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슈 올레 8개 코스 중 가장 빼어나 1500년 무렵부터 네덜란드 등과 교역지금도 곳곳에 당시의 흔적 오롯이 전통가옥·포구·절벽 함께 어우러져가와치 토오게서 바라본 해안 '환상' 노천탕에 발 담그면 하루 피로가 '싹'

가와치토오게 고원
가끔은 일본 여행에서 숨겨놓은 보물을 만난다. 규슈 서북단에 위치한 히라도가 그런 고장이다. 듣기에도 낯선 도시는 1500년경부터 포르투갈, 네덜란드 등과 교역을 시작해 '서쪽의 도읍'으로 불릴 정도로 화려한 과거를 지녔던 곳이다. 포구 언덕 위에는 히라도성이 들어서 있고, 마을로 내려서면 옛 전통가옥 거리와 천주교 교회가 어우러진 이채로운 풍경들이다. 도시가 새롭게 부각된 것은 최근 불기 시작한 '규슈 올레' 바람이 이 마을에 와닿으면서 부터다.

자연과 복합문화가 어우러진 외딴 도시는 여행자들의 눈을 쉴 틈 없게 만든다. 규슈 나가사키현에서 서쪽 끝으로 달려와 붉은 대교를 넘어서면 히라도는 숨은 자태를 드러낸다. 히라도는 대항해 시대, 서양의 지도에 '피란도(Firando)'로 명명됐던 성읍도시였다. 일본 최초의 해외무역항으로 1600년대 초반 네덜란드와의 교역이 성했으며 지금도 네덜란드 다리, 담장, 부두 등 옛 사연을 간직한 건축물들이 도시 곳곳에 남아 있다.

외래 문물들만 빼곡하게 쌓여있었다면 히라도는 인근 항구도시인 나가사키, 사세보 등과 견줘 뒷전에 머물렀을지도 모른다. 섬이었던 도시는 이국적인 사연을 지닌채 고즈넉한 경관을 함께 간직하고 있다. 히라도의 도심을 거닐며 행복감에 휩싸이는 것은 일본의 전형적인 전통 목조가옥들이 옹기종기 보존돼 있어서다. 이른 아침, 혹은 해질녘 선술집을 찾아 산책에 나서는 것만으로도 일본의 근대사를 거니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걷다보면 사찰 너머로 교회당이 보이고, 건너편 포구 너머로는 히라도성이 우뚝 서 있는 아련한 상황들이 펼쳐진다. 황홀한 시선 너머 코 끝에 와닿는 바람은 비린 바다향과 온천내음이 묻어나는 해풍이다. 히라도 걷기여행이 지닌 진정한 묘미는 이런데 있다.

포구와 고원절경이 어우러진 길

히라도의 골목과 숲을 잇는 길은 올해초 '규슈 올레'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었다. 규슈 올레는 한국의 제주올레 브랜드가 일본 규슈로 건너와 만들어진 트래킹 코스로 히라도 코스는 8개의 규슈 올레 코스중 단연 빼어난 그 하나다. 규슈 올레에는 길 표식 디자인 등 제주 올레의 것들이 반영돼 있다.

올레 도착점인 히라도 족욕탕
히라도 올레길의 출발점은 히라도항이다. 예전 유럽 상선들이 드나들었을 법한 포구는 아담한 외관이다. 범선이 그려지고 하얀 담장에 선명한 십자가가 내걸린 포구길은 히라도의 도심골목으로 연결된다. 이른 아침의 골목풍경은 평화스럽고 정겹다. 격자무늬 외관의 목조 이층집들, 아담한 간판에 서둘러 문을 연 도시락 가게들이 듬성듬성 보이고 등굣길에 나선 아이들이 엄마 손을 잡고 오가는 일상의 모습이 곁들여진다. 그 길을 거닐다 보면 시간은 히라도의 과거만큼이나 더딘 템포로 흐르는 듯하다.

도심을 벗어나면 사이쿄지 절이 모습을 드러낸다. 1600년대 초반, 네덜란드와의 교역이 이뤄질 무렵 건립됐다는 이 사찰은 독특한 행사로 주목을 끈다. 매년 봄 이 사찰에서는 '코나키즈모'라는 아기들이 마주보고 빨리 울게 하는 행사가 열린다. 아기 울음소리가 재앙을 내쫓는다는 미신에서 비롯됐는데 아기가 먼저 울면 어른들이 즐거워한다는 게 엉뚱하면서도 이채롭다.

