되는 것은 바로 출신 지역 문제다. 상대적으로 유권자가 많은 영남지역에서 표를 많이 가져올 수 있는 후보가 호남의 몰표를 받아야 승리할 수 있다는 건 야권의 오랜 논리다.

2002년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도 1위를 달리던 이인제 후보를 3위 권에 맴돌던 부산ㆍ경남(PK) 지역 출신 노무현 후보가 광주 경선에서 따돌리면서 완전히 승기를 잡은 것과 같은 맥락이다.

손 대표는 경기 출신이라 영남에서의 호소력은 그리 크지 않다. 호남 출신인 정동영, 정세균 의원은 말할 것도 없다. 문 이사장은 PK출신이고 중도적 이미지를 갖고 있지만 본인의 권력을 향한 의지가 어느 수준인지를 가늠키 어렵다. 그렇다면 이런 공식에 가장 가까운 인사가 란 결론에 도달한다.

김 지사의 경우 경남 남해 출신으로 현 도지사란 점에서 PK지역의 상당 지분을 갖고 있다고 봐야 한다. 1959년 생으로 내년 대선에서는 53세가 되기 때문에 세대교체라는 명분에도 어울린다. 또 노무현 전 대통령과 호흡을 같이 한 열린우리당 출신이란 점에서 야권 통합에도 적합하고, 군수와 행자부 장관, 대통령 정무특보에서 현재의 지사 경력까지 갖고 있어 행정 능력도 이미 검증 받은 셈이다.

야권 지지층에서 안 원장을 대신해 눈독을 들일 만한 요소를 고루 갖추고 있는 것이다.

드라마틱한 히스토리

또 하나 여당에서 걱정하는 것은 김 지사의 경력이 매우 이채롭다는 데 있다. 29세에 남해 고현면 이어리 이장을 지낸 뒤 1,2대 남해군수를 거쳐 지금의 자리까지 왔다. 상품성으로만 보면 '마을 이장에서 대통령까지'라는 서민적 슬로건이 어울린다. 여당은 박 전 대표의 삶 자체가 드라마틱하다는 점에서 동정표를 포함한 지지세가 견고하다고 믿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김 지사도 국민적 감동을 이끌어낼 만한 자신만의 정치 스토리를 보유하고 있다.

안 원장의 등장에 깜짝 놀라 우왕좌왕하고 있는 한나라당 입장에서는 '숨은 고수'로 평가 받을 만한 김 지사에 대해서도 단단히 대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논리가 나오는 이유다.

지난해 6월 경남지사에 당선된 이후 김 지사는 좀체 중앙 정치무대에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올 가을 안풍(安風ㆍ안철수 바람)이 본격 불어 닥친 이후 서서히 기지개를 펴고 있다. 서울과 경남을 자주 오가며 지방 행정가에서 다시 중앙 정치인으로서의 이미지 각인에 노력하는 모습이다.

김 지사는 11월14일 민주당과 혁신과통합 등 야권 통합세력의 주요 인사 연석회의에 참석해 야권통합에 일조한다는 이미지를 풍겼다. 이어 16일에는 박원순 서울시장을 만나 정책 협력 방안에 대해 의견을 같이했다. 이날 두 사람은 양손을 맞잡고 친밀감을 과시했다.

김 지사는 12월1일 도청에서 열린 직원조회에서 이례적으로 성현들의 말을 인용하며 의미 있는 메시지를 던졌다.

김 지사는 "나를 어루만지면 임금이지만 나를 학대하면 임금이 아니라 원수"라고 말했다. 율곡 이이 선생의 말을 인용해 백성의 입장에서 임금을 평가한다는 내용을 전한 것이다. 그는 또 맹자의 말을 인용, "민(民)이 가장 귀하고 사직이 다음이요, 군주는 가장 가벼운 존재"(民位貴社稷次之君爲輕ㆍ민위귀사직차지군위경)라고 말했다.

임금과 군주를 거듭 언급했다는 점에서 김 지사가 본격적으로 대선 등 중앙 정치의 시작을 염두에 둔 것이란 해석이 나왔다.

일각에서는 김 지사가 대선 과정에서 호남 세력의 대주주인 정동영ㆍ정세균 의원에 대한 총리나 여당 대표 카드를 제시하면서 사실상의 러닝메이트로 뛰어들면 폭발력이 배가할 수 있다는 분석도 내놓는다. 하지만 아직 나이가 50대 초반이란 점에서 일단 지사 임기를 끝내 놓고 20대 총선(2016년) 등을 거쳐 차차기 대선(2017년)에 도전하는 것이 순리라는 의견도 있다.

김 지사에 대한 이 같은 '무림의 숨은 고수'이야기는 아직 가정에 가정을 더한 정치적 상상력에 의한 것이다. 하지만 안 원장의 거취가 불출마 쪽으로 결정되거나 또는 준결승에서 확실히 그를 제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된다면 이 같은 소설이 현실화할 개연성은 충분하다. 물론 여기에는 박 전 대표의 지지율이 현재처럼 답보 상태를 거듭해야 한다는 전제도 있어야 한다.

이렇듯 넘어야 할 산이 하나 둘이 아니지만 여권에서 안 원장이 퇴장한다면 그 이후 가장 겁이 나는 주자가 김 지사라는 점에는 모두가 고개를 끄덕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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