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들의 음악적 끼와 꿈의 분출구였던 70-80년대의 대학가요제는 히트곡을 양산했고, 수상 곡들은 당대 젊은이들의 감성을 휘저어 놓았다. 5공화국 군사정권 초기, 김민기, 신중현, 조용필 등 활동이 금지된 뮤지션들이 대거 해금이 되면서 잠시 해빙 분위기가 감돌았다. 하지만 훈훈한 봄기운은 오래가지 못했고 온 나라는 변혁을 요구하는 민주화 운동으로 후끈 달궈졌다. 광주민주화항쟁이 벌어졌던 1980년, 캠퍼스와 거리엔 최루탄이 난무했고 대부분 학교들은 상당기간 문을 닫았다.

시대 상황과 달리 경쾌한 디스코 리듬이 세상을 지배했던 당시, 여성 보컬들을 전면에 내세운 혼성밴드들의 댄서블하고 뽕끼 가득한 노래들이 각광을 받았지만 캠퍼스에는 민중가요가 애창되기 시작했다. 대학가요제에 참여하기 위해 대학입시를 치렀던 순진한 학생들은 점차 답답한 정치현실을 인식했다. 수업거부를 하고 시위에 참석한 그들의 애창곡은 대학가요제가 배출한 노래들에서 이탈되기 시작했고 대학가요제 출전 곡들에도 격동의 시기를 살았던 젊은이들의 한숨과 방황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1977년부터 시작된 대학가요제는 암흑기의 대중음악계에 새로운 자양분을 수혈하며 엄청난 파장을 몰고 왔다. 입상자들이 대부분 엄청난 대중적 인기를 구가하면서 출전자들은 입상에 대한 강박관념을 가졌다. 전년도에 수상했던 노래들의 분위기와 장르를 따라 하는 트렌드는 그 결과물이다. 실제로 1회 대회 때 서울대 캠퍼스밴드 <샌드 페블즈>가 대상을 받자 이후 밴드들이 대거 등장했다. 또한 1회 대회에서 은상을 수상한 이명우 '가시리', 2회 대회에서 금상을 차지한 노사연의 '돌고 돌아가는 길', 은상을 수상한 활주로의 '탈춤'같은 전통리듬과 정서를 대중가요에 접목한 곡들이 연속적으로 수상을 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자 유사한 노래를 들고 나오는 출전자들이 줄을 이었다.

1981년 대학가요제 대상

1979년 제3회 대회 이후 한국적인 가락과 이미지가 진동하는 국악계열의 창작곡이 대거 등장했다. 정선아리랑의 정한을 소재로 삼은 '고운님'도 있었고 우렁찬 바리톤 음색으로 삼국을 통일한 무열왕 뒤를 이어 내실을 다졌던 문무왕의 업적의 기리는 '대왕암' 그리고 80년대를 대표하는 운동가요 '임을 위한 행진곡'의 작곡자 김종율도 혼성듀엣을 결성해 '영랑과 강진'으로 수상했다. 그 같은 흐름에 걸맞게 대상을 수상한 노래가 등장했다.

1981년 MBC 창사 20주년 기념으로 성대하게 열렸던 제5회 대학가요제에서 당시 한양대 상경대 1학년 정오차는 '바윗돌'로 당당히 대상을 수상했다. 광주출신인 그는 광주일고를 졸업 후 군복무를 마친 복학생이었다. 뭔가 답답하고 우울했던 젊은 세대의 마음을 대변하듯 시원하고 파워풀한 가창력이 압권이었던 그의 노래는 마치 답답했던 가슴을 시원하게 뚫어준 청량제 같았다. 하지만 이 노래는 대학가요제 사상 최초로 시대적 상황 때문에 금지가 된 불행한 곡으로 기록되어 있다.

정오차가 부른 '바윗돌'은 대학가요제 대상 수상 후 한 달 정도 방송에 줄기차게 나오다 한 지상파 TV 쇼 프로그램 출연 후 한순간에 사라진 방송금지곡이다.

답답했던 젊은 세대 대변

당시 진행을 맡았던 아나운서가 '바윗돌'이란 노래제목이 무엇을 의미하냐고 묻자 정오차는 "광주에서 죽은 친구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만든 노래고 '바윗돌'은 친구의 묘비를 의미한다."고 대답했다. 그러니까 살벌했던 광주민주화항쟁 시국에서 1981년 광주 망월동에 묻힌 민주열사를 기리는 노래가 대학가요제에서 대상을 덜컥 받았던 것. 방송이 나간 후, 정보기관과 방송국에서 난리가 났다. 다음 날 이 노래는 불온사상 내포란 이유로 금지조치가 내려졌다. 격동의 현대사와 연루된 심수봉 이래로 정오차의 '바윗돌'은 대학가요제의 마지막 금지곡으로 기록되었다. 시대의 아픔을 은유적인 가사와 시원하고 우렁찬 창법으로 노래했던 이 곡은 곧 대중의 기억에서 삭제되었다. 이후 대학가요제는 진중한 느낌의 출전 곡이 현저하게 줄어들었고 가수 등용문의 역할로 그 명맥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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