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추왕릉지 발굴 현장에서 금관이 발견됐습니다." 발굴단은 1973년 7월 26일 청와대에 보고했다. 제아무리 발굴단이라도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가 없으면 발굴을 진행할 수 없었다. 천마총에서 금관을 발굴하자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떨어졌다. 먹구름이 몰려들더니 천둥번개를 동반한 폭우가 쏟아졌다. 백제 무령왕릉이 발굴된 1971년 7월 7일에도 마찬가지였다. 무령왕릉을 파헤치자 천둥ㆍ번개와 함께 폭우가 몰아쳤다. 단 하루 만에 끝난 무령왕릉 발굴은 세계 고고학 역사상 유래가 없는 졸속 발굴로 손꼽힌다. 박정희 대통령은 무령왕릉에서 발굴한 왕비 금팔찌를 "이게 순금인가"라고 물으면서 구부리기까지 했다.

중국은 왕릉 발굴에 대해 한국과 다른 자세를 취했다. 중국사회과학원 곽말약(郭沫若) 원장은 1960년대 초 주은래(周恩来) 총리를 찾아가 당 고종과 측천무후 무덤(乾陵)을 발굴하자고 건의했다. 이때 주은래 총리는 "10년 안에는 왕릉을 발굴하지 않겠다"면서 "이 일(발굴)을 제대로 해낼 능력이 없으므로 후손이 완성할 수 있게 남겨두자"며 만류했다. 주 총리 덕분에 건릉은 원형을 보존하고 있지만 무령왕릉은 내부 발굴 사진조차 남지 않았다. 무령왕릉 발굴단장이었던 김원룡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은 "이틀 만에 발굴을 끝낸 것은 내 생애 최대의 수치였다"였다고 말했다.

중국 역대 최대 건축물로 손꼽히는 진시황릉 발굴은 1974년 12월 31일에 시작됐다. 그러나 진시황의 무덤은 아직 발굴되지 않았다. 흔히 병마용갱(兵馬俑坑)을 진시황릉으로 착각하곤 한다. 흙으로 빚은 병사와 말, 마차 등이 발굴된 병마용갱은 무덤에 딸린 구덩이란 뜻으로 진시황릉 주위에 200개 이상 존재한다. 중국 당국은 유물을 훼손하지 않고 발굴하기엔 아직 기술과 인력이 충분하지 않다고 판단해 진시황이 묻혔을 걸로 보이는 지하궁전을 보존하고 있다. 무령왕릉과 진시황릉 발굴에서 알 수 있듯 문화재 발굴은 하루라도 늦춰야 한다. 그리고 국가지도자의 판단력도 고고학에도 많은 영향을 끼친다.



이상준기자 ju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