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오 안상수
여당이 완전히 새옷으로 갈아입었다. 근 15년간 유지해온 한나라당의 당명을 새누리당으로 바꾸면서 명실상부한 '박근혜 당'으로 거듭났다.

지난해 말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 체제가 출범하면서 친이계가 배제된 친박 중심의 새로운 여당 출현은 이미 예고됐었다. 비대위원들이 박 위원장과 직간접적으로 뜻이 통하는 인사들로 채워지면서부터다. 김종인 비대위원은 장외에서 이명박 대통령 '깎아 내리기'에 목소리를 높인 인사이고, 이상돈 비대위원은 4대강 사업을 앞장서 비판한 데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 문제에 대해서도 반대 입장을 피력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이에 따라 김 위원 등이 주도한 각종 정책 설정 과정은 철저하게 현정부의 색깔을 빼는데 초점이 맞춰졌다. 개정된 정강 정책에서도 성장보다는 복지에 중점을 둔 분배 쪽에 무게를 뒀고, 대북 문제도 인도주의적 지원과 교류 확대로 방향을 틀었다. 특히 경제 민주화를 앞세워 재벌개혁을 의미하는 출자총액제한제의 보완도 시사했다.

이들 비대위원은 중간중간 이 대통령의 자진 탈당과 이재오 의원 및 안상수 전 대표 등 친이계 핵심 인사들의 물갈이 필요성을 공공연히 내세웠다. 또 법무장관 출신(박희태 국회의장)이나 약사회장 출신(원희목 의원) 등 특정 분야의 공천 배제를 예로 들었다. 묘하게도 모두 친이계가 속한 곳만 해당 되는 언급이었다.

나아가 지난해 10월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패배한 나경원 전 의원의 출마 시사 방침에도 김 위원과 이 위원이 잇달아 공개적으로 반대 입장을 밝혔다. 당내 일각에서는 "공천심사 자격도 없는 비대위원들이 누구는 되고 누구는 안 된다는 식의 물갈이 언급을 하느냐"는 불만이 터져 나왔다. 당연히 친이계 사이에서 이 같은 주장이 많았다.

홍준표
친이계 퇴출의 그림자는 이달 초 공직자후보추천위원들이 확정되면서 더욱 짙게 드리워졌다.

박 위원장 모친인 육영수 여사의 배화여고 후배인 진영아 패트롤맘 회장이 곡절 끝에 자진 사퇴했지만 10명의 공천위원 중 다수가 박 위원장과 적잖은 인연이 있다. 특히 당내 몫인 3명의 공천위원은 범 친박계 의원들이다.

이애주 의원은 당초 친이계로 분류돼 왔지만 박 위원장의 의중을 의원들에게 가장 효과적으로 전달한다는 평을 듣는 황우여 원내대표와 지역(인천)적으로 가까운 데다, 결정적으로 육영수 여사가 1974년 8월 총탄을 맞고 병원에 후송됐을 당시 담당 수간호사로 육 여사의 최후를 지켜봤다는 인연이 있다. 이 의원은 "육 여사가 입고 있던 한복 속치마가 여러 번 꿰맨 것이어서 눈물을 흘렸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당연직으로 공천위원에 들어간 권영세 사무총장도 친박 성향이고 19대 총선 불출마를 선언한 현기환 의원도 대표적인 친박계다. 총선 불출마 의사를 밝힌 의원 중에 김형오 전 국회의장과 홍정욱 의원 등이 포함될 것이란 전망이 돌았지만 역시 박 위원장의 영향력이 강하게 미치는 친박계가 아니란 점에서 제외됐다.

정홍원 공천위원장은 박 위원장의 법조계 원로조언그룹에서 추천됐다. 또 정종섭 공천위 부위원장은 친박계 핵심 유승민 의원과 경북고 동기동창이자 서울대 동문이다. 정 부위원장은 권영세 총장과도 서울대 법대 동기이며 비대위 좌장 격인 김종인 위원과도 자주 의견을 나누는 사이다.

3일 오전 여의도 새누리당(옛 한나라당) 당사에서 당관계자들이 '19대 국회의원선거 지역구 후보자 추천신청 공고문'을 당사 로비에 붙이고 있다.
숙명여대 총장인 한영실 공천위원은 친박계 유정복 의원과 가깝고 서병문 중소기업중앙회 수석부회장은 친박계의 추천으로 합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때문에 당내에서는 "박근혜 1인 공천 시스템아니냐"는 볼멘 소리가 나오고 있다. 뒤집어 말하면 박 위원장이 공천에 전권을 휘두를 수 있는 여건이 완벽하게 충족됐다는 얘기다.

