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으론 자유를 외쳤지만 총칼을 앞세워 협박했다.

아편전쟁(1840~1842년)과 동인도회사는 영국 제국주의가 앞세운 함포에 의한 불평등 자유무역을 상징한다. 무력을 앞세운 영국엔 자유무역이었지만 아편으로부터 국가와 국민을 보호하려던 청엔 불평등 무역일 수밖에 없었다.

영국은 1841년 1월 26일 무역항 광저우(廣州)에서 약 140㎞ 떨어진 섬 홍콩(香港)을 점령했다. 아편전쟁 당시 영국을 변호했던 독일 경제학자 카를 마르크스(1818~1883년)조차 "영국이 관리 한 명의 병든 자존심을 위해 만행을 서슴지 않았다. 그 평화로운 땅에 불과 칼, 황폐와 죽음을 가져왔다"고 비난했다.

산업혁명을 일으킨 영국은 방직공장에서 생산한 면직물로 우뚝 섰다. 그러나 비단을 생산하는 청과의 무역에선 산업혁명의 산물조차 무용지물이었다. 게다가 영국에 차를 마시는 유행이 생기자 영국이 갖고 있던 엄청난 량의 은(銀)은 청으로 흘러갔다. 영국 동인도회사는 인도산 아편과 목화를 청에 수출함으로써 무역수지 적자를 메웠다.

아편 중독자가 급증하자 청은 아편금지령을 시행했다. 황제 도광제의 명령을 받은 임칙서(1785~1850년)는 영국 상인에게 '영원히 아편을 들여오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요구했고, 엄청난 양의 아편을 압수해 불에 태우고 바다에 쏟아버렸다. 아편 수출이 막히자 영국 식민지 인도 경제가 흔들렸다. 게다가 세계 곳곳에서 벌인 수출입에서 결제할 은이 부족했다.

임칙서가 1839년 5월 마카오에 있던 영국인을 홍콩으로 추방하자 영국 상공업계는 청에 대한 강경책을 정부에 요청했다. 영국 외상 팔머스톤 등 왕당파 휘그당은 "중국이 아편으로 은이 유출된다며 아편무역을 금지했다. 그러나 아편은 술보다 덜 해롭고 아편 몰수는 영국의 재산권 침해다"고 주장했다. 토리당이 "역사상 가장 더러운 전쟁이다"며 반발했지만 결국 전쟁 동의안은 의회에서 통과됐다.

홍콩은 1842년 아편전쟁이 끝나자 난징 조약에 따라 영국에 할양됐고, 영국에 뺏긴 지 155년 만인 1997년에 중국에 반환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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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준기자 ju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