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호섭 개인전 '세상의 근원에서'탄생부터 진화·소멸까지 평면회화로 '자연성' 표현바람으로 물감 흩뿌려 작업… 여백 살린 '절제미' 눈길내달 2일부터 12일까지 인사동 공아트스페이스

무제, 195x130㎝, 캔버스 위 아크릴
재불작가 황호섭이 한층 새로워진 '회화'를 한국에 선보인다. 서울 인사동 공아트스페이스에서 열리는 개인전 '세상의 근원에서(Aux origines du monde)' 을 통해서다.

회화, 조각, 설치 등 다양한 작업을 통해 근원적 질문에 대한 고민을 작품에 투영해온 황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우주의 근원, 생명의 진화 등 본질적인 것들을 '회화'에 담았다.

프랑스를 근간으로 활동하는 황 작가는 1980~90년대 프랑스 최고 화랑인 장프루니에 갤러리 전속작가로 최근까지 파리, 뉴욕, 서울 등 국내외 유수의 화랑에서 100회에 가까운 개인전과 그룹전을 가졌으며, 프랑스 국립현대미술재단 및 카르티에 재단 그리고 휴렛팩커드 재단, 국립현대미술관(한국) 등에 작품이 소장돼 있다.

황 작가는 그동안 캔버스 위에 물감을 흩뿌리고 닦아낸 회화 작업과 구리망을 구부리고 두드려 만든 부처의 얼굴을 이용한 부조작업으로 신비로운 우주의 모습과 인간의 근원적 욕망에 대한 성찰을 담은 작품세계를 펼쳐왔다.

이번 전시를 통해 오랜만에 다시 평면회화로 돌아온 황 작가는 '세상의 근원에서'라는 화두 아래 생명이 생성되는 순간부터 소멸과 변화, 그리고 또 다른 생성을 반복하며 진화해나가는 모습에 초점을 맞춘 신작들을 공개한다.

무제,162x130㎝, 캔버스 위 아크릴
황 작가는 30여년 화업에서 80년대 추상회화를 시작으로 대략 10년 주기로 '회화'에 변화를 보였다. 초기에는 폴록이나 샘 프란시스 같은 예술가들과 궤를 같이하는 작업으로 붓 대신 손을 사용해 물감을 뿌리고 뭉개는 작품을 선보였다. 이후 회화에서는 캔버스에 뿌려진 물감을 물로 씻어내는 작업을 반복하는 새로운 양식을 시도했고, 이번 신작에서는 물감을 바람에 날려 흩뿌린 또 다른 형태의 작업을 보여준다.

황 작가의 회화는 일정한 시점을 기해 큰 변화를 거쳤지만 일관되게 유지하는 것이 있다. 바로 '자연성'이다. 사물과 자연의 본질에 천착하면서 무언가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움, 저절로 심상이 발현하는.

그는 회화의 기본이라 할 수 있는 붓을 사용하지 않는다. 대신 '손'으로 작업을 한다.

"붓은 계산된 도구로 여겨진다. 무언가를 그려야 하는 '계산' 이. 난 그런 계산을 탈피하고 싶었다."

황 작가는 붓 대신 손으로, 몸으로 마음이 이끄는 대로 나아간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몸과 마음이 합치된 작품에 이른다. 그런 그의 시선(마음)은 늘 근원(본질)적인 것을 향한다.

무제, 65×54㎝, 캔버스 위 아크릴
황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하얀 여백 위에 둥근 개체들을 등장시키며 변화하는 생명의 움직임과 과정을 새로운 방식으로 형상화했다. 이 개체들은 마치 생물체의 기초를 이루는 세포와 유사한 모양을 한 채로 서로 뭉치듯이 혹은 흐트러지듯이 움직이며 화면을 채워나간다.

이 불완전한 개체들은 서로 상호작용을 하며 역동적인 리듬감을 만들어낸다. 서로 뭉치며 더 큰 개체를 만들어나가며, 부딪히며 깨어지기도 하며 끊임없이 변화하는 과정은 마치 예측 불가능한 환경 속에서 적응해나가는 생명의 진화 과정을 함축적으로 나타내는 듯하다.

이번 신작이 이전 작품들과 다른 점은 '절제'의 울림이다. 작가 스스로 말하듯 신작들에선 '여백'이 두드러진다. 이전 작품들에서 물감을 구석구석 채우고 마티에르마저 느껴졌던 것과는 확연히 다르다.

"어느 순간 더 잘하려는, 다 채우려는 욕망이 사라지면서 마음이 비워지고 손(몸)도 멈춰졌다. 채움과 비움의 간극에서 한없는 자유와 희열, 영혼의 울림을 경험할 수 있었다."

황 작가의 프랑스 작업 활동을 30년 가까이 지켜본 피에르 캉봉 파리 기메 박물관 수석 큐레이터는 그의 회화를 "탐구이며 명상"이라고 말한다.

"그의 회화는 정신과 손, 영혼의 조화 속에서만 궁극적인 충만함을 완성할 수 있다. 그렇게 얻어진 조화는 색채와 형태 앞에서 침묵과 경이로움을 부르며, 불가사의한 만남과 무한한 놀라움으로 초대한다."

모처럼 중견 작가의 치밀한 내공과 여유를 갖춘 관록을 느낄 수 있는 전시는 5월 2일부터 12일까지 이어진다. 02)730-1144



박종진기자 jjpark@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