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자 단체들이 날린 대북전단을 둘러싸고 남ㆍ북한의 신경전이 계속 되고 있다. 사진은 10월 22일 대북전단을 뿌리는 북한민주화추진연합회 회원.
1990년대 초반 남한산성으로 소풍을 갔다가 나무에 걸린 빨간 종잇조각을 우연히 발견한 적이 있었다. 교과서에서만 보던 고 김일성 전 북한 주석의 모습과 인공기가 조악한 화풍으로 그려져 있던 종잇조각에는 "위대하신 김일성 수령 동지 만세", "발전하는 북조선의 모습을 보라" 등의 내용이 담겨있었다. 떨리는 마음으로 집에까지 가져간 종잇조각을 한참 동안 보던 아버지는 피식 웃으시며 "삐라가 아직까지 남아 있었네. 어렸을 때 학용품 받으려고 열심히 주우러 다녔었는데"라고 혼잣말을 하셨다.

전쟁을 직접적으로 경험하지는 않았지만 나름의 반공교육을 받았던 지금의 30~40대에게 삐라는 친숙한 추억으로 남아있다. 마치 아폴로, 밭두렁 같은 옛 불량식품들처럼 관련 추억 하나쯤은 가지고 있지만 별로 중요한 기억으로 남아있지는 않은 그 정도가 지금 우리들 머릿속 삐라의 위치인 것이다.

사람들의 기억속에서 점차 사라져가던 삐라가 요즘 들어 대북전단이라는 이름으로 언론지면을 달구고 있다. 탈북자단체들의 대북전단 살포 계획에 자극받은 북한이 군사적 타격을 경고하고 대한민국 또한 이에 강력히 대응하기로 결정하면서부터다.

무력충돌 위험까지

"임진각과 그 주변에서 사소한 삐라 살포 움직임이 포착되는 즉시 서부전선의 경고 없는 무자비한 군사적 타격이 실행될 것이다."

북한 인민군 서부전선사령부(이하 사령부)가 19일 보낸 '공개통고장'에 담긴 내용이다. 조선중앙통신을 통해 공개된 해당 문서에서 사령부는 "삐라 살포는 가장 노골적인 심리전이며 그것은 곧 정전협정에 대한 파기행위이고 우리에 대한 용납할 수 없는 전쟁도발"이라며 "지금 이 시각부터 괴뢰들의 삐라살포지점으로 공개된 파주시 임진각과 그 주변은 우리 군대의 직접적인 조준격파사격 대상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실제로 북한군은 서부전선 최전방 포병부대의 자주포와 견인포를 사격진지까지 전진배치, 포구를 열어놓는 등 긴장감을 조성했다.

사령부의 공개통고장에 대해 김관진 국방장관은 국방위원회 국정감사를 통해 "북한이 임진각을 타격하는 등 위협을 실제로 한다면 도발 원점을 타격해 완벽하게 응징할 것"이라며 "북한의 도발에 대한 응징 태세는 완벽히 갖추고 있다"고 대응했다. 앞서 이명박 대통령 또한 19일 연평도의 군부대를 방문한 자리에서 "북한의 도발이 있을 시 백배 천배 보복을 한다는 정신을 갖고 있으면 북한이 도발 못 한다"며 강력 대응의지를 밝혔다.

자칫하면 무력충돌로까지 치달을 수 있었던 남북의 이번 신경전은 탈북자단체들이 밝힌 대북전단 살포 계획 때문에 일어났다. 탈북자단체 연합체인 북한민주화추진연합회(이하 북민연)는 22일 오전 10시 30분 경기도 파주시 임진각에서 북한 3대 세습 반대 등의 내용이 담긴 전단을 대형 풍선 10개에 매달아 북쪽으로 날리고 지난 10일 제주에서 시작한 국토대행진 해단식을 열 예정이었다.

북민연 관계자 80여 명은 22일 오전 10시 임진각 인근에 도착했다. 그러나 대북전단 살포를 불허한다는 방침을 정하고 진입로를 통제한 경찰의 제지로 대북전단을 날려보내지 못했다. 이에 김성민 북민연 대표는 "대북전단 살포는 북한 주민과의 약속이기 때문에 오늘 중으로 무조건 감행할 것"이라며 전단 살포 강행을 예고했고 실제로 이날 오후 6시 인천시 강화군 소재 강화역사박물관 앞에서 대북전단 12만장을 뿌렸다.

내용, 파급력 커 북한에 부담

경찰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결국 대북전단이 살포된 것에 대해 북한 측에서는 강하게 반발하고 나왔다. 북민연이 대북전단을 날려보낸 직후 북한의 대남선전용 웹사이트 '우리민족끼리'는 대북전단 살포를 남한 정부의 계획적인 도발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우리민족끼리'는 23일 '새로운 북풍 조작을 노린 호전적 객기'라는 논평을 통해 "북한민주화추진연합회를 비롯한 어중이떠중이들을 내몰아 감행하려는 반공화국 삐라살포 놀음은 결국 충격적인 사건을 도발해 '북풍' 조작에 써먹으려는 보수 당국에 의해 직접 고안됐다"고 주장했다. 이어 "괴뢰군부 호전광들의 주도 밑에 벌어지는 계획적인 반공화국 도발이라는 것을 더욱 명백히 알 수 있다"며 "북한의 '최고 존엄'과 체제를 건드리는 행위를 묵과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지금까지 탈북자단체들의 대북전단 살포가 지속돼왔음에도 북한 측에서 이렇게 강한 반응을 보이는 것은 왜일까? 대북전문가들은 대북전단이 북한 체제의 근간을 부정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데다 파급력 또한 강력하기 때문으로 분석하고 있다.

