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조직개편안 처리 지연에… 대국민 담화카드로 정면돌파국무회의도 취소하며 野 압박민주당 연일 비판 공세… "박, 밀어붙이기 득보다 실"정치권 우려 목소리

박근혜 대통령이 4일 청와대 춘추관에서 정부조직법 개정안 표류와 관련 대국민 담화를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4일 정부조직 개편안 처리 지연으로 마비된 정국의 정면돌파를 위해 '대국민담화'라는 카드를 선택했다. 역대 대통령 중 취임한 지 일주일 만에 특정 사안을 놓고 대국민담화를 발표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물론 여야 협상이 표류하면서 국정 차질이 장기화할 조짐을 보이자 국민에게 직접 호소하는 방식을 택한 상황은 이해할만하다. 하지만 새 정부 출범 벽두부터 대통령으로서는 '전가의 보도' 같은 대국민 담화를 바로 꺼내든 것이 옳은 선택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때문에 논란의 소지가 있는 결정을 박 대통령이 직접 내리고 실행에 옮겼다는 점에서 향후 5년간 박 대통령이 그려갈 대야(對野) 관계의 일단이 보이는 듯하다. 특히 결기까지 느껴진 박 대통령의 담화 발표 모습이 이 같은 관측을 더욱 뒷받침한다.

짙은 초록색 재킷과 회색 바지 차림으로 청와대 기자회견장에 들어선 박 대통령은 입장하자마자 오른손에 들고 있던 원고를 10분간 쉬지 않고 읽어 내려갔다. 시종일관 절박함과 단호함이 묻어난 목소리를 유지했다.

박 대통령은 담화에서 정부조직개편안 처리가 일주일 가량 늦어지고 있는 상황을 "헌정 사상 초유의 일"이라고 표현했다. 또 "인재들을 더 이상 좌절시키지 말아야 한다" "어떠한 정치적 사심도 담겨 있지 않다"고 강조할 때는 주먹을 불끈 쥐기도 하면서 더욱 굳은 어조로 이야기했다.

민주통합당 문희상 비상대책위원장이 5일 국회에서 열린 의원총회에서 전날 박근혜 대통령의 대국민 담화 발표와 관련해 "국민을 볼모로 입법권을 무시하고 야당을 협박한 것"이라며 정면 비판하고 있다. 연합뉴스
그러면서 야당을 공박하기도 했다. 박 대통령은 "대통령이나 정치권 어느 누구도 국민들에게 피해를 줄 수 없는 것"이라며 "국민의 삶을 편안하게 해 드리는 것이야말로 정치가 존재하는 이유이자 최고의 가치"라고 말했다. 국민에게 피해가 돌아가고, 국민의 삶을 편안하게 만들고 있지 못하는 지금의 상황이 야당의 책임이란 것을 에둘러 강조한 것이다.

박 대통령은 이어 "긴 실타래를 풀어보려 여야 대표를 초청해봤지만 결국 무산돼 무척 안타깝다"며 "대화로 모든 것을 풀어야 한다고 야당에서 연일 주장을 했는데 회동까지 거부하는 것은 대화를 통한 의견 접근 보다는 본인들의 요구가 관철될 때까지 움직일 수 없다는 생각이 더 강한 것 같다"고 직접적으로 언급했다.

박 대통령은 이날 담화를 발표하면서 잔뜩 굳은 표정으로 힘이 잔뜩 들어간 격앙된 목소리를 수 차례 나타냈다. 여권 관계자는 "박 대통령의 오늘처럼 격한 모습은 처음 봤다"고 전하기도 했다.

박 대통령은 담화 발표 다음날인 5일에도 국무회의를 주재하지 않았고 공식 일정을 없앴다. 6일에는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와 전화통화한 것이 유일한 공식 일정이었다. 비상시국 임을 선언하며 야당을 향한 무언의 시위를 벌인 것이다.

김종훈 사퇴가 담화 발표 원인?

