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로기준법 준수하라" 아직도 생생한 그 외침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의 한장면
세상은 불공평했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게 죄였다. 죽기 살기로 일해도 입에 풀칠하기 어려웠다. 전태일(1948~1970년)은 1965년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재단사가 됐다. 하루에 14시간 일해서 받은 일당은 고작 차 한잔 가격인 50원. 근로기준법을 알게 된 전태일은 동료 재단사와 바보회를 만들어 노동 조건 개선을 부탁했다. 하지만 노동청과 서울시는 전태일의 진정을 무시했다.

당시 근로기준법은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정부는 노동자를 산업역군이라고 불렀지만 노동운동을 죄악으로 몰아붙였다. 평화시장 여공은 열악한 노동 환경에서 하루 16시간을 일해야만 했다. 당시 유행하던 폐결핵에 걸리면 가차없이 해고되기 일쑤였다. 전태일은 근로기준법을 공부하면서 대통령에게 편지를 썼다. 목숨을 위협하는 근로환경을 개선해달라고 부탁했지만 바뀐 게 없었다.

청년 전태일은 1970년 11월 13일 자신의 몸을 불살랐다. 청계천 6가 구름다리 앞에서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외치며 시위를 벌일 때 전태일은 근로기준법 책을 가슴에 안은 채 분신 자살했다. 근로기준법 책과 함께 몸이 타 들어갈 때 전태일은 "근로기준법을 지켜라"고 외쳤다. 병원에 실려간 전태일은 어머니 이소선 여사에게 "내가 못다 이룬 일을 어머니가 대신 이뤄주세요"라는 유언을 남기고 숨을 거뒀다.

전태일의 죽음은 한국 사회에 큰 충격을 줬다. 서울대 상대 학생들은 무기한 단식 농성을 벌였고, 고려대와 연세대, 이화여대 학생은 시위를 벌였다. 천주교와 개신교는 추모행사를 공동 집전했고, 새문안 교회 대학생부는 전태일의 죽음에 사회가 책임이 있다며 금식 기도회를 개최했다. 신민당 대통령 후보였던 김대중은 1971년 1월 전태일 정신의 구현을 공약으로 발표했다.

노동자를 기계처럼 여기던 시절. 시대를 앞선 선각자 전태일은 살신성인하면서 한국노동운동에 불을 질렀다. 이때부터 지식인은 노동운동에 관심을 가졌고 전태일의 분신은 민주주의를 앞당기는 계기가 됐다.



이상준기자 ju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