북민연 측에 따르면 이번에 날려보낸 대북전단에는 ▲김일성-김정일-김정은으로 이어지는 3대세습이 우상화에 불과하다는 내용 ▲한국전쟁이 김일성에 의한 남침으로 시작됐다는 내용 ▲남한의 군사ㆍ경제력이 이미 북한을 압도하고 있다는 내용 ▲중동ㆍ북아프리카의 독재 정권들은 민중 봉기로 인해 이미 붕괴됐다는 내용 등이 담겨있었다. 주민들에게 자주 노출될 경우 북한 입장에서는 큰 부담을 지닐 수밖에 없는 내용들이다.

대형 풍선을 이용한 대북전단이 지니는 파급력도 북한에는 부담이다. 레이더에 걸리지도 않고 별다른 동력 또한 필요치 않은 대형 풍선들이 주요 대도시 상공까지 도달, 대북전단을 뿌릴 경우 주민들이 이를 주워 읽는 것을 막을 뾰족한 수단이 없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탈북자단체들은 대북전단과 함께 가정상비약, 볼펜, 라이터 등의 생필품과 미국 달러, 중국 인민폐 등 화폐를 함께 담아 북한주민들의 관심을 끌 수 있도록 하고 있다.

통일부 자금 활용됐나?

이번에 대북전단을 날려보낸 북한민주화추진연합회(북민연)는 여러 탈북자단체들이 모여지난 11일 결성한 연합체 성격의 단체다. 참여단체로는 북한민주화운동본부, 북한전략센터, 북한인민해방전선, 자유북한운동연합, 자유북한방송, 탈북여성인권연대, 세계탈북인총연합회, 탈북난민인권연합, 탈북민자립센터, 탈북인총연합회, 탈북청년연합 등이 있다.

당초 탈북자단체의 연합체로는 고 황장엽 전 북한노동당 비서가 이끌던 북한민주화위원회(이하 북민위)가 있었다. 그러나 황 전 비서가 사망한 뒤 탈북자단체들 사이에서 북민위의 성격규정을 둘러싼 갈등이 발생했고 그 결과 일부 단체들이 이탈, 북민연을 새롭게 결성했다. 북민연 발족 당시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가 축하메시지를 보내 눈길을 끌기도 했다.

자유북한운동연합, 북한민주화운동본부 등 비교적 활동이 활발한 단체들의 경우 북민연에 소속되기 이전부터 독자적으로 대북전단 살포를 해왔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동안 연평균 1,000만장의 전단을 북한에 살포했던 해당 단체 관계자들은 대북전단 살포 자금은 회원들의 갹출과 미국의 대북인권 관계단체의 지원 등으로 충당돼왔다고 전했다.

그러나 이번에 대북전단 살포 논란이 불거지며 통일부의 자금이 흘러들어 간 것이 아니냐는 얘기도 나오고 있다. 정청래 홍익표 민주통합당 의원은 24일 열린 통일부 국정감사에서 지난해와 올해 통일부가 '민간 통일운동단체 지원 공모사업'을 통해 북민연 소속이거나 관련된 단체들에 1,000만원~4,000만원씩을 지원했다고 밝혔다.

해당 자료에는 북민연 소속인 북한민주화운동본부와 평화통일탈북인연합회가 각각 1,000만원씩을, 북한민주화네트워크와 세계북한연구센터는 각각 4,000만원, 2,000만원을 지원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북한민주화네트워크와 세계북한연구센터는 북민연 소속 단체인 북한전략센터와 세계탈북인총연합회의 대표가 이사와 대표로 참여하고 있다.

정 의원의 지적에 대해 통일부 측은 "등록된 법인을 위주로 사업단위별로 사업성 및 파급효과 등을 검토해 지원하고 있다"며 "대북전단 발송 경비를 지원하지는 않았다"고 해명했다.

현행법상 규제 불가능

통일부 해명대로 설사 자금이 지원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대북전단 살포의 위험성에 대해 일말의 책임은 피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일 년에도 수십 차례 대북전단이 살포돼왔지만 통일부로서는 이에 대해 자제 권고 이상의 조치를 취하지 않았던 까닭이다. 이는 법적 규제 근거의 미비와도 관련이 있다.

이번에 벌어진 탈북자단체들의 대북전단 살포로 남북 간 무력충돌의 위험까지 발생했지만 해당 행위를 규제할 만한 뚜렷한 법적 근거는 아직 없는 상황이다.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민간단체들의 대북전단 살포가 원칙적으로 '표현의 자유'로 보호받는 까닭이다.

