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별 직급별 업무사항 일일이 구체적으로 지시… 공직 기강 잡고 공약 실천책임장관제 재량권 위축, 단기실적 정책 중요 시… 공직사회 더 경직될 우려도

박근혜 대통령이 21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보건복지부·식품의약품안전청 업무보고에서 모두발언을 통해 새 정부 복지정책의 방향 등에 대해 말하고 있다. 고영권기자
박근혜 대통령이 깐깐한 '사감 선생'으로 변신했다. 정부 부처 공직자들을 상대로 총론적인 국정 운영에 대한 당부를 하는 것이 아니라 일일이 숙제를 내주 듯 구체적인 지시를 하고 있다.

박 대통령은 18일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공개 발언 4,000자, 비공개 발언 8,000자 등 원고지 60자 분량의 말을 쏟아내며 각종 현안에 대해 문제 해결을 위한 세부적인 지침을 내렸다. 상당 부분이 청와대와 정부에 국정 철학 공유와 공약 이행을 당부하는 내용이었다.

박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대선 공약은 반드시 지켜져야 하는 것인데 장관이 공약과 상관 없는 자기 어젠다를 (별도로) 만들다 공약이 안 지켜지기도 했다"며 "공약 따로, 장관 어젠다 따로가 아니라 하나도 빠짐없이 공약을 지키는 게 장관의 책임이고 그게 신뢰정부"라고 말했다.

이를 두고 일부에서는 책임장관제 실시 약속과 다른 의미가 아니냐는 지적도 나왔다. 하지만 청와대 측은 "책임장관이란 정부 국정 철학에 따라 장관이 공약을 책임지고 수행하란 뜻이고, 박 대통령이 강조한 부분도 큰 틀의 정부 흐름과 다르게 독단적으로 행동하지 말라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여기엔 장ㆍ차관 등 주요 공직자들이 다른 곳을 쳐다보거나 정권 차원의 업무가 아니라 자신의 주가를 올리기 위한 업적 만들기에 치중할 경우 좌시하지 않겠다는 경고가 담겨 있다.

박 대통령은 앞서 첫 국무회의를 주재한 자리에서도 참석한 장관들을 한 명 한 명 쳐다보며 각자 할 일에 대한 역할 범위를 분명하게 규정했다. 장관들은 부여된 과제를 수첩에 받아 적기 바빴다.

16일 정부중앙청사 별관 국제회의장에서 열린 '국정철학 공유를 위한 장·차관 워크숍'에 참석한 각 부처 장관들이 국정철학 방향을 제시하는 박근혜 대통령의 인사말을 열심히 메모하고 있다. 연합뉴스
박 대통령은 이어 21일 보건복지부부터 시작된 정부 업무보고에서도 부처 간부들을 향해 깨알 같은 주문사항을 쏟아내며 향후 정부 부처가 해결해야 할 과제를 제시했다.

박 대통령은 "우선 순위를 정하고 시간표를 만들어 공약 사항을 추진하라"며 체크리스트 작성을 주문한 뒤, 리스트에 들어갈 구체적인 항목도 일부 정해주기도 했다.

'미국의 직업군은 3만개나 되는데 우리와 다른 창의적 직업군을 연구하라' '민원카드를 작성해 한 사람의 문제가 끝까지 해결되도록 챙겨라' '장애인이 관공서 몇 곳을 도는 일이 없게 하라' '아프리카 등 현지 외교 접촉을 통해 기업이 진출할 길을 코트라 등과 구축하라'는 식이다. 이밖에 해빙기 안전조치 대비, 주가조작 근절, 저작권 보호, 농협을 통한 농산물 직거래 확대 노력, 대통령의 이니셜 사용 문제 등도 미시적 지시의 대표적 사례다. 이른바 박 대통령의 '디테일 리더십(detail leadership)'이다.

박 대통령이 이 같은 행보를 보이는 데에는 무엇보다 국정 운영의 초점을 공약 실현에 맞춰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부처 공직자들은 청와대의 뜻에 따라 일사불란한 행정을 펴야 한다는 것이다.