박 대통령이 초강수 카드를 꺼낸 데에는 김종훈 미래창조과학부 장관 후보자의 사퇴 보고가 결정적 원인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청와대 관계자는 "정확한 인과관계는 모르지만 박 대통령이 김종훈 장관 후보자의 사의를 전해 듣고 담화를 결심했을 수 있다"고 말했다.

박 대통령이 김 후보자 사퇴 보고를 받은 뒤 여야 정치권에 대한 실망이 더욱 커졌고 결국 정치권, 특히 야당을 압박하고 국민에 대한 직접적 호소하는 '정면돌파'를 선택했다는 해석이다.

김 후보자가 '대통령 면담조차 거부하는 야당과 정치권 난맥상'을 사퇴의 직접적 배경으로 꼽은 것이 박 대통령의 담화 발표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청와대의 다른 관계자는 "취임 일주일 되는 날인데 정부조직법 통과도 안되고 삼고초려해 모셔온 분은 우리나라 정치에 실망해서 관둔다고 그러니 황당하셨을 것"이라며 "그 같은 격한 심정이 담화문 발표에서 묻어난 것 같다"고 말했다.

김 후보자의 사퇴가 아직 미스터리인 점은 있다. 그는 사퇴 기자회견에서 "대통령 면담조차 거부하는 야당과 정치권 난맥상을 지켜보면서 이제 조국을 위해 헌신하려 했던 마음을 접으려 한다"고 정치권에 화살을 돌렸다.

그러나 김 후보자가 정부조직 개편안 논란을 명분으로 내세웠을 뿐 신상 문제로 물러났을 것이란 관측도 있다. 미국 정부가 김 후보자의 국적 포기 움직임에 대해 사실상 제동을 건 게 아니냐는 얘기가 나온다. 김 후보자가 중앙정보국(CIA)과 일한 적이 있는 정보통신업계 거물인 만큼 미국이 국가기밀 및 두뇌 유출 가능성을 우려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또 부인 등 가족이 김 후보자의 미국 국적 포기와 입각을 반대했다는 얘기도 있다. 미국 국적을 포기할 경우 수천억원에 이르는 국적 포기 세금을 내야 하는 것을 비롯해 미국에 있는 재산 관리가 어려워질 수 있다는 점에 부담을 느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野, "일방통행 국정운영"

야권에서는 김 후보자의 사퇴 문제를 덮기 위해 박 대통령이 정국이 꼬여 있는 상황을 민주당 책임으로 몰아붙이는 초강수를 두고 나온 것 아니냐는 의혹 어린 시선도 있다.

이와 관련 민주당 박용진 대변인은 "김 후보자의 기자회견은 지켜보는 국민을 허탈하게 만드는 '정치적 할리우드 액션'의 백미"라며 "발목잡기 엄살을 넘어서 압박축구의 강도를 높이기 위해 자격미달을 야당 탓으로 돌리려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하지만 어쨌든 박 대통령의 담화로 민주당은 부글부글 끓는 모양새다. 자신을 정당한 피해자로 포장하면서 민주당을 국정 발목을 잡는 정치 집단으로 몰아붙였다는 이유에서다.

정성호 대변인은 "후보시절부터 최근 잘못된 인사에 이르기까지 국민 여론에는 귀를 막고 소통하지 않다가 이제야 다급해져 입법을 강요하며 국민께 호소하는 것은 지도자로서 염치없는 행동"이라며 "이번 일의 가해자는 불통과 잘못된 인사, 국회 무시로 일관해온 박 대통령"이라고 주장했다.

문희상 비대위원장은 "담화가 아니라 (선전)포고", "유신독재를 연상하는 역주행의 극치", "국민을 볼모로 입법권을 무시하고 야당을 협박한 것"이라는 등의 원색적 표현을 써가며 박 대통령을 비판했다. 문 위원장은 "(박 대통령은) 국회를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착각에서 벗어나길 당부한다"며 "대통령을 만나는 것은 두렵지 않지만 야당을 대등한 국정파트너로 인정하는 마음, 구체적 내용을 갖고 초청하라는 것"이라고 각을 세웠다.

