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신자가 해군총사령관이라니 말도 안 돼!"

영국 의회는 강경했다. 탄핵의 대상은 왕자였다. 제임스 2세(1633~1701년)는 왕자 시절 가톨릭 신자라는 이유로 곤욕을 치렀다. 의회는 국교회 신자가 아니면 관리가 될 수 없다고 규정한 심사율(審査律)을 내세워 왕자를 몰아붙였다. 결국 왕자는 1673년 해군총사령관에서 물러났다.

왕자와 의회의 악연은 오래전부터 시작했다. 청교도혁명 당시 유폐된 왕자는 프랑스로 달아났다가 왕정이 복고되자 영국에 돌아갔다. 왕자는 1671년 프랑스에서 가톨릭 신자가 됐다. 기득권을 가진 국교회의 눈엔 이교도인 왕자가 곱게 보일 리가 없었다. 신앙 문제로 왕위 계승권을 박탈하자는 법안이 의회에 제출될 정도였다.

찰스 2세가 1685년 사망하자 전세는 역전된다. 찰스 2세의 동생인 제임스 2세는 왕이 되자 왕권을 강화하고 신앙의 자유를 선언했다. 가톨릭을 부활하겠다는 왕의 뜻에 국교회 주교 7인이 반발하자 왕은 이들을 옥에 가뒀다. 게다가 자신의 발목을 잡았던 심사율을 무시한 채 가톨릭 신자를 관리로 등용했다.

원성이 쏟아졌지만 국교회와 의회는 참았다. 제임스 2세에겐 아들이 없었는데 큰딸인 메리가 국교회 신자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1688년 6월 5일 왕자가 태어나자 의회가 발칵 뒤집혔다. 왕자가 왕위를 계승하면 국교회와 의회의 앞날은 뻔했다. 의회를 양분했던 토리당과 휘그당은 메리 공주와 그의 남편인 네덜란드 총독 윌리엄 공작에게 반역을 부탁하는 편지를 썼다.

윌리엄 총독은 11월 5일 군대를 이끌고 영국에 상륙했다. 제임스 2세가 반란군을 진압하라고 보낸 처칠은 왕을 배신했고, 왕의 둘째 딸 앤 공주와 귀족들도 반란군에 가세했다. 결국 제임스 2세는 다시 한 번 프랑스로 도망갔고, 윌리엄 총독 부부는 공동 왕위에 올랐다. 의회는 새로운 왕에게서 권리선언을 제출해 승인을 받았다.

유혈 사태가 없었기에 윌리엄 총독에 의한 정권 교체는 명예혁명이라고 부른다. 영국 의회는 권리선언을 토대로 1689년 권리장전(신하와 백성의 권리와 자유를 선언하고 왕위 계승을 정하는 법률)을 제출해 승인을 받았다. 명예혁명은 왕과 의회의 권력 다툼에 마침표를 찍었고, 권리장전을 획득한 의회는 입헌군주제를 확립했다.



이상준기자 ju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