또 박 대통령의 지시 사항에는 단속권을 갖고 있는 경찰이나 검찰, 국세청과 감사원 등을 향한 '엄단'의 뜻도 포함돼 있다. 서민 생활과 직결된 각종 업무에 대해 단속권을 쥔 기관들은 부정과 비리에 철저히 대응하면서 선제적으로 움직이란 의미가 담겨 있다.

박 대통령이 정부 부처 업무보고 등을 받으며 미시적 지시를 쏟아냈지만 이게 끝이 아니다. 일정 시간이 흐른 뒤에는 해당 부처 내 국장급 과장급까지 관련 업무 사항의 진척도를 점검하고 질책할 가능성이 크다. 벌써부터 정부 부처 공무원 사회에서는 "실적을 내기 위한 윗선의 압박이 거세졌다"는 호소가 나오기 시작했다.

부처별 직급별로 숙제를 내주고 이를 감시하며 체크하는 식으로 공직 사회 기강도 잡고 공약도 실천해 나가는 게 박근혜정부의 국정 운영 출발점이다. 박 대통령의 '디테일 리더십'이 생각대로 빛을 발할지 주목된다.

관가, 청와대發 초비상

정부 부처는 그야말로 초비상 상태다. 박 대통령이 정부 부처 업무보고를 시작으로 주문을 쏟아내자 이에 대한 후속 대책 마련에 난리 법석이다.

정부의 한 관계자는 "박 대통령은 추상적인 업무보고가 아니라 어떤 정책을 하면 국민에게 어떤 혜택이 있고 뭐가 달라지는지 구체적인 것을 원한다"며 "그러나 단기간에 성과가 나오지 않는 정책도 있고, 당장은 마이너스 같아도 장기적으로는 플러스 효과로 나타나는 정책도 있는 등 천차만별인데 이를 어떻게 구분해 보고해야 할지 걱정"이라고 말했다.

다른 관계자는 "박 대통령은 창조경제를 강조하지만 이를 일자리와 어떻게 연결해야 할지 추상적인 상황"이라며 "단기간에 효과가 나오는 급처방을 썼다가 오히려 장기적으로 화근이 될 수도 있는 부분 등을 감안해 합리적으로 업무가 진행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들의 불만과 달리 긍정적인 측면도 많다. 융통성이라곤 찾아 볼 수 없는 공직사회에 새 바람을 불어 넣으려면 역시 정권 초기에 서슬 퍼런 청와대가 앞장서 끌고 나가야 실제 서민 생활에는 약간이나마 훈풍이 부는 정책들이 나오는 게 사실이다. 박 대통령도 이 같은 점을 잘 인식하고 있는 것 같다.

전 정권에서도 이명박 대통령의 최측근들은 바로 이 부분을 가장 힘들게 여겼다. 이 대통령이 역점을 두는 4대강 사업 외에는 꽃을 피운 정책이 드물다. 신성장 동력을 찾겠다던 녹색성장 사업도 그다지 재미를 보지 못했고, 공교육 정상화를 포함한 대학 입시 문제, 한류 바람에 편승한 한식세계화 사업 등도 흐지부지되거나 별반 긍정적 결과를 얻지 못했다.

청와대의 지속적인 관심이나 대통령의 의지 등도 문제점으로 지적되지만 무엇보다 담당 부처 공무원들의 수동적 대응이 가장 큰 원인이다. 새로운 일에 뛰어드는데 익숙지 않은 공직사회의 분위기가 정부의 주요 정책마저 진행을 어렵게 만든 셈이다. 위험을 떠안으려고 하지 않는 관료사회의 특징이다.

때문에 박 대통령이 직접 회초리를 들고 전면에 나서서 공직사회 전체를 채찍질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

이전 정부와는 다른 요소 많아

일각에서는 역대 정권마다 초반만 그렇게 의욕을 보이다 총선이나 지방선거 등 큰 선거를 치르고 나면 의욕이 꺾이고 분위기가 가라앉곤 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정권 초반만 넘어가면 이 정부도 예전 정부와 다를 게 없을 것이란 냉소적 의미다.

하지만 자녀와 친인척이 있고 평생 정치적 운명을 같이 한 공신이 즐비했던 이전 정부와 지금 박근혜정부는 다른 점이 적지 않다.

