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세가 되면 외부 활동을 활발하게 할 것이다."

2003년 32살의 젊은 나이로 사실상 그룹을 떠맡은 이후 공개적인 행보를 자제해왔던 정지선 현대백화점 회장이 심심찮게 해왔던 말이다. 경쟁사들의 사업확장에도 정중동 행보를 보여왔던 정 회장이 40대에 오른 이후 재차 기지개를 켜고 있다. 그간의 보수적 경영으로 쌓여왔던 그룹 내의 잠재력이 올해 폭발할 것으로 전망되는 가운데 정 회장의 행보가 주목된다.

최연소 총수 등극

정지선 회장은 정주영 현대 창업주의 3남인 정몽근 현대백화점 명예회장의 장남이다. 1982년 작고한 현대가의 장남 정몽필 전 인천제철 사장의 양자로 입양될 뻔했으나 실제로 이뤄지지는 않았다고 전해진다. 1972년에 태어난 정 회장은 숭의초등학교, 청운중학교를 거쳐 경복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부친인 정 명예회장을 비롯, 삼촌인 정몽구 현대차 회장, 동생인 정교선 현대백화점 부회장과는 경복고 동문이 된다.

1991년 연세대 사회학과에 입학한 정 회장은 학부를 졸업하지 않은 상태에서 미국으로 건너가 1999년 하버드대 스페셜스튜던트 과정을 마쳤다. 2000년 현대백화점 경영관리팀 부장으로 입사한 정 회장은 이듬해 기획실장 이사를 거쳐 2002년 기획ㆍ관리담당 부사장을 맡으며 본격적으로 현대백화점 경영에 참여한다. 2003년 부회장에 오르며 사실상 현대백화점을 지휘해왔던 정 회장은 2008년 본격적인 회장 직함을 달게 된다. 현대가 3세 중 첫 회장이며 국내 30대 그룹에서 최연소로 총수에 등극했다.

직원복지 최우선으로

정지선 회장의 할아버지인 정주영 창업주와 부친 정몽근 명예회장은 정지선 회장에게 틈만 나면 겸손과 성실에 대해 가르쳤다고 전해진다. 그 때문에 정 회장은 재벌가 자제답지 않게 젊은 직원들과 잘 어울린다는 평을 받고 있다. 회의시간에도 자신의 의견만 내세우는 것이 아닌 말단 직원의 이야기도 끝까지 경청하는 편이다.

정 회장이 가장 강조하는 부분은 직원복지다. 매출 1위보다 직원복지 1위를 꿈꾼다는 정 회장의 의지는 구체적인 직원복지책으로 이어졌다. 현대백화점은 2005년 근무시간 자율복장을 선언했다. 업무보고는 문자메시지로 하는 등 절차가 대폭 간소화됐고 야근도 줄어들었다. 정 회장이 회장 직함을 단 2007년 이후 현대백화점은 백화점업계 연봉 1위를 놓친 적이 없다. 복지수준이 높아지면서 자연스레 직원들의 업무 집중력도 강해졌다는 후문이다.

정 회장은 직원들을 챙기는 것만큼이나 가족들에 대한 관심이 지대하다고 알려져 있다. 바깥에서 취미생활을 즐기기보다는 부인, 자녀들과 집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다. 동생인 정교선 사장과도 우애가 좋은 것으로 유명하다. 공식적인 자리가 끝나면 형제가 같은 차를 타고 함께 들어가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다고 한다.

40세 되며 공격경영 나서

올해는 정지선 회장이 만 40세가 되는 해다. "40세부터 활발한 활동을 할 것"이라는 자신의 말처럼 정 회장은 올해 공격적인 경영에 적극 나서고 있다. 정 회장은 신년사를 통해 "단기적 관점에서 방어적인 조치만 취한다면 핵심 사업경쟁력마저 잃어버리게 된다"며 "상시 위기 상황에서는 장기적인 미래 성장을 위한 준비도 병행해야 한다"고 공격경영 의지를 드러낸 바 있다.

현대백화점은 지난해 4조1,552억원의 매출을 기록, 백화점업계 2위 자리를 지키고 있다. 현대백화점의 2011년 사업보고서에 따르면 롯데백화점은 현대백화점의 두 배가 넘는 매출을 기록하며 부동의 1위 자리를 고수하고 있고 신세계백화점은 근소한 차로 3위에 머물러 있다. 견고한 1위인 롯데백화점을 뺀 2, 3위의 대결이 치열한 상황이다. 지난해 이마트와 분리된 신세계백화점은 업계 2위에 올라서겠다고 공언했지만 실적ㆍ시가총액ㆍ영업이익률 모두에서 현대백화점에 밀렸다.

2003년 이후 신규점 출점이 없었던 정 회장은 지난해부터 공격적인 출점을 꾀하고 있다. 실제로 2010년 일산 킨텍스점, 2011년 대구점 등 신규 점포들이 성공적으로 자리 잡은 데다 올해 3분기에도 청주점 오픈이 예정돼있다. 현재 전국에 12개 점포를 운영 중인 현대백화점은 올해 오픈 예정인 청주점을 포함, 총 2020년 23개까지 확장할 예정이다. 2014년 출점하는 양재점, 광교점, 판교점 등은 복합쇼핑몰로 계획 중이다.

신성장사업 추진에도 파란불이 켜졌다. 지난 1월 정 회장은 의류업체 한섬을 인수하며 패션사업에 화려하게 진출했다. 정 회장은 현대홈쇼핑을 통해 한섬의 지분 34.6%(4,200억원)를 인수했다. 정 회장은 정재봉 한섬 사장을 직접 만나는 등 인수를 진두지휘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 회장은 올해 안에 프리미엄 아웃렛을 개점, 그룹의 신성장동력으로 삼을 패션사업을 뒷받침할 예정이다.

정 회장의 한섬 인수는 취임 이후 처음 있는 경영권 인수라는 측면에서도 눈길을 끌었다. 2010년 선포한 '비전 2020'의 포문을 연 것으로 읽히는 까닭이다. 당시 정 회장은 "그룹 성장축은 유망 사업에 대한 M&A를 통한 신성장동력을 발굴하는 데 있다"고 밝힌 바 있다.

일감 몰아주기 부담 여전

승승장구 중인 정지선 회장에게도 역린은 있다. 시민단체ㆍ공공기관ㆍ정치권 등이 합심하여 비판하고 있는 '계열사 일감 몰아주기'가 그것이다. 현대백화점 내에서는 현대그린푸드가 일감몰아주기의 주체로 꼽히고 있다.

종합식품업체인 현대그린푸드는 지난해 7,955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3,952억원의 매출을 기록한 2010년과 비교하면 두 배로 성장한 셈이다. 영업이익은 460억원으로 전년대비 39.2% 증가했다. 2010년 현대푸드시스템, 2011년 현대F&G와의 합병이 주요 성장배경으로 꼽히지만 그룹 내 일감 몰아주기의 영향도 제기되고 있다.

지난해 현대그린푸드는 총 매출의 23%가량을 그룹 내 19개 계열사로부터 올렸다. 이중 대주주인 현대백화점과의 내부거래도 전체의 13.2%에 달한다. 좋은 실적을 거둔 현대그린푸드의 주가는 44.2%(1월 7일 1만1,200원, 12월 29일 1만6,150원)나 올랐다. 현대그린푸드의 최대주주, 2대주주인 정교선 부회장(15.28%) 정 회장(12.67%)은 막대한 이득을 볼 수 있었다. 정 회장은 30대 그룹 총수 중 보유지분 평가액 증가율 1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김현준기자 realpeac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