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재계에 '파워우먼 바람' 거세다박근혜 당선인 "여성 기업인 육성"

왼쪽부터 심수옥 삼성전자 부사장, 김혜경 이노션 전무, 이수영 코오롱워터앤에너지 부사장, 채양선 기아차 전무
재계 불어 닥친 ‘여풍(女風)’ 심상찮네

그 동안 재계엔 여성들의 고위직 진출을 가로막는 장벽을 뜻하는 ‘유리천장’이 있었다. 육안으로 볼 순 없었지만 분명히 존재했다. 많은 수의 여성들이 이 벽에 가로막혀 천장 아래 머물러야 했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유리 너머의 세상을 바라보는 게 전부였다.

그러나 이런 세태에 변화가 생기고 있다. 회사의 별이라 불리는 임원에 임명되는가 하면 최초의 여성 최고경영자(CEO)가 탄생하기도 했다. 이런 현상은 2011년부터 본격화 돼 지난해 연말인사까지 이어지고 있다. 유리천장을 깨고 경영 최전선에 나서 능력을 뽐내고 있는 ‘파워우먼’들의 활약상을 담아봤다.

2011년 말부터 본격화

과거 국내 대기업에선 여성임원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이른바 ‘유리천장’ 때문이었다. 그러나 최근 몇 년 사이 유리천장에 금이 가고 있다. 이런 현상이 도드라진 건 2011년 연말인사에서부터다. 당시 여성들이 업계 혹은 사내에서 ‘최초’ 타이틀을 달고 경영 전면에 나선 일이 유독 많았다.

왼쪽부터 은경 GS칼텍스 상무, 홍정란 현대백화점 킨텍스점장, 이영희 삼성전자 부사장, 이정애 LG생활건강 전무
먼저 삼성전자에서 최초의 여성 부사장이 탄생했다. 심수옥 삼성전자 부사장이 그 주인공이다. 외국계기업 P&G 등을 거쳐 2007년 삼성전자로 스카우트된 심 부사장은 최고마케팅경영자(CMO)로서 회사 브랜드 가치 제고에 크게 기여한 점을 높이 평가 받았다.

손해보험업계서도 최초의 여성 부사장이 나왔다. 미국계 손해보험회사 차티스가 김소희 재무총괄 전무를 부사장으로 승진시킨 것이다. 이로 인해 김 부사장은 1954년 차티스가 한국에 진출한 뒤 58년 만에 탄생한 손보업계 첫 여성 부사장 겸 최고재무책임자(CFO)가 됐다.

현대기아차그룹에선 김혜경 이노션 전무가 ‘그룹 내 최초의 여성 전무’라는 타이틀을 달았다. 이노션에서 크리에이티브2센터장, 광고2본부장, 광고1본부장 등을 역임한 김 전무는 칸광고제 등 세계 주요 광고제 심사위원으로 활약하며 문화체육관광부 광고발전 유공자로 선정되기도 했다.

국내 화학섬유업계 역시 최초의 여성 임원을 배출했다. 웅진케미칼 생활소재사업본부장을 맡고 있는 문수정 상무가 그 장본인이다. 화섬업체들이 부가 사업으로 벌이고 있는 패션사업 부문에선 여성 임원이 더러 있었다. 그러나 기업 간 거래(B2B)가 일반적인 정통 화섬사업 부문에서 여성 임원이 나온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농협중앙회에서도 최초의 여성 임원이 등장했다. 2011 연말인사에서 승진한 우명자 부산지역본부 금융사업부 본부장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직후 농협에 입사해 금융창구 업무를 시작으로 33년간 경제, 여성복지, 홍보부문까지 두루 맡으면서 능력을 입증한 인물이다.

왼쪽부터 고유미 경정 김양숙 서울역장, 김희영 박사
한국타이어의 경우 창사 이래 최초로 여성 임원인 김현경 상무를 영입했다. 제일기획에서 주로 삼성그룹 및 삼성전자 해외홍보 업무를 담당하며, 해외 미디어 관리, 위기 대응 전략에 대한 전문 역량을 쌓아온 커뮤니케이션 전문가다.