한때 정부 차원에서 법적 규제를 검토했던 적은 있다. 2008년 정부는 대북전단 살포에 대해 '고압가스안전관리법'으로 규제할 수 있는지를 놓고 법률검토작업을 벌였지만 결국 규제근거로 삼지는 못했다. 또한 같은 해에 전단 살포시 사전 신고를 의무화하는 내용을 담은 남북교류협력법 개정안이 국회에서 논의된 적도 있지만 이 또한 '표현의 자유를 침해할 수 없다'는 명목으로 여야 합의 하에 폐기된 바 있다.

앞으로도 정부가 직접 규제에 나서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대북전문가들은 "중장기적으로 볼 때 국회 차원의 입법을 통해 규제할 필요성은 있다"면서도 "표현의 자유 침해 논란, 남남갈등 등의 문제가 있는 상황이라 정부로서도 부담을 지니고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대형풍선에 'GPS' 달아 평양까지 보낸다

대북전단을 임진각에서 날리면 과연 북한 어디까지 도달할 수 있을까? 박상학 자유북한운동연합 대표, 이민복 기독북한인연합 대표 등 그동안 수없이 대북전단 살포를 해왔던 이들에 의하면 대다수는 휴전선 인근 비무장지대에 떨어지고 그 외의 전단들도 사실상 황해도와 강원도를 넘기 어려운 것으로 알려졌다. 평양, 개성 등 대북전단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주요 도시까지 도달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에 탈북자단체들은 대북전단을 효과적으로 날리기 위해 끊임없는 기술혁신을 시도하고 있다. 요즘 가장 많이 쓰이는 방법은 비닐하우스용으로 주로 쓰이는 두꺼운 비닐에 수소를 넣은 12~15m 크기의 대형 풍선을 이용하는 것이다. 대형 풍선 하나당 약 3만개의 전단 뭉치 3묶음을 매달 수 있어 적은 노력을 들이고도 많은 양을 살포할 수 있다.

효과적인 대북전단 살포를 위해 화공약품을 매듭 끈이나 철사에 발라 일정 시간이 지나면 끊어지게 하는 방법을 이용한다. 약품의 농도에 따라 각각의 전단 뭉치가 분리되는 시간이 다른 것을 이용 여러 지역에 대북전단을 살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형 풍선이 이론상으로는 1시간 뒤에 비무장지대, 3시간 뒤에 황해도, 5시간 뒤에는 평양 인근을 거치게 되는데 해당 시간 별로 전단 뭉치를 분리할 수 있도록 세심한 작업을 하고 있다. 대북전단은 일반적인 종이재질이 아닌 비닐소재를 이용해 제작한다. 뭉텅이째 떨어지기 쉬운 종이와 달리 비닐소재의 대북전단은 낱장 별로 흩날리기 쉬운 까닭이다. 또한 선풍기 타이머를 바탕으로 만든 시한장치, 위성위치측정시스템(GPS) 등을 장착하기도 한다.

● 대북전단은 언제부터 생겼나
6.25때 본격적으로… 미국, 휴전까지 25억장 뿌려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대북전단이 국내에 등장한 것은 언제부터일까?

우리나라에 '삐라'라는 이름으로 전단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해방 직후부터지만 실질적으로 대남ㆍ북전단의 이름을 갖기 시작한 것은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부터다. 전쟁 초기 전단을 가장 많이 활용했던 것은 미국이었다. 제1,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선전전의 중요성을 절감한 미국은 '제1방송ㆍ삐라부대'를 조직하는 등 전단 살포에 열심이었다. 비행기를 통해 대량 살포하는 방법을 썼던 미국은 휴전까지 약 25억장의 전단을 살포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쟁 이후 미국을 대신해 남한 정부가 직접 북쪽에 전단을 보내기 시작했고 이는 북한도 마찬가지였다.

원칙대로라면 90년대부터 남북은 서로에게 전단을 보낼 수 없다. 남북 고위급이 1992년 함께 작성한 '남북 화해 부속합의서'에서 "남과 북은 언론ㆍ삐라 및 그 밖의 다른 수단과 방법을 통해 상대방을 비방ㆍ중상하지 않는다"고 규정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북의 정부는 이 조항을 전혀 준수하지 않았고 하던 대로 서로에게 전단을 대량 살포했다.

정부 차원의 전단 살포가 사실상 중단된 것에는 2000년 6.15남북정상회담의 영향이 컸다. 화해무드가 지속적으로 조성되던 2004년 6월 개최된 제2차 장성급 군사회담에서 양측은 상호 비방과 선전활동을 중지하기로 공식합의하게 된다.

남북 정부가 서로에게 전단을 보내는 것을 중단하자 탈북자단체, 보수기독교단체 등 민간단체에서 나섰다. 정치범 수용소 출신들로 구성된 북한민주화운동본부가 2003년 처음으로 대북전단을 자체 제작ㆍ살포한 것에 이어 수많은 단체들이 연간 수억장의 대북전단을 날려보내고 있다.



김현준기자 realpeac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