사이쿄지절을 지나면 올레길은 사이카이 국립공원을 향해 이어진다. 히라도 올레길의 백미인 가와치토오게는 해발 200m의 고원으로 국립공원의 한 가운데 소담스럽게 솟아 있다. 가와치토오게에 오르면 360도 파노라마 해안 절경이 펼쳐진다. 히라도의 바다와 섬들은 발걸음을 옮길때 마다 푸른 풀밭을 배경으로 다른 장면을 연출해낸다. 짙은 바람이 불고, 걷기에 지친 사람들조차 유독 신명을 내며 들뜬 감탄사를 쏟아내는 곳이 바로 가와치토오게다. 어찌 보면 제주의 오름을 닮은 이곳은 봄이면 야생화가, 깊은 가을이면 억새가 장관을 이루는 곳이기도 하다.

전통가옥과 이국문화가 뒤섞이다

가와치토오게를 정점으로 한적한 숲길을 우회하면 다시 히라도의 일상이 담긴 골목들로 접어들게 된다. 야구장과, 사과를 건네는 일본 할머니, 회색빛 옛 기와집들 사이로 냇물이 흐르는 경관을 스치면 히라도의 골목길은 더욱 깊고 짙어진다. 나무아래, 담벼락 위에는 규슈 올레의 상징인 다홍색 리본과 파란색 리본이 함께 매달려 길을 친절하게 안내한다.

규슈 올레를 상징하는 리본
도심 골목 정경 중 최고를 자랑하는 곳은 에서 소쥬지 절로 이어지는 길이다. 는 일본에 카톨릭을 전파한 자비엘 신부를 기념하는 곳인데 사찰 위에 자리잡고 있다, 두 명소 사이를 잇는 길은 아늑하고 탐스러우며 사찰 담벼락아래서 교회를 바라보는 풍경은 히라도의 묘한 대비를 잘 설명해준다.

교회를 지나 도심 거리로 내려서면 옛 창고를 박물관으로 재건립한 네덜란드 상관, 히라도성과 마을 사이를 연결한 사이와이바시 다리 등이 이어진다. 도심 한가운데 족욕탕에 앉아 이방인들과 현지인들이 뒤섞이는 골목 풍경을 바라보는 것으로 히라노 규슈 올레 코스는 마무리 된다.

히라노의 절경들이 걷기 여행으로만 채워지는 것은 아니다. 이키쓰키의 시오다와라 절벽은 바다가 깎아낸 독특한 기암지형이 돋보이며 여름이면 네시코노하마, 이치로쿠 해수욕장으로 휴양객들이 몰려온다. 계절과 상관없이 히라도 여행의 정점은 온천탕에서 찍는 것이 또 묘미다. 대부분의 숙소들이 온천을 갖추고 있으며 바다와 해풍을 간직하고 들어서 있다. 노천탕에 앉아 포구와 히라도성이 만들어내는 야경을 감상하며 도시의 지난한 세월을 더듬는 것으로 하루는 평온하게 마무리된다.

여행메모

■ 가는길=한국에서는 후쿠오카, 나가사키 공항 등을 경유하는게 일반적이다. 후쿠오카, 나가사키에서는 열차, 버스로 히라도까지 3시간 정도 소요된다.

히라도성과 포구
기타정보=규슈 올레길은 지난해 1차 코스 4곳이 선정된데 이어 올해 역시 히라도 코스 등 4곳이 추가로 열려 총 8개 코스다. 히라도 올레코스는 13km로 4~5시간이 소요되며 이외에도 사가현의 다카오올레, 구마모토현의 야마쿠사 올레, 오이타현의 오쿠분고 올레 등이 인기 높다. 일본 규슈 관광추진기구 홈페이지(www.welcomekyushu.or.kr)에서 규슈 올레길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 음식, 숙소=기쇼테이 호텔, 히라도 해상 호텔 등의 전망이 좋으며 대부분의 호텔 등은 온천시설을 갖추고 있다. 히라도에서는 날치가 유명하며 날치로 만든 히라도 짬뽕이 맛있다. 감자 소주나 고보모찌로 불리는 우엉떡도 명물이다.


소주지 사찰 골목
자비엘 기념교회
사이쿄지 사찰 오르는 올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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