최근 인사서도 ‘여풍당당’

재계는 남녀 차별의 벽을 허무는 유리천장 깨기가 본격화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런 현상은 지난해 연말 인사에서도 이어졌다. 이 때 역시 주요 기업들의 임원 인사 발표의 화두는 ‘여성 중용’이었다. 기업들마다 ‘최초’라는 수식어를 달고 여성 중용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우선 강선희 SK이노베이션은 전무가 부사장으로 승진했다. SK그룹을 통틀어 사상 최초의 여성 CEO다. 강 부사장은 서울지방법원 판사 등을 거친 율사 출신으로 노무현 정부 시절엔 첫 여성 청와대 행정관을 지내기도 했다. 2004년 입사 후 지속경영, 윤리경영부문 책임자로 일해왔으며 최태원 SK그룹 회장의 비공식 법률자문역도 겸하고 있다.

코오롱에서도 첫 여성 CEO가 탄생했다. 화제의 인물은 이수영 코오롱워터앤에너지 공동대표이사 부사장이다. 이 부사장은 1994년 삼성에서 근무하다 1999년 미국 노스웨스턴 대학에서 MBA를 딴 뒤 2003년 코오롱에 차장으로 입사했다. 이후 능력을 인정받아 초고속 승진을 거듭하며 10년 만에 CEO 직함을 달았다.

현대기아차그룹에선 차량부문 첫 여성 전무가 나왔다. 기아차 마케팅사업부장을 맡고 있는 채양선 상무는 2년 동안 참신한 브랜드 커뮤니케이션 전략으로 기아차가 사상 최초 글로벌 브랜드 톱100에 진입하는 성과를 내 전무로 승진했다. 앞서 지난해 8월엔 현대차 마케팅전략실장에 최명화 상무를 지난해 영입하기도 했다.

GS그룹은 손은경 GS칼텍스 마케팅개발실장이 상무로 승진해 그룹 내 최초의 여성 임원이 됐다. 손 상무는 10여년 간 외국계 회사에서 마케팅 업무를 담당하다가 2006년 GS칼텍스에 영입됐다. 여성 임원이 드문 정유 업계에서 이뤄진 인사라서 남다른 의미가 있다.

백화점업계의 경우 최초의 여성 점장이 배출됐다. 그 장본인인 홍정란 현대백화점 킨텍스점장은 1988년 현대백화점에 입사해 신촌점 식품팀장을 거쳐 2013년도 정기인사를 통해 킨텍스점장으로 선임됐다. 홍 점장은 25년간 식품분야를 맡아온 전문가로, 고객의 요구사항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능력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기업은행에서는 창립 50년 만에 공채 출신 첫 여성 부행장이 탄생했다. 주인공인 권선주 리스크관리본부 부행장은 공채로 입사해 지점장, 센터장, 본부장을 거쳐 부행장 자리에 올랐다. 공채 출신의 여성이 부행장에 오른 건 은행권 전체를 통틀어 권 부행장이 유일하다.

‘처음’ 타이틀이 아니더라도 여성들의 유리 밖 진출은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다. 먼저 삼성전자에선 지난해에 이어 두 번째 여성 부사장이 탄생했다. 이영희 전무가 부사장으로 승진한 것이다. 이 부사장은 외국계 기업인 로레알에서 근무하다 2007년 삼성전자로 자리를 옮긴 케이스다. 지난해 갤럭시S 시리즈를 성공적으로 시장에 출시한 공을 인정받았다.

다소 보수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LG그룹도 여성 인력을 중용하고 있다. 이정애 LG생활건강 상무가 전무로 승진하면서 최초 공채출신 여성 전무가 됐고, 김희선 LG생활건강 상무, 백영란 LG유플러스 상무도 각각 임원 배지를 달았다. 2011년 단 1명의 여성 임원이 선임된 것과 비교해 파격 인사란 평이다.

