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플때는 약, 버릴때는 독약

두통 때문에 진통제 몇 알을 복용한 당신. 두통이 나으면 약을 먹을 필요가 없게 된다. 이때 남은 약을 어떻게 처리하나? 아마도 서랍 속 어딘가에 방치하다가 결국 쓰레기통으로 직행하지는 않나? 이렇게 무심코 버린 몇 알의 약이 어떤 결과를 불러일으킬까?

물환경 내 의약물질이 얼마나 유해한지는 아직 정확히 확인되지 않았다. 단 학계에서는 높은 잠재적 위험성을 고려하고 있다. 몇 년 전 프랑스 베르톨레 인근. 과학자들은 강에서 수컷도 암컷도 아닌 중성 물고기를 발견했다. 당시 강 하류에 서식하던 야생 돌고기(gudgeon)의 약 60%가 중성으로 판명됐는데, 수컷은 암컷 동물의 혈액에 존재하는 난황단백질 전구체인 비텔로제닌(vitellogenin) 수치가 매우 높았다. 강의 어귀에는 스테로이드 약품을 생산하는 다국적 제약기업 공장이 있었다. 프랑스에서 발견된 중성 물고기는 물에 녹아 있는 의약 물질의 위험을 시사한다.

자연이 보내온 이상신호

막연히 안전하다고 믿어져 왔던 의약 물질이 실제로 위험하다는 사실은 2000년대 들어서야 알려졌다. 미국 지질조사소(USGS)는 2002년 미국에 있는 13개 강에서 의약물질과 호르몬, 유기오염물질 95종의 함량을 분석했다. 그 결과 주요 오염원이 존재하지 않는 자연환경, 즉 인적이 드문 지역에서까지 항생제, 소염제 등의 성분이 검출됐고 이는 대중적 우려와 학계의 문제의식을 촉발시키는 계기가 됐다.

지난 2004년부터 물환경 잔류 의약물질의 생태독성에 대해 연구하고 있는 서울대 보건대학원 환경보건학과 최경호 교수는 "그 이후 매년 관련 논문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추세다"면서 "학계는 물론 지금은 대중적으로도 환경 중 의약물질의 위험성에 대한 관심이 과거 환경호르몬이 이슈화됐을 때처럼 널리 확산되고 있다"고 전했다.

아직까지 의약물질이 환경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는 정확히 검증된 바 없다. 그러나 일부 사례에서 보고된 피해는 매우 심각한 수준이다. 앞서 언급한 중성 물고기의 출현과 같은 생태계 교란 현상이 대표적인 예다. 이 현상은 피임약 성분인 합성 에스트로겐이 하수 처리 공정에서 완벽히 제거되지 않고 물 속에 잔류하며 어류에게 영향을 미친 결과다. 한 연구팀이 2007년 EE2라는 에스트로겐 활성화 물질을 커다란 호수에 저농도로 녹였더니 EE2에 노출된 물고기가 2~3년에 걸쳐 물고기가 멸종했다.

이와 유사한 예로 파키스탄 뱅골민목독수리의 개체수 감소 현상도 있다. 관절염 등에 쓰이는 비(非) 스테로이드성 소염진통제 디클로페낙(diclofenac) 성분에 오염된 멋이를 섭취한 독수리의 개체수가 눈에 띄게 줄어든 것. 2004년의 조사에 의하면 12년 전을 기준으로 총 개체수의 약 99%가 감소했다. 사실상 멸종에 이른 셈이다.

동물에 나타나는 이 같은 현상을 결코 쉽게 보아 넘겨서는 안 된다고 전문가들은 강조한다. 생태계에서 보내는 이상신호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물고기나 새의 개체수가 줄어들기라도 한다면 그것은 전체 생태계 구조의 붕괴를 야기할 수도 있는 매우 심각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최 교수는 말했다. "의약물질은 기본적으로 특정 생물종에게 특정한 생물학적 작용을 발휘하도록 만든 것이에요. 사람을 포함한 몇몇 동물의 생리학적 영향은 비교적 잘 알려져 있지만, 그 외의 생물종에 나타날 수 있는 부작용은 알 수 없죠. 인간이 복용했을 때 안전하다고 물고기에게도 안전하리라는 보장이 없다는 얘깁니다."

