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천 위에 고가도로를 설치하자."

조선철도회사는 일제 시대였던 1939년 청계고가도로 건설을 계획했다. 고가도로는 한정된 도로를 활용하고자 땅 위에 지대 그 위에 설치한 길. 서울 인구 100만명 시대를 대비하고자 조선철도회사는 일찌감치 고가도로와 지하철에 눈을 돌렸다.

한국 최초의 고가도로인 청계고가도로는 30년 뒤인 1969년 3월 22일에 완공됐다. 완공 당일 박정희 대통령이 탄 자동차는 동대문구 용두동에서 중구 충무로 2가까지 3분 만에 달렸다. 삼일로 위를 지난다는 이유로 당시엔 3ㆍ1 고가도로라고 불렸다. 왕복 4차선 자동차 전용도로 3ㆍ1 고가도로는 충무로 2가에서 명동, 황학동, 신당동을 거쳐 용두동까지 총 3.75㎞ 규모였다.

청계천은 1~8가에 이어 신답 철교까지 복개됐고, 청계고가도로 길이도 6.991㎞까지 늘어났다. 인구 500만명 시대를 눈앞에 뒀던 서울은 청계고가도로가 개통되면서 교통 문제에 대해 한시름을 덜었다. 산업화가 한창이었던 70~80년대 청계고가도로는 근대화를 상징하는 명물로 자리매김했고, 청계고가도로 사진은 외국에서 한국 홍보에 사용됐다.

서울의 명물로 자리매김한 청계고가도로는 2000년대 들어 하루에 차량 16만대가 오가는 서울 도심 교통의 대동맥이었다. 그러나 90년대 중반에 노후화에 따른 안전 문제가 대두됐다. 이명박 대통령이 서울시장으로 일했던 2002년 7월부터 대형차 출입이 금지됐고, 2003년 6월 30일 오후 12시를 기준으로 차량 통행이 전면 금지됐다.

한때 근대화의 상징이었지만 청계고가도로는 청계천 복원과 함께 수명을 마쳤다. 고가도로가 사라지자 주변 땅값은 올랐다. 땅 주인은 쾌재를 불렀지만 운전자들은 불만이 많다. 도심을 관통하는 자동차 전용도로가 사라지면서 교통여건이 나빠졌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청계고가도로를 생각하면 대중영합주의(populism)를 떠올리는 사람이 많다.



이상준기자 ju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