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중앙지검 첨단범죄수사 제1부 김영종 부장검사가 6월 27일 서울중앙지검 신관에서 취재진에게 삼성전자와 LG전자 아몰레드 기술 유출 사건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주간한국 자료사진
최근 5년간 피해 400조원 추산 한 해 정부예산규모 훌쩍 넘어
삼성·LG전자 아몰레드 기술 검사장비 납품업체에 유출 당해
기술개발비만 수조원대 이상 해당기업 되레 수사중단 협박도
中, 산업·군사 키우기 위해 관련 정보 유출에 혈안
기업 보안정책 철저하지만 기술유출 예방 쉽지 않아
엄격한 처벌기준·형량 필요 정부도 국가 안보 차원 접근해야


"산업스파이는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핵분열하듯 끊임없이 증가하면서 21세기 정보전쟁 시대를 특징짓는다."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는 산업스파이를 일컬어 21세기 유망 산업이라고 말했다. 농경 사회에서 곡물을 훔쳤다면 정보 사회에선 정보와 지식을 훔칠 수밖에 없다. 토플러는 "경제와 금융 스파이가 21세기 향방을 가를 변수다"고 설명했다.

영국 산업혁명도 사실상 산업스파이에서 비롯됐다. 영국은 18세기 이탈리아 비단 공장에서 기술을 훔쳤고, 미국은 19세기 영국에서 방직기 기술을 빼돌렸다. 기술 유출에 따라 섬유시장 최강자는 이탈리아에서 영국을 거쳐 미국으로 바뀌었다. 토플러의 예상대로 지식정보화 시대가 되자 산업스파이의 활동이 눈에 띄게 늘었다.

국정원은 최근 5년간 산업스파이 때문에 입은 피해 규모를 400조원 이상으로 추산했다. 올해 정부 예산은 총 325조 4,000억원대. 산업스파이에 따른 피해는 일반인의 상상을 초월했다. 첨단 기술이 기업과 국가의 흥망성쇠를 좌우하기에 산업스파이 색출을 국가 안보 차원에서 다룰 필요가 있다.

서울중앙지검은 6월 27일 삼성전자와 LG전자가 각각 연구비로 1조 3,800억원, 1조 270억원을 투자한 능동형 유기발광 다이오드 패널(AMOLED) 기술을 빼돌린 이스라엘 디스플레이 검사장비 납품업체 오보텍 한국지사 직원을 구속ㆍ기소했다. 산업스파이 노릇을 한 오보텍 직원은 모두 한국인이었고, 이들은 삼성전자가 세계 최초로 개발하던 55인치 TV용 아몰레드(AMOLED) 기술을 훔쳤다.

오보텍 한국지사는 "연구용으로 회사 내부에서만 공유하려고 했다"며 범행을 부인했다. 검찰이 증거를 제시하자 이들은 "우리가 철수하면 한국 디스플레이 산업은 다 망한다. 그래도 수사를 계속하겠냐"며 검찰을 협박했다. 이들은 삼성전자와 LG전자에서 빼돌린 자료를 이스라엘 본사와 삼성전자 경쟁사인 중국 BOE, 대만 AUO에 넘겼다고 알려졌다. BOE는 지난해에도 삼성전자와 LG전자 연구원을 매수해 디스플레이 공정기술을 빼내다 적발됐다. 삼성전자와 LG전자가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 셈이다.

산업스파이라면 영화 007의 주인공처럼 정보요원을 떠올리기 마련이다. 그러나 오늘날 산업스파이는 정보요원보다 함께 일하던 동료인 경우가 많다. 국정원이 2005년부터 2007년까지 적발한 산업스파이를 분석했더니 전ㆍ현직 직원이 79%를 차지했다. 외국 기업이 한국에 지사를 설립하고 고액 연봉 등을 미끼로 핵심 인력을 영입하면서 한국 경쟁사 첨단 기술을 빼돌리는 사례가 많다.

러시아에는 라세티를 쏙 빼닮은 자동차 C-100이 달린다. 돈인베스트 그룹 계열사 타가즈코리아는 한국 공장에서 부품을 생산하고 러시아에서 조립하는 방식으로 짝퉁 라세티를 만들었다. 타가즈코리아는 2007년부터 신차 개발을 시작하면서 GM대우(현 한국GM) 연구원을 100명 가량 영입했다. 연구원은 라세티 차체 및 섀시 설계도면을 타가즈코리아로 빼돌렸고, 이 자료를 바탕으로 타가즈코리아는 2009년 라세티 짝퉁 C-100을 개발했다.

쌍용자동차는 2005년 중국 상하이자동차그룹에 인수됐는데, 국고 지원을 받아 개발한 디젤 하이브리드 자동차 기술을 2006년 상하이자동차로 넘겼다. 검찰은 하이브리드 기술을 유출한 쌍용자동차 종합기술연구소장 등을 기소했다. 검찰은 인수ㆍ합병 절차를 거쳤더라도 쌍용자동차가 별도법인이기 때문에 계약 없이 무단으로 기술을 이전하면 범죄 행위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법원은 상하이자동차에 넘겨진 하이브리드 기술과 디젤 엔진 기술이 영업비밀 가치가 높지 않아 기술 유출로 볼 수 없다고 판결했다. 서울중앙지법은 지난 2월 쌍용차 기술을 유출한 직원들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상하이자동차는 한숨을 돌렸지만 타가즈코리아는 울상을 지었다. 서울중앙지법은 지난해 2월 "유출된 라세티 기술로 만든 신형차 C-100 엔진 등을 생산하거나 양도, 판매해서는 안 된다"면서 "사무소와 공장 등에 보관된 제품도 폐기하라"고 판결했다.

