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운동 큰별 김근태 별세고문자 용서했지만 후유증 극복 못해

고문 후유증이 민주화 운동 대부의 목숨을 앗아갔다.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이 30일 오전 5시 31분 향년 64세로 일기로 별세했다. 파킨슨병을 앓아온 김 고문은 지난달 29일 뇌정맥혈전증으로 서울대에 입원한 뒤 2차 합병증이 겹치면서 패혈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중학교 3학년 때 5ㆍ16 쿠데타를 목격한 김근태는 경기고를 거쳐 1965년 서울대 경제학과에 입학했다. 부정선거 파동이 일어났던 71년 서울대 내란음모사건으로 수배를 받았고,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과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활동을 통해 수배와 투옥을 되풀이했다.

그토록 바라던 박정희 정권이 무너지자 전두환 정권이 들어섰다. 군부 독재에 맞서 싸웠던 김근태는 1985년 고문 기술자 이근안을 만났다. 이때 받은 혹독한 고문 후유증으로 한여름에도 추위를 느껴 에어컨조차 틀지 못했고, 해마다 초가을만 되면 한달 이상 몸살을 앓았다. 치과에선 고문대에 묶였던 기억 때문에 치료를 포기했다.

85년 9월 4일 새벽. 민청련 의장 김근태는 서울 서부경찰서 유치장에서 풀려남과 동시에 남영동 대공분실로 납치를 당했다. 공산주의자, 폭력혁명주의자라고 자백하라는 강요와 함께 발가벗겨진 채 혁대로 꽁꽁 묶여 고문용 칠성판 위에 올랐다. 김근태가 거짓 자백을 거부하자 무자비한 전기고문과 물고문이 가해졌다.

김근태는 당시 상황을 자서전 <남영동>에 이렇게 설명했다.

“고문을 할 때는 온몸을 발가벗기고 눈을 가렸습니다. 그 다음에 뉘면서 몸을 다섯 군데를 묶었습니다. 머리와 가슴, 사타구니에는 전기 고문이 잘 되게 하기 위해 물을 뿌리고, 발에는 전원을 연결시켰습니다. 처음엔 약하고 짧게, 점차 강하고 길게, 강약을 번갈아 가면서 전기 고문이 진행되는 동안 죽음의 그림자가 코 앞에 다가왔습니다. 이 때 마음속으로 ‘무릎을 꿇고 사느니보다 서서 죽기를 원한다’는 노래를 뇌까리면서 과연 이것을 지켜내기 위한 인간적인 결단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절감했습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 속에서 김근태는 삼천포에서 배를 타고 월북했고, 간첩으로 넘어온 형들과 만났다고 진술할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고문 사실을 폭로하겠다고 결심한 김근태는 고문 내용과 시간, 고문하는 사람의 이름과 별명, 외모를 머릿속에 새겼다. 김근태는 85년 12월 김 전무로 불렸던 고문기술자 이근안 등 8명을 고발했다. ‘세계의 양심수’로 불렸던 김근태는 1987년 로버트 케네디 국제 인권상을 받았지만 그를 고문으로 내몰았던 국가보안법은 24년이 지난 지금까지 존재하고 있다.

95년 민주당 부총재로 정계에 입문한 김근태는 96년부터 국회의원으로 활동했다. 서울 도봉갑에서 내리 세 번 당선된 그는 재야 출신 정치세력의 좌장으로 1998년 국민의 정부 탄생에 힘을 보탰다. 2002년 민주당 대통령후보 경선에 나섰던 김근태 고문은 불법정치자금에 대한 양심고백을 한 뒤 중도 하차했다. 당시 “아름다운 꼴찌를 기억해달라”던 그의 외침은 아직까지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주도한 열린우리당 창당에 참여했지만 그는 부동산 원가 공개에 반대한 대통령에게 “계급장 떼고 토론해보자”고 맞섰다. 보건복지부장관으로서 영리병원에 반대해 청와대와 갈등을 빚었다. 한ㆍ미 자유무역협정(FTA) 추진 과정에서도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했다. 미국 월가 시위가 한창이었던 10월 18일엔 블로그에 ‘2012년을 점령하라라’는 글을 남겼다.

“무엇보다 1%를 향한 99%의 분노 때문이다. 사회적 불평등과 정의롭지 못함이 극에 달했기 때문이다.…(중략)…2008년의 금융위기로 신자유주의를 지탱하는 보이지 않는 손인 월가의 실체가 드러났음에도 희생도, 반성도, 징벌도 없는 불공평함에 분노한 것이다.…(중략)…우리는 미국보다 사정이 낫다. 미국보다 금융이 정치에 비해 권력이 강하지 않은 우리나라에서 굳이 증권사가 많은 동여의도를 점령할 필요는 없다. 국회가 있는 서여의도, 청와대가 있는 종로를 점령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총선에 출마할 예정이었던 김 고문은 끝내 고문 후유증을 이기지 못했다. 애지중지하던 딸의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할 만큼 고통이 심했다. 자신을 고문한 이근안씨를 용서했지만 그가 남긴 후유증은 목숨을 앗아갔다.

별세 소식이 전해지자 각계각층에서 많은 인사가 조문했다. 이해찬, 한명숙 전 총리와 민주통합당 정동영, 정세균, 박선숙 의원, 장영달, 신계륜, 이계안 전 의원을 비롯해 통합진보당 권영길 의원과 노회찬 대변인, 한나라당 안명옥 전 의원 등이 빈소를 찾아 유족을 위로하며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정동영 의원은 “우리 시대 민주주의는 김근태 의장에게 빚지고 있다”는 말로 고인의 죽음을 안타까워했고, 이인영 전 최고위원은 “김근태라는 깃발은 내려졌지만 그의 이름을 민주주의 역사의 심장에 새긴다”고 말했다. 이 전 최고위원은 전날 부산에서 열린 민주통합당 지도부 경선을 위한 합동연설회를 포기하고 서울로 올라와 김 고문의 임종을 지켜봤다.

한나라당 이재오 의원은 트위터에 “김근태 선생을 잡기 위해 아무런 일도 할 수 없었던 내가 참담했다”는 글을 남겼고, 남경필 의원은 “의장이 남긴 용기와 헌신, 화합과 용서의 큰 가르침은 우리 정치를 크게 일깨웠다”고 밝혔다. 원희룡 의원은 “대한민국은 김근태 의장에게 민주주의의 빚을 지고 있다”고 했다.



이상준기자 ju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