정강정책을 바꾼 지난달 30일 박 위원장은 "오늘이야말로 당의 실질적인 내용이 바뀌고 근본적으로 변화하는 날"이라고 말했다. 이틀 후인 이달 1일 박 위원장은 공천위원들에게 임명장을 주면서 "용(龍) 그림을 그린다고 할 때 쇄신 작업을 용이라고 하면 공천 작업은 마지막 눈을 그려 넣는 화룡점정(畵龍點睛)"이라고 말했다. 사람까지 바꿔 새로운 당으로 태어나겠다는 의지를 천명한 것이다.

이어 박 위원장의 60회 생일인 2월2일. 한나라당의 간판이 내려지고 새누리당의 당명이 선포됐다. 친박계 사이에서는 "박 비대위원장이 태어난 날, 당도 '박근혜 새 누리(세상)'로 다시 태어났다"며 "이제 공천을 통해 물갈이만 하면 된다"는 호언이 이어졌다.

박 위원장 중심의 신당 출현이자, 'AB MB'(Anything But MBㆍ이명박만 아니면 된다)의 또다른 출발선이 여권 내부에서 그어진 셈이다.

살생부 나돌아 위기감 급등

새누리당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이 27일 오후 국회 본관에서 열린 '국민희망찾기 시리즈- 1탄 보육, 교육편, 우리 아이 꿈 그리고 미래' 정책간담회 방청석에 앉아 토의내용을 지켜보고 있다.
3일 오전 새누리당이 발칵 뒤집어졌다. 사무처가 19대 총선 공천 작업을 위한 기초 자료로 18대 국회 회기 동안 여러 이유로 논란에 올랐던 당 소속 의원 39명의 명단을 정리한 것이 확인됐기 때문이다. 물론 당 관계자는 "이 문건은 공천을 위한 기초 자료로 작성된 것이고 새로운 문제를 발굴한 게 아니라 재판을 받은 의원이나 언론에서 논란이 됐던 의원 명단을 수집해놓은 것"이라면서 "살생부와는 전혀 성격이 다르다"고 설명했다.

이 관계자는 "사무처가 무슨 권한으로 살생부를 작성했겠느냐"고 반문한 뒤 "문건의 제목도 '당 소속 국회의원 특이사항'으로 돼 있다"고 적극 해명에 나섰다.

그러나 당내 반응은 달랐다. 지난 4년간 이런저런 물의를 일으켰던 의원들의 명단을 압축해 나열했으니 누가 봐도 '공천 살생부'라는 말을 듣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다.

현재 박 위원장이 갖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 이 문건에는 불법 후원금 수수 혐의로 재판 중인 장광근 의원 외에 배우자가 구민에게 금품을 제공한 혐의로 벌금 500만원을 받아 현 지역구인 서울 강동갑에 출마할 수 없는 김충환 의원, 지방선거 때 돈 공천을 한 혐의로 배우자가 실형을 받은 윤영 의원 등 재판이 종결된 13명의 의원의 이름이 올라 있다.

또 가벼운 언행으로 구설수에 올랐거나 사회적으로 논란의 중심에 섰던 의원 25명의 명단도 들어있다.

이중 정몽준 안상수 전 대표가 모두 '블랙리스트'에 올라있어 정가의 시선이 더욱 집중됐다. 정 전 대표는 18대 총선 허위사실 유포 혐의로 80만원을 선고받아 명단에 포함됐고 , 안상수 전 대표는 각각 대표 시절 '이대 계집애' '자연산' 발언으로 구설에 올랐던 점이 문제가 됐다.

39명의 명단 중 불출마를 선언한 이상득, 박진, 장제원, 홍정욱 의원과 탈당한 최구식 의원을 제외하고 당에서 19대 총선을 준비 중인 의원은 총 34명이다.

지역별로 분석해 보면 서울 18명, 부산·경남 8명, 경기 5명, 대구·경북 4명, 인천 2명, 강원 1명, 비례대표 1명이다. 수도권 의원이 25명으로 64.1%를 차지했다.

일일이 이름을 거명하지 않더라도 수도권 지역구 의원들이 다수 분포돼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영남권을 기반으로 한 친박계보다 친이계가 숫적으로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살생부까지는 아니더라도 사회적 논란을 일으켰다는 점 하나만으로도 공천 결정에 적잖은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에 해당 의원들은 바짝 긴장하고 있다. 친이계 의원들의 한숨이 더욱 깊어지는 이유다.

친박계는 누굴 솎아낼까

친이계만 샅샅이 뽑아내 공천을 배제한다면 18대 공천 과정에 대한 정치 보복이자, '박근혜 사당(私黨)'으로 이미지를 굳히는 우(愚)를 범하는 셈이다. 박 위원장이 이를 모를 리 없다. 때문에 '읍참친박' 식으로 친박계 인사들도 더러 공천 배제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이런 이유에서 친이계는 모두가 퇴출 위기감에 떨고 있다고 치면 친박계는 '혹시 내가 희생양이 되나'라는 생각에 밤잠을 잘 못 이루는 인사들이 적지 않다.