이밖에 한진그룹에선 조모란 부장이 상무보로 승진하면서 오너가를 제외한 최연소(44세) 임원이 됐고, 한화그룹도 제일기획 출신의 박지영 상무를 그룹 경영기획실 마케팅 담당 임원으로, 한국투자증권 출신의 박미경 상무는 한화증권 PB본부 본부장으로, 동양증권 출신의 최선희 상무는 한화증권 프로덕트본부 본부장으로 각각 영입했다.

물론 일부를 제외한 나머지 기업들은 이제 막 여성 임원을 배출하기 시작한 단계다. 그러나 이제 물꼬가 트인 만큼 머지않아 ‘여풍’이 본격화 될 것이라는 시각이 많다. 한 재계 관계자는 “여성 사회 진출이 활발해지기 시작한 건 1990년대 중반에서 후반 사이”라며 “임원에 오르기까지 20년 정도가 걸린다는 점을 감안하면 수년 내에 고위직에도 여성 진출이 활발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여풍 더욱 거세질 전망

그렇다면 최근 재계에서 여성들이 각광을 받는 까닭은 뭘까. 전문가들은 지적ㆍ감성적ㆍ미적 능력이 뛰어난 여성 특유의 경영성과가 빛을 발하기 때문이라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실제, 의사결정에 있어 남성기업은 분석적이고 개발을 중시하는 논리적 사고 방식이 강하다. 반면, 여성기업은 수평적 의사결정 방식으로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고 의사결정의 질을 높이는 가치 지향적인 직관적 사고 방식을 중시한다. 또 사업의 외향적 성장에 치중하는 남성과는 달리 여성기업가들은 질적 성장, 근로자의 기술향상과 후생복지를 중시한다.

이러한 여성특유의 섬세하고 치밀한 성품으로 원만한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여성경제인들은 다품종 소량생산의 현시대의 생산방식에 유리한 경영능력을 가지는 것으로 평가된다. 감성경영을 중요시하는 현대경영관리측면에서 볼 때 남성 기업가에 비해 매우 유리한 면이라는 분석이다.

특히 기업 윤리를 강조하는 추세도 여성기업인에겐 이점으로 작용하고 있다. 한국 기업도 이제는 과거처럼 정경 유착이나 뇌물수수 등 각종 불법을 통해 성장하는 때가 지나갔음을 인식하고 있다. 기업과 기업인에 대한 불신을 키워온 남성 중심의 부패한 경영방식을 척결하는 의미에서도 도덕성에서 상대적으로 우위에 선 여성기업인의 역할이 부각된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이런 이유로 재계에서 여성들이 차지하는 비중은 날로 높아지고 있다. 자연스레 남성들의 입지는 좁아질 수밖에 없다. 이런 가운데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이 공약을 통해 여성 기업인을 키우겠다는 뜻을 확고히 했다. 남성들을 한층 긴장하게 만드는 대목이다.

해당 공약에는 여성 관리자 비율이 높은 기업에 정부 조달 계약 시 혜택을 주고, 공공기관에 여성관리자 목표제를 도입해 평가지표에 반영하는 내용이 담겼다. 여성 인재 아카데미 설립, 여성 교수·교장 채용 쿼터제 도입 등도 포함됐다.

여기에 여야 국회의원들도 공기업, 준정부기관 등 공공부문의 여성 임원 비율부터 5년 내 30%까지 높일 수 있도록 법 제정을 추진 중이다. 이 법이 통과될 경우 기업들도 자율적으로 여성 임원을 늘리기 위한 노력을 기울일 것으로 보인다.

한 재계 관계자는 “그러잖아도 재계에 여성들이 두각을 드러내고 있는 상황에서 정부의 정책이 더해지면서 여풍은 더욱 거세질 것”이라며 “남녀를 불문한 경쟁의 시대가 오게 될 것”으로 내다봤다.

