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조명하(1905~1928년) 의사는 사실상 조국이 일본 식민지로 전락한 1905년 황해도 송화에서 태어났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조명하는 보통학교를 중퇴할 수밖에 없었다. 황해도 신천군청에서 서기로 일하면서도 배움에 대한 열망이 넘쳐 강의록을 보며 독학했다. 그러나 마지막 황제 순종 국장일이었던 1926년 6월 10일 6ㆍ10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운동에 투신하기로 결심했다. "일본 제국주의를 파타하라" "토지는 농민에게 돌려라"라는 구호는 열아홉 살 청년 조명하의 가슴에 메아리쳤다.

조명하는 "항일을 위해 우선 일본을 알아야 한다"며 일본 오사카로 건너갔다. 낮에는 공장과 상점에서 일하고 밤에는 학교를 다녔다. 임시정부가 있는 중국 상해에 가기로 마음을 먹은 조명하는 1927년 중간 기착지 대만으로 떠났다. 이듬해인 1928년 일본 히로히토 천황 장인인 구니노미야 구니히코 육군 대장이 대만에 있는 군부대를 방문한다는 소식이 조명하 귀에 들어갔다.

1928년 5월 14일 아침 9시 55분 타이중 다이쇼초 도서관 앞. 구니노미야 대장이 탄 차가 모퉁이를 돌기 위해 속도가 줄자 조명하가 군중 속에서 뛰어나와 차에 올랐다. 망국민의 한을 담은 독 묻은 단검은 구니노미야 대장의 왼쪽 어깨를 스치고 나서 운전사 손에 꽂혔다. 스물세 살 청년 조명하는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일본군에 체포됐다. 일본 법정은 황족위해죄를 들어 조명하 의사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그러나 일본 정부와 대만 총독부는 조 의사가 일으킨 의거를 염세주의에 빠져 자살을 생각하던 청년이 저지른 우발적인 사건이라고 발표했다. 조선과 중국에 반일 감정이 번질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조 의사가 법정에서 남긴 말은 유언이 됐다.

"할 말은 없다. 조국의 광복을 못 본채 죽는 것이 한스러울 뿐이다. 저세상에 가서도 독립운동을 계속하리라."

조 의사는 10월 10일 타이페이 형무소에서 처형됐다. 조 의사가 저세상으로 떠나자 구니노미야 대장도 이듬해 1월 목숨을 잃었다.



이상준기자 ju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