생물의 종류는 다양하다. 그러므로 의약품에 의한 징후 역시 천차만별로 나타날 수 있다. 하지만 현재 연구자들의 판단 척도는 먹이사슬 유지 정도다. 1차 생산자인 조류부터 미생물, 물벼룩, 물고기 등 상위 포식자에 이르기까지 단계별 실험군을 통해 독성을 평가한다. 이 중 한 단계라도 이상이 발생될 경우 생물계 교란의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예측 불가능한 위험

강과 바다에 의약물질이 있다는 사실은 동물은 물론이고 인간의 건강까지 위협한다. 하지만 그것이 인체에 어떻게, 얼마나 유해한지는 누구도 정확히 대답할 수 없다.

최 교수는 "두통 환자가 섭취하는 타이레놀 2알의 경우 1g, 결국 하루 섭취량을 따져보면 3~4g이나 됩니다. 우리가 먹는 물의 타이레놀 오염도가 1ppb라고 봤을 때 하루에 마시는 2ℓ 정도의 물을 통해서는 고작 2마이크로그램(㎍, 100만분의 1g)의 타이레놀 성분을 섭취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이 정도는 매일 먹는다고 해도 그 영향은 미미할 것이라는 견해가 대부분입니다. 실제 먹는 물의 타이레놀 오염도는 이보다 훨씬 낮은 수준이기도 하고요"라고 설명했다.

식수원의 의약물질 오염 사례는 강, 하천, 지하수, 하수처리시설 등에서 빈번히 나타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2007년 한강을 비롯한 4대강 유역 하천수에서 카페인과 위궤양치료제 등의 의약물질이 외국보다 높은 수준으로 검출돼 사회적 이슈가 된 적이 있다. 하지만 그 수준은 대개 물 1ℓ당 나노그램(ng, 10억분의 1g) 수준이다.

이런 상태라면 물고기처럼 지속적으로 노출되지 않는 인간의 경우 비교적 의약물질의 위해성에서 자유롭다고 봐도 할까. 최 교수는 그렇지 않다고 단언한다. "잠재적 위험성을 배제할 수 없어요. 아무리 미량이라도 평생 동안 그 물을 마신다면 궁극적으로 건강에 어떤 피해가 나타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더욱이 오늘날의 의약물질 위해성 평가방법은 아직 완전치 않다. 연구자들은 의약물질 성분 검출을 통해 위험도를 파악하는 분석방법을 개발 중이며 물고기 등의 실험생물을 이용해 환경 무영향농도를 결정하는 독성 검사를 진행하는 단계에 머물러 있다.

지금까지 알려진 의약물질 성분은 자그마치 1,200여종이 넘는다. 국내외 물환경 중에서 검출된 성분은 약 160종이며 국내에서 검출된 것만도 약 30종에 이른다. 연구자들은 이들 중 활성이나 중요도가 높다고 판단되는 성분을 중심으로 환경 무영향농도를 제시한다. 이를 근거로 필요시 각국 정부는 물환경 중 의약물질에 대한 나름의 환경기준을 수립해나갈 수 있다.

서울대 환경보건학과 환경독성학연구실에서 제시한 내용에 따르면 해열진통소염제 성분의 이부프로펜(ibuprofen)의 환경 무영향농도는 10㎍/ℓ, 항생제 성분 린코마이신(lincomycin)의 경우는 7㎍/ℓ로 추정된다. 이 두 물질은 다른 환경오염물질에 비해 위험도가 높다고는 할 수 없지만, 물환경 내에서 흔히 검출되는 단골손님이다.