이미 권영세 총장이 '현역 의원 공천 50% 물갈이'를 언급하면서 지역적으로도 수도권과 영남을 가리지 않겠다는 엄포를 놓은 바 있다. 친박 핵심이라도 구색맞추기용으로 공천 탈락자에 포함될 수 있다는 얘기다.

크게 세갈래다. 먼저 수도권이나 영남권의 강세 지역에서 상대적으로 손쉽게 당선됐던 인사들이 형평성 문제에 따라 배제될 수 있다. 박 위원장은 현역 의원들의 지역구 이동에 대해서는 거부감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강남지역 의원이 강북으로 옮기는 식으로 타 지역에로의 선거구 이동보다는 몇몇이 아예 출마를 접게 되면서 나머지는 운(?) 좋게 살아남는 형국이 될 수 있다.

그 다음엔 당의 전체적인 이미지 전환을 위한 박 위원장의 불가피한 '채석 작업'에 걸려들 수 있다. 이 경우 당 전체에 깊게 배어있는 올드 이미지를 보다 젊게 바꾸기 위해 고령 의원이 대상이 될 수 있고, 새로운 이미지 전환을 위해 다선의원들이 여기에 해당할 수 있다.

또는 보수 색채가 강한 인사라던가 대북 강경파, 친기업 이미지가 유독 두드러지는 인사 등이 포함될 수 있고 너무 분포도가 높다는 지적을 받고 있는 법조계 출신도 유탄을 맞을 수 있다.

마지막으론 현실성이 감안된 정치 공학 차원의 배제다. 워낙 지역 정서가 안 좋아 누가 나가도 당선이 쉽지 않다고 평가받는 곳이 있다고 치자. 굳이 제식구를 사지(死地)에 밀어 넣을 필요가 있겠는가. 차라리 공천 배제 명단에 친박계 이름을 올려 놓는 것이 나중에 비박진영에서 제기될 수 있는 '공천 학살'이란 비판을 조금이나마 피하는 명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공천심사위에서 마련된 시스템에 의해 가려진다고 하고 있지만, 사실상 박 위원장의 구상에 따라 이런 시나리오의 적용 여부가 현실화할 것이란 것은 누구나 짐작이 가능하다.

모두 제거? 가려서 제거?

친이계 배제란 대 명제는 서 있다. 그럼 모두 배제냐, 일부 배제냐 하는 문제가 있고 여기에다 일부를 살린다면 대상이 핵심 실세냐 주변부냐 하는 문제가 남는다.

모두 배제한다면 크게 고민할 필요가 없다. 이들이 탈당을 해서 신당을 만들던, 나가서 '박세일 신당'과 손을 잡던 잡지 않던 간에 '박근혜 브랜드'를 필두로 앞만 보고 뛰면 된다. 하지만 총선은 물론이고 12월 대선을 생각하면 보수 분열을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더구나 임기 말 레임덕 현상이 심화하고 있는 청와대라고 해도 아직은 살아있는 권력이다. 아무리 여권의 중심이 박 위원장에게 쏠려있다 해도 이런 정치 현실을 무시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일부를 구제한다고 할 때 핵심과 변두리,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는 난제에 직면한다. 여기서 고안된 시나리오가 친이 의원들의 지역구가 사지(死地)로 평가받는 곳이라면 '생(生)' 쪽이고, 비교적 수월한 곳이라고 평가받는 곳이라면 '사(死)'쪽으로 가르는 방식이다.

친이 핵심이라면 이재오 의원이 먼저 생각난다. 당연히 친박 사이에서는 배제 0순위로 꼽고 있지만 서울 은평을 지역은 새누리당의 전황이 무척 불리한 곳이다. 괜히 이 의원을 배제시켜 '공천 학살' 공격을 받기보다 전투에 내보내서 생환하면 껴안고, 산화하면 내치는 선택이 유용하다는 셈법이 나온다. 이 의원이 공천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논리가 그래서 나온다. 정몽준, , 안상수 전 대표도 같은 맥락이다. 서울 동작구와 동대문구, 경기 의왕 지역도 녹록치 않은 곳이기 때문이다.

경우에 따라 공천에서 이들이 모두 살아남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박 위원장은 공천 학살이란 비난을 피하면서 정치 보복 없는 '보수 껴안기'를 이뤄낸 여권 지도자란 평가를 덤으로 얻게 된다.

또 이들이 선거에서 이겨 당으로 돌아오더라도 이미 기세가 꺾인 친이계 등 비박진영이 정적을 품에 안고 강력한 상승세를 유지할 박 위원장을 대적할 처지는 못 된다. 이들이 낙선한다면 애초 계획대로 친박 중심의 새누리당으로 대선까지 내달리면 되는 것이니 박 위원장으로서는 어느 경우도 별반 손해보는 장사는 아니다.

여기까지가 친박 내부에서 그려지는 친이계 배제를 중심으로 한 19대 총선 물갈이 시나리오의 일단이다. 박 위원장의 선택이 더욱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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