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도가니' 에서 주인공 강인호 교사가 성폭력 피해 학생을 보살피는 장면. 강인호 교사의 실재 모델인 전응섭 광주농아인협회사무국장은 성폭력사례 디딤돌 특별상을 받았다.
성폭력 사건에 휘말린 피해자는 누굴 만나느냐에 따라 울고 웃는다.

문제 해결에 도움을 주는 디딤돌을 만나면 안도의 한숨을 쉬지만 방해가 되는 걸림돌을 만나면 눈물을 쏟을 수밖에 없다.

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전성협) 시민감시단이 지난해 성폭력 사건 수사 및 재판 과정에서 피해자 인권을 보장하는데 기여한 사례(디딤돌)와 피해자 권리를 침해하고 2차 피해를 준 사례(걸림돌)를 각각 일곱 건씩 선정했다.

인화학교 성폭력 사건을 세상에 알린 전응섭(50) 광주농아인협회 사무국장은 3일 대전 인터시티에서 열린 시상식에서 디딤돌 특별상을 받았다. 전 사무국장은 "여러 분들이 관심을 준 덕분에 인화학교 사건이 해결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영화 도가니 주인공 강인호의 실제 모델인 전 사무국장은 각종 혜택을 줄 테니 피해 학생들이 진술을 뒤집게 해달라는 회유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2006년 인화학교에서 파면됐다.

여성 판사 모임인 젠더법연구회도 특별상을 받았다. 젠더법연구회는 성폭력 사건에 대한 절차 개선을 논의하는 심포지엄을 개최해 피해자 재판에서 겪는 어려움을 개선하는 방안을 모색했다. 전성협은 "젠더법연구회 활동이 성폭력을 근절하는 사회문화를 정착시키는 데 중요한 기초를 마련했다"고 평가했다.

성폭력 피해자 보호 앞장

대전지법 제12형사부(문정일ㆍ박재성ㆍ조아라 판사)와 김민아 검사 등은 성폭력 피해자 보호에 앞장선 디딤돌로 뽑혔다. 문정일 판사 등은 2006년부터 지난해까지 무려 5년 동안 식칼로 위협해 20대 여성 피해자를 성폭행해온 50대 가해자에게 징역 15년, 전자장치 부착 20년을 선고했다. 가해자가 서로 동의한 성관계라고 주장했지만 문 판사는 가해자가 작성한 메모와 녹취록에 폭력 성향이 반영된 점과 칼, 쇠몽둥이, 총을 가해자에게서 압수한 점 등을 들어 일방적인 강압에 의한 강간이라고 판단했다. 협박을 받은 피해자가 구속돼 갇힌 가해자에게 안부 편지를 보낸 사실이 있어 자칫 잘못하면 합의한 성관계로 해석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전성협은 재판부의 현명한 판단으로 피해자를 악의 수렁에서 구했다고 평가했다.

피해 증언시 인권 보장

김민아 검사는 재판 과정에서 피해자를 배려했다는 사실이 눈에 띄었다. 지난해 1월 심신미약 상태에서 강간을 당한 피해자가 발생했다. 가해자가 국민참여재판을 요구하자 김 검사는 일곱 명이나 되는 배심원 앞에서 증언하면 피해자 마음에 상처를 받을 수 있다며 적극 반대했다. 그러나 결국 국민참여재판으로 진행되자 김 검사는 피해자를 심문할 때 피고인 측을 퇴장하게 하는 등 피해자 보호에 신경을 썼다. 또 피해자가 배심원과 얼굴을 마주하지 않은 상태에서 증언할 수 있도록 세심하게 배려했다. 전성협은 재판에서 침해되기 쉬운 성폭력 피해자 인권을 김 검사가 적극적으로 보호했다는 점을 높이 평가했다.

서울중앙지법 제26형사부(정영훈ㆍ배정원ㆍ도영오 판사)도 성폭력 사건 디딤돌로 선정됐다. 여고생에게 수면제를 먹인 성폭력 가해자가 재판에서 미성년자인 줄 몰랐고 동의된 성관계라고 강력하게 주장하자 정영훈 판사 등은 공원과 DVD방 등 주변에 설치된 폐쇄회로 TV를 일일이 분석해 범죄 사실을 입증할 근거로 활용했다. 게다가 재판 과정에서 적나라한 묘사로 피해자에게 2차 피해에 가까운 고통을 줬다는 이유로 가해자가 초범임에도 징역 6년을 선고했다.

특수강간 불구속 재판

전성협은 디딤돌로 선정된 판검사가 피해자에게 큰 도움을 줬다고 칭찬했다. 빛이 있으면 그림자도 있는 법. 전성협은 성폭력 피해자 마음에 상처를 준 걸림돌도 공개했다.

지난해 대전을 떠들썩하게 만든 여중생 강간 사건 재판을 맡은 판사는 걸림돌 1호로 손꼽혔다. 가해자인 고교 3학년 16명은 지적 장애가 있는 여중생을 집단 성폭행했다. 대전지법 가정지원 재판부는 가해자들이 반성하고 있다는 이유로 특수강간임에도 불구속으로 재판을 진행했고 수능시험에 집중하라며 선고를 유예했다. 보호처분이란 판결이 나오자 여성단체와 장애인 단체 등은 '법원이 사실상 무죄를 선고했다'며 법원을 비난했다.

상황 재연 요구 경찰도

외국인에게 성폭행을 당했다고 하소연한 여성을 도와주겠다고 접근해 비디오방에서 피해 상황을 재연해 보자고 했던 경찰도 걸림돌로 뽑혔다. 파렴치한이란 눈총을 받은 이 형사는 추가 진술을 받는다는 핑계로 피해자를 불러 비디오방에서 음란 동영상을 함께 보자고 하는 등 성희롱을 했다는 혐의도 있다. 피해자가 강하게 반발하자 형사는 경찰청에 사표를 제출한 뒤 500만원을 주며 사건을 무마했다.

전성협이 발표한 디딤돌과 걸림돌은 전국 경찰서와 법원, 검찰청 및 성폭력상담기관으로부터 추천을 받아 강지원 변호사가 위원장인 심사위원회에서 선정했다.



이상준기자 ju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