한편 현대중공업·STX·LS·하이닉스·대우조선해양ㆍ대림ㆍ부영ㆍ대우건설ㆍKCCㆍ동국제강 등은 아직 여성 임원이 한 명도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확인됐다. 이들 기업은 모두 조선·건설(또는 건설자재)·중공업·철강 등 생산재를 만드는 제조업체들로 여성들이 선호하지 않는 업종들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30대 기업 여성임원 현황

순위 기업 전체임원 여성임원 비율(%)

1 삼성전자 996 15 1.5

2 현대차 212 1 0.5

3 포스코 66 1 1.5

4 S-Oil 51 0 0

5 기아차 162 1 0.6

6 LG전자 282 2 0.7

7 LG디스플레이 98 1 1

8 SK네트웍스 68 4 5.9

9 현대중공업 201 0 0

10 LG화학 83 1 1.2

11 KT 115 8 7

12 대우인터내셔널 39 0 0

13 삼성물산 196 0 0

14 현대모비스 91 0 0

15 롯데쇼핑 128 2 1.6

16 현대제철 97 0 0

17 삼성중공업 80 0 0

18 대우조선해양 63 0 0

19 SK텔레콤 80 1 1.3

20 대한항공 115 6 5.2

21 이마트 25 1 4

22 LG유플러스 60 2 3.3

23 SK하이닉스 53 0 0

24 한진해운 46 1 2.2

25 삼성엔지니어링 104 0 0

26 현대건설 139 0 0

27 효성 208 3 1.4

28 현대글로비스 25 0 0

29 기업은행 16 1 6.3

30 롯데케미칼 42 0 0

각계 각층에 ‘최초’ 타이틀 쥔 여성 행렬 이어져

첫 여성 함장ㆍ역장ㆍ농학박사

여성들이 두각을 드러내고 있는 건 비단 재계만이 아니다. 각계 각층에서 ‘최초’라는 타이틀을 단 여성들의 활약상이 이어지고 있다.

최초의 여성 해경 함장이 된 고유미 경정이 그 대표적인 예다. 해경청 홍보2팀장으로 근무 중이던 고 경정은 지난달 27일부터 동해해양경찰서 소속 1513함장을 맡아 최초의 여성함장 타이틀을 달고 임무를 시작했다. 1513함은 독도 경비를 담당하는 1,500t급 경비함이다.

고 경정의 ‘첫 여성’ 타이틀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03년엔 여경으로 ‘첫 경비함 근무’를 시작했다. 당시 경비함에는 여경이 근무하지 않아 화장실과 샤워실을 갖춘 별도의 침실이 등장하기도 했다.

물론 사회적 편견도 적지 않았다. 특히 “여자가 배를 어떻게 타느냐”, “얼마 버티지 않아 스스로 그만둘 것”이라는 말들이 많았다. 그러나 고 경정은 여성 특유의 섬세함으로 항해ㆍ갑판ㆍ병기ㆍ구난 업무 등 함정 운영을 꼼꼼히 처리해 그 능력을 인정받았다.

지난해 11월에는 112년만의 첫 여성 서울역장이 탄생하기도 했다. 그 장본인 김양숙 역장은 고졸 9급 공채로 출발해 25년 만에 1급인 서울역장 자리에 올랐다. 그는 서대전역장, 전략기획실 평가팀장, 노경지원처장, 문화홍보처장 등을 두루 거쳤다.

코레일은 업무 특성상 여직원이 매우 적다. 그러나 김 역장은 특정부서를 피하거나, 남녀의 일을 구분해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한다. 성별과 무관하게 그 동안 자신의 일을 충실히 해 왔고, 앞으로도 서울역장으로서 최선을 다하겠다는 입장이다.

또 공주시농업기술센터에서는 김희영 지방농촌지도사가 여성으로선 처음으로 농학박사가 됐다. 1990년 공직에 첫 발을 딛은 김 지도사는 열정적인 업무 추진으로 농촌 삶의 질 향상을 위해 노력해 왔으며, 배움에 대한 끊임없는 노력으로 1월에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김 지도사의 박사학위 논문은 ‘마을 공동정원 조성과 원예활동이 농촌 주민의 삶의 질에 미치는 영향’이라는 주제로, 마을 공동정원 조성과 원예활동이 농촌 마을 주민의 자아 존중감, 생활 만족도 향상, 신체ㆍ심리적 스트레스 해소 등에 효과가 있음을 규명했다.



송응철기자 sec@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