박 대통령은 자식도 없고 친박 공신들에게도 좀체 정치적 권력을 주는 데 인색하다. 모든 것이 청와대로 통하고 모든 것이 박 대통령 결제 하에 이뤄지고 있는 셈이다. 공직사회가 현정부를 이전과 같이 취급했다가는 큰 코 다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정치권 내부에서는 "아마 정책 집행 속도가 느리거나 역행하는 부처가 나올 경우 박 대통령이 본보기로 관련자들을 엄하게 문책할 수도 있고, 성적이 우수한 부처의 경우 담당자를 파격 승진시키는 깜짝 인사를 단행할 수 있다"며 "당근과 채찍이 자주 번갈아 나오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실적 위주로 흐를 수도…

박 대통령의 선친인 박정희 전 대통령도 자신이 모든 정책을 총괄하다시피 했다. 일기예보까지 수첩에 적고 다니며 날씨와 관련된 정책 방향도 지시할 정도였다고 한다. 박 대통령이 그와 같은 스타일을 답습하고 있는 셈이다.

청와대 관계자는 "박 대통령은 과거 국회의원 때나 당 대표 시절에도 모든 정보보고를 꼼꼼히 챙긴 뒤 다음 날 일일이 담당자를 정해 해당 업무를 종결하란 지시를 내리곤 했다"며 "지금도 각 수석실에서 올라온 자료를 밤에 관저에서 다 읽고 낮에 수석비서관에게 자세히 지시한다"고 말했다. 단순히 임기 초반이라 국정 드라이브를 강하게 거는 게 아니라 5년 내내 이런 업무 스타일이 이어질 것이란 전망인 셈이다.

정치권의 한 관계자는 "박 대통령은 한번 지시하고 잊는 스타일이 아니라 해결될 때까지 집요하게 캐 묻는 데다 사안별로 구체적으로 질문을 하기 때문에 어설피 지나가는 법이 없다"며 "공직사회가 5년 내내 이 같은 박 대통령의 꼼꼼한 리더십을 따라가느라 바쁠 것"이라고 말했다.

그에 따른 우려도 나온다. 국정의 큰 틀을 설계해야 할 대통령이 지나치게 장관 등의 업무 추진력을 제한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에서다. 가뜩이나 상명하복에 익숙한 관료들이 위에서 내려온 지시사항에만 매달리지 않겠느냐는 우려다.

이와 관련 신율 명지대 교수는 "대통령이 지나치게 세세한 부분까지 챙기면 대선에서 약속한 책임장관제가 한계에 부딪칠 수 있고 공무원 사회가 더 경직될 수 있다"고 말했다.

즉 경직된 공직사회가 청와대에서 내준 숙제에만 매달릴 뿐 별도의 예습 복습을 하지 않는 기계화 군단처럼 변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이 경우 청와대에 보고하기 위한 실적 양산 정책만 중시되고, 장기적인 변화를 가져가야 하는 정책에는 해당 부처가 소홀히 취급하게 될 것이란 설명이다.

또 다른 문제도 있다. 대통령이 일일이 챙기다 보면 청와대와 내각이 새로운 문제를 발굴하고 창의적인 해법을 내는데 소극적일 수 있다. 부처의 자율성이 극히 떨어지는 상황에서 모든 공직자가 대통령의 입만 쳐다보는 결과로 귀결될 수 있다. 이런 상황이 지속된다면 오히려 작은 것을 챙기려다 큰 것에서 중요한 허점을 보이거나 주요 정책 수행에 있어서 실기(失機)하는 최악의 국면으로 흐를 우려도 있다.

최진 대통령리더십 연구소장은 "만기친람(萬機親覽ㆍ온갖 정사를 일일이 살펴봄) 형 리더십은 집권 초반엔 공직 기강을 다잡는 효과를 볼 수 있다"면서도 "그러나 장기간 지속될 경우 공직사회의 피로도가 증가하면서 정부의 탄력성이 크게 위축될 수 있다"고 경계했다. 정부 철학 같은 총론을 제시하면서 중간중간 각론을 언급한 뒤 이에 대한 독려를 적절히 하는 탄력적 운용의 미가 요구된다는 이야기다.



주간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