한국은 산업스파이 천국으로 손꼽힌다. 삼성전자와 LG전자는 전기ㆍ전자, 정보통신 분야에서 세계 최고 기술을 갖고 있고, 현대자동차와 현대중공업은 자동차와 조선 분야에서 상용화된 첨단 기술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경제 성장이 눈부신 중국은 한국을 비롯해 미국, 일본, 호주 등에서 첨단 기술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기술 격차가 2~2년 정도라면 산업스파이를 통해 쉽게 극복할 수 있다.

최근 적발된 산업스파이를 살펴보면 중국 기업이 눈에 띈다.

중국 기업은 전자ㆍ조선ㆍ자동차ㆍ철강ㆍ원자력 등 전 업종에 걸쳐 한국 첨단 기술을 빼돌리고 있다. 아몰레드 기술 유출 사건과 하이브리드 자동차 기술 유출 사건이 대표적인 예. 액화천연가스(LNG) 선박 기술을 빼돌리던 중국인 기술자가 경찰에 붙잡힌 적도 있었다. 나름대로 보안이 철저한 대기업도 이런 식으로 당하는데 중소기업은 산업스파이에게 속수무책인 경우가 많다.

중국 산업스파이는 미국에서도 활발하게 활동한다. 미국 연방수사국(FBI) 고위 관계자는 "미국과 맞설 군사력을 키우려고 노력하는 중국은 군사 관련 정보를 기꺼이 훔친다"고 말한 적 있다. 중국은 여러 사람을 이용해 작은 정보를 수집한 다음에 종합하는 능력이 빼어나다는 평가를 받는다. 지난해 중국이 차세대 스텔스전투기 젠20을 공개하자 미국 전투기 F-22와 닮았다는 소문이 돌았다. 중국이 고용한 산업스파이가 미국 중앙정보국(CIA)에 지원하다 적발된 사건도 있다.

산업스파이로 변신한 직원은 자신을 범죄자로 여기지 않는 경향이 있다. 느슨한 처벌 기준과 형량도 문제다. 산업 정보를 빼돌려도 형량이 낮고 국책연구소나 대학에선 처벌 근거를 찾기조차 어렵다. 이런 까닭에 산업스파이에 대한 처벌을 강화해야 한다는 의견이 많아졌다. 미국은 1996년 첨단 기술 유출을 막고자 경제스파이법을 만들어 산업스파이를 엄격하게 처벌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오래 전부터 새로운 기술을 개발할 때 3불 정책을 실시했다. 복사와 인쇄를 금지하고 연구원 컴퓨터는 개인에게 지급된 스마트카드로만 작동된다. 삼성전자는 2010년 당시 최지성 사장(현 미래전략실장)이 임직원에게 "보안은 생사를 결정짓는 핵심요소다"고 강조했지만 반도체 기술 유출 사건에 이어 냉장고 기술과 아몰레드 기술 유출이 끊이질 않고 있다.

아몰레드 기술 유출 사건처럼 제아무리 보안에 신경을 써도 훔치기가 막기보다 훨씬쉽다. 첨단 기술 유출은 기업과 국가 경쟁력을 떨어트리는 반국가 범죄다. 우선 기업이 보안에 신경을 써야겠지만 정부도 국가 안보 차원에서 다뤄야 한다.

■ 냉전시대 소련 KGB에 맞서기 위해 美 CIA 초능력 스파이 양성하기도
세계 정보기관 첩보전
세계 각국 정보기관은 치열하게 첩보 전쟁을 벌이고 있다.

미국 중앙정보국(CIA)과 국가안전보장국(NSA)은 1970년대까지 소련 국가보안위원회(KGB)와 군사 관련 첩보와 정보를 수집하느라 혈안이었다. 동양과 서양을 잇는 터키 이스탄불은 스파이의 도시였다. 미국과 소련은 물론이고 영국 군사정보부 제6부대(MI 6)와 이스라엘 비밀정보기관 모사드 요원까지 종횡무진 이스탄불을 누볐다.

소련 KGB가 초능력을 활용한다는 소식이 1972년 전해지자 미국 CIA는 초능력을 지닌 스파이를 양성했다. 원격 투시 능력을 가졌다고 알려진 잉고 스완은 미국을 위해 초능력을 사용했다. 스완은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독일이 통일한다는 사실을 2년 전에 예견했다고 전해진다.

군사 분야에서 치열하게 벌어졌던 첩보 전쟁은 1991년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되면서 시들해졌다. 냉전 시대가 끝나자 각국 정보기관은 체제 수호가 아닌 국가 경쟁력 확보를 위한 산업기술 확보 및 보호에 앞장섰다. 각국 간첩은 냉전 시대가 끝나자 활동 무대를 첨단 산업 기술이 있는 곳으로 옮기고 있다.

휴대전화와 반도체, 조선 분야에서 최첨단 기술을 가진 한국은 실리콘밸리가 있는 미국 캘리포니아주와 함께 산업 스파이가 눈독을 들이는 곳이다. 국가정보원(국정원)은 첨단 기술 유출에 따른 국부 손실을 막고자 산업 스파이를 색출하는데 집중하고 있다. 국정원은 1996년 방첩 업무에 산업보안을 추가했고, 2003년엔 산업보호를 맡은 조직을 산업기밀보호센터로 격상했다.

산업 스파이가 가장 많다는 평가를 받는 중국은 정보기관인 국가안전부가 앞장서 산업 스파이를 색출한다. 그러나 국가안전부는 산업 스파이를 색출하기는커녕 수출 금지 품목이나 기술을 직접 수집할 정도로 국익을 위해선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는다.



이상준기자 ju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