야권의 한 관계자는 "박 대통령의 담화 발표는 야당을 정국의 한 축으로 생각하는 게 아니라 여당 행보에 발목을 잡는 무리로 치부하는 것"이라며 "담화 발표도 결국 '나 화났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의미 외에 무엇이 있겠는가"라고 불만스런 반응을 감추지 않았다.

과거에도 고비 때도 '정면 돌파'

박 대통령은 중요한 정치적 고비가 닥쳤을 때 본인의 원칙에 어긋난다고 판단되면 절충을 시도하기보다 정면 돌파에 성패를 거는 스타일이다.

박 대통령의 담화문 발표를 놓고 청와대와 여권에선 본인이 옳다고 생각하면 타협을 시도하지 않고 돌파하려는 박 대통령의 스타일이 다시 나온 것이라는 평가다. 특히 새누리당 관계자들은 "박 대통령은 자기 소신은 절대 굽히지 않는 사람"이라면서 "그 같은 분위기를 담화문 발표 때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고 입을 모은다.

실제 박 대통령은 그 동안 이런 정면 돌파 스타일을 여러 번 선보인 적이 있다. 구 한나라당 대표 시절인 2005년 12월 여당이었던 열린우리당이 사학 재단 이사의 4분의 1 이상을 외부(개방형) 이사로 임명하도록 한 사립학교법 개정안을 강행 처리하자, 2개월 가까이 국회 등원을 거부하고 장외 투쟁을 벌였다.

당시 장외 투쟁 돌입 20일쯤이 지났을 때 당내에서 "일단 국회로 복귀해서 투쟁하자"는 의견들이 나왔지만 박 대통령은 의원총회에서"(열린우리당에서) 뺨을 때리고 나서 이제 너 죽어라 하는데 우리가 맞아 죽을 때까지 참아야 하느냐"고 말하며 강경기조를 유지했다. 결국 상당부분 한나라당의 뜻이 반영된 상태로 이 법안이 재개정됐다.

2009년 7월 한나라당의 미디어 법안 처리 강행 때에도 반대 입장을 밝히며 뜻을 굽히지 않아 처리되는 안(案)에 자신의 의견을 반영케 했다.

또 대통령은 2009년 9월부터 2010년 6월까지 당시 이명박 대통령과 한나라당 친이계에서 세종시 수정안을 추진했을 때도 원안 고수 입장에서 한 발짝도 물러나지 않았다. 세종시 문제도 역시 박 대통령의 의견과 같은 방향으로 최종 결정됐다.

그러나 이런 박 대통령 스타일에 대해 우려하는 목소리가 적지 않다. 윤평중 한신대 교수는 "정치가 필요한 문제인데 야당에 운신의 폭을 주지 않고 너무 통치로 풀려고 하는 것은 안타깝다"고 말했다.

다른 전문가들도 "지금은 야당 정치인이나 여당 내 비주류 수장으로 정치하던 때와는 확연히 다른 상태"라면서 "대통령이 된 현재도 과거와 같은 방식으로 밀어붙이다간 득보다 실이 클 수도 있다"고 조언하고 있다. 민주당에 양보하고 물러설 명분을 주는 정치력을 발휘했어야 하는데 격한 모습으로 국민에게 '야당을 압박해 달라'고 하는 것은 대통령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있다는 이야기다.

박 대통령의 이런 모습은 자신은 진정성이 있으니 이를 국민이 믿어줄 것이란 확신에서 비롯된 측면이 있다. 하지만 이젠 지지층만 바라보고 가는 특정 정파의 수장이 아니라 야권은 물론 야권 지지층도 모두 껴안고 가야 할 대한민국 국민이란 점에서 더 이상 자신을 반대하는 세력과 적대적 관계로 가선 안 된다는 지적이다.

정치권에서는 자신의 스타일을 잘 바꾸지 않는 박 대통령의 성격을 감안하면 앞으로 야당과의 관계가 계속 이런 식의 강(强)대 강(强) 구도로 흐를 수 있을 것이라고 우려하고 있다. 타협의 정치, 설득의 정치가 실종되고 남는 자리에는 독선의 정치 밖에 남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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