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식
그가 작은 클럽에서 공연할 때면 어처구니없는 풍경도 종종 펼쳐진다. 골수 외국 관객이 단 혼자서 박장대소하며 좋아라 하는 모습이 대표적이겠다(한 신문에서 큰 기사로 다룰 만큼 예외적 인물이긴 하지만). 그 또한 나름의 진지한 반응 방식이며 나아가 일종의 개안이라고도 봐 줄 수 있으리라.

프리(free)의 세계는 단적으로 말해 기(氣)싸움이다. 몽고의 세계적 전위 보컬리스트 사인호 남치락과 협연을 펼쳤을 때 종종 그가 보내던 매서운 눈빛은 내면의 불편함---대화하고 있지 않다는---을 온축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그 외국 관객의 예외적 반응 역시 기의 자연스러운 발로라고 볼 수 있다. 언어가 끊긴 세계 너머의, 즉 언어도단(言語道斷)의 경지 속에서 프리 뮤직의 생산자와 소비자들은 매우 독특한 커뮤니케이션 구조를 쌓아 가고 있다. 그러나 소통은, 그의 관심이 아니다.

거의 하루 종일, 그는 자신의 음악에 매몰돼 있다. 집에 마련된 작은 연습실에서 그는 연습 또 연습이다. 제 3자에게 그것은 아예 하나의 벽(癖)처럼 느껴질지도 모른다. "연습 때 졸음을 쫓기 위해 커피를 시작했다. 이왕이면 배고픔도 쫓으려 설탕을 많이 넣는다"는 그의 말은 그 연장선상에 있을 것이다.

연습이라는 견고한 일상을 이유로, 책을 위한 인터뷰에도 자투리 시간만을 내 준 그는 상당히 불친절한 인터뷰이였던 셈이다. 그에 대한 하드 보일드한 관심은 그림 맞추기 퍼즐 풀이이기도 했다. 해법의 전개 과정에서 나는 색소폰 주자 씨의 도움을 먼저 구했다. 거기에는 첫 째 그가 정통 재즈의 치열한 탐색 과정을 감내해 오고 있다는 점, 둘 째 동시에 대중적 활동도 병행하는 덕에 일반과의 소통 면적을 넓힐 수 있다는 점이 고려됐다. 말하자면 그는 '으로 가는 길목'인 셈이다..우리는 먼저 강씨의 앨범 '도깨비'를 두고 대화의 문을 열었다. 그의 말이다.

"앨범 '도깨비'는 여전히, 계속 발전중인 씨의 기량을 모두 담고 있을뿐더러, 그의 사상적 측면까지 포괄하는 작품이다. 여타 앙상블 편성의 음반들과 비교해 봤을 때, 그의 진정한 색체는 역시 솔로 연주에 있다는 사실을 새삼 일깨워 주는 작품이다. 그 같은 점은 나도 마찬가지다. 앙상블은 결국 대화의 양식이므로.자기만을 주장할 수 없는 것이다.

강태환
그 앨범은 단선율 악기인 색소폰을 통해 재즈적 즉흥의 정수를 담고 있다. 앨범 전체를 솔로로 만드는 경우는 피아노라면 많지만, 단선율 악기로 그 같은 일에 도전한다는 것은 최고의 경지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홀로 감당하는 씨의 경우를 대단한 예외로 보는 이유다.

선생을 처음 만났던 것은 약 20년전. 낙원상가 뒤편에서 선생이 나름의 프리 재즈를 막 궁리하고 있을 때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 23세였던 나는 이태원의 클럽 올댓재즈에 베이시스트 장응규, 피아니스트 이영경과 함께 출연하며 재즈에 대한 열정으로 달아 있었다. 풍문으로만 듣던 선생을 직접 본다는 기대로 차 있었다.

'세상에 이런 음악도 있구나!'그의 음악을 처음으로 접했을 때의 느낌은 오직 그랬다. 충격이었다. 한마디로, 우리가 상식적으로 아는 음악의 이론은 전혀 통하지 않는 음악이라는 생각이었다. 오로지 자기가 하고픈대로만 하는구나, 프리 재즈란 알고 보니 막 하는 재즈로구나, 하는 오해가 두서없이 튀어 올랐다. 지금은 모든 것을 초월한 음악으로 '이해'하지만.

나는 이후 몇 차례 거길 더 갔다. 당시 주된 관심은 그가 마음껏 구사하는 초절 기교에 가 있었다. 순환 호흡이란 게 있다는 말만 듣고 막연히 상상하고 있을 때였으니까, 트럼페터 최선배씨가 빨대를 불어가며 해주던 이야기에 마음이 쏙 뺐겼으니까. 그 현란한 테크닉을 모방해 실제 연주에 쓰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러나 더블 톤, 텅잉, 겹음 등 여타 테크닉은 시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누구든 해낼 수 있다. 결국 방법을 몰라서 못 하는, 기교인 것이다. 중요한 점은 그것들을 자기화시켜, 내면의 생각과 일치시켜 표출하느냐의 여부다. 순환 호흡이라는 테크닉을 일단 마스터하면 하루 종일이라도 소리를 낼 수 있지만, 문제는 이를 음악적으로표현하는 데 있다. 관객의 반응까지 계산하는 게 중요한 것이다. 그런 게 없으면 유희에 지나지 않는다.

그와 음악적으로 부딪친 것은 종로 뒷골목의 무대였다. 50명도 채 못 들어가는 사랑방 같은 곳에서 우리는 스쳐지나듯 즉흥을 펼쳤다. 물론 그 전에도 KJC 사무실 같은 곳에서 하는 아주 작은 콘서트에 가 그 연주를 몇 번인가 보았다. 대선배인 김대환씨 등과 열던 소규모 공연이었다.

서로 불편할 수도 있었을 자리였다고 생각한다. 당시부터 선생은 솔로로 연주할 때 가장 빛나는 분이라는 믿음을 갖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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