지난 2010년 발표된 연구 결과에 의하면 이부프로펜의 경우 10㎍/ℓ보다 훨씬 낮은 농도에서도 일본 송사리에게 독성영향을 끼친 사실이 발견됐다고 최 교수는 귀띔했다.

생태계에서의 심각한 폐해 사례가 일부 보고됐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껏 학계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단일 의약물질이 미치는 위해성은 비교적 낮다. 물론 이는 안심해도 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단일 물질이 생태계나 인체에 즉각적 타격을 가할 수 있다는 증거가 아직 나타나지 않은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최 교수는 "의약물질이 다이옥신(dioxine) 만큼 위험하다는 근거는 없습니다. 하지만 지금 당장 근거가 밝혀지지 않았다고 해서 이대로 덮어둬야 할까요? 그러기엔 석연치 않은 점이 너무 많아요"라고 덧붙였다.

올바른 처리법은?

의약 물질이 인체에 미치는 영향은 적을 수 있다. 그러나 여러 물질이 섞이면 혼합 독성을 가질 수 있다.

최 교수는 "특정 약리작용을 지닌 의약물질이 다른 의약물질과 혼합됐을 경우 한 물질이 다른 물질의 독성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최 교수는 비듬약 등에 쓰이는 항진균제 이트로코나졸(itroconazole)류의 의약물질을 이부프로펜 등 일부 의약물질과 함께 노출시켜 실험한 결과, 내분비계 교란 작용을 증폭시킨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항생제 내성균이 출현할 수 있다는 가정도 나올 수 있다. 항생제 내성균이 빗물 등의 지표수에 비해 하수처리장 방류수에서 월등히 많이 검출된다는 것은 익히 알려져 있는 사실. 다수의 연구자들은 물환경 중 잔존하는 항생물질 수준은 내성균을 생성시키기에 충분하지 않다는 이유로 그 출현 가능성을 다소 낮게 점치고 있지만 축산분뇨 등 약물이 고농도로 축적된 곳에서는 드물게나마 내성균 유전 형질을 형성할 수도 있다는 입장이다.

일례로 지난 2007년 미국 메릴랜드대학 칼리지파크캠퍼스의 아미 사프코타 박사팀은 양돈 농장이 밀집된 지역의 하천 하류에서 수집한 물 시료로부터 다량의 항생제 내성 장구균(enterococci)이 발견됐다는 내용의 연구 결과를 발표하기도 했다. 항생제 사용 비율이 비교적 높은 우리나라의 경우 이 역시 간과할 수 없는 문제다.

최 교수는 "장기적으로 환경에 부담이 적은 약을 만드는 게 중요하겠죠. 지금 당장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예방책도 있습니다. 복용 후 남은 약을 폐기할 때라도 조심해야 해요. 불필요한 약은 약국에 반환하는 등 모아서 처리하는 게 가장 올바른 방법입니다."라고 말했다.

처방 받은 약은 유효기간이 지나면 폐의약품이 된다. 이를 올바른 방법으로 처리하는 게 관건이라는 얘기다. 국내외 연구 결과를 보면 우리나라 소비자는 구입한 약 중에서 15~25%를 자체적으로 폐기한다. 폐기법으로는 약 80%가 쓰레기통, 10%가 하수구를 이용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복용한 약물이 대소변으로 배출되는 것도 막을 수 있을까. 의약품은 종류에 따라 흡수율이 다양한데 어떤 약품은 복용량의 80% 이상이 그대로 배설된다. 그래서 연구진은 하수 및 정수처리공정을 개선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이를 개선해 식수를 안전하게 공급해야 한다는 것이다. 잔류 의약물질 실태를 세밀히 조사하고 관리할 방법을 찾아야만 한다.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또 죽이기도 하는 약. 아무리 좋은 약이라도 필요한 곳에 적절하게 쓰이지 못한다면 결국 독약일 뿐이라는 사실을 명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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