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하다 싶으면 비비세요

[이경섭의 한의학 산책] 보리밥
허하다 싶으면 비비세요

얼마 전 소화가 잘 안 된다며 병원에 찾아온 환자가 있었다. 그 환자는 특별한 식성이 있었는데, 쌀밥을 먹으면 체하고 보리밥을 먹으면 소화가 잘 된다고 하였다. 예전에 동창회 모임에서 어떤 친구가 국수를 먹으면 괜찮은데, 쌀밥만 먹으면 설사를 하는 환자를 진찰한 얘기를 했었는데, 아무리 식성이 제각각 이라지만 이렇게 별난 사람들이 많을 줄이야.

어쨌든 그 때문에 어렸을 때 즐겨먹던 보리밥 생각이 났다. 더운 여름 저녁이면 마당에 평상을 펴고, 온 식구가 둘러앉아 식은 된장찌개와 열무김치를 넣고 비벼먹던 보리밥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요즘이야 일부러 보리밥을 찾아 다니며 먹어야 되지만 옛날에는 쌀밥만큼 쉽게 보이던 것이 보리밥이었다. 푸른빛으로 일렁이던 보리 물결이 황금빛으로 바뀌면 우리 마음도 웬지 넉넉해지던 그 때가 그리워진다.

보리는 벼과에 속하는 작물로 한방에서는 대맥(大麥)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키는 1m 정도로 똑바로 자라며 원줄기는 속이 빈 원주형이며 마디 사이가 길어 피리를 만들어 불수도 있어 보리피리라는 말도 있다. 잎은 어긋나기를 하며 넓은 선상 피침형으로 너비가 10~15㎜정도 된다. 보리는 기원전 7,000년에 이미 야생종이 재배되었으며 기원 전 3,000년경부터는 아프리카 고대 왕조의 유적에서 육조종이 발견되고 있다.

이는 보리의 원산지가 티벳의 타오푸 및 라사를 중심으로 한 중국 양자강 유역임을 말해준다. 또 두줄보리는 서부아시아의 온대지방 특히 홍해의 동쪽 카프카스 및 카스피해 지역이 원산지인데 우리 나라에는 중국을 거쳐 들어온 것으로 생각된다.

우리나라에서 보리에 대한 첫 기록은 삼국유사에 있는데, 주몽의 생모 유화가 비둘기 목에 보리씨를 달아 보냈다는 얘기가 실려있다. 동의보감에서 보리는 성질이 온화하며 짠맛을 가져 기(氣)를 더해주고 허함을 보(補)해주고 설사를 멎게 한다고 적혀 있으며, 또 오장을 튼튼하게 하므로 오래 먹으면 건강하고 피부가 윤택해 진다고 하였다.

보리로 만든 국수는 위를 편하게 하고 갈증을 그치게 하며 소화를 돕고 장을 다스리고, 보리의 싹을 틔운 엿기름은 그 맛이 달고 독이 없어 복부의 팽만감을 제거해준다.

보리에는 특히 비타민 B1과 B2가 풍부하여 보리밥은 변비를 방지하고 소화를 도우며 각기병을 예방하는데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보리의 혈당 조절 효과가 알려지면서 당뇨병 환자에게 선호되고 있다. 보리알은 무게가 무거운 것일수록 아밀라아제와 단백질이 풍부해 좋고 혼식을 할 경우에는 쌀과 보리의 비율이 7대 3이 되는 게 이상적이다.

보리는 쌀에 비해 섬유성분이 5배나 많아 소화율이 낮고 단백질은 많으나 단백가는 떨어진다. 그러나 섬유질은 창자의 연동운동을 촉진시켜 변비를 없애주며, 쌀에 부족한 비타민B1은 당질대사에 큰 도움을 준다.

이러한 보리의 장점을 뒤집어 생각해보면 쌀보다 소화시키기 어렵고, 영양가가 떨어지며, 설사를 유발할 수 있으며, 겨울에 자라므로 한기(寒氣)를 많이 받아 양기(陽氣)를 소모시킬 수도 있다는 단점을 집어낼 수 있다.

따라서 보리밥을 먹고 방기를 많이 뀌게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속이 차서 만성적으로 설사하는 사람, 여름에도 추위를 타는 사람, 소화능력이 많이 떨어지는 사람은 알맞은 조리법을 선택해서 보리 음식을 해 먹는 것이 좋겠다.

또한 보리에 싹을 틔운 맥아(麥芽)는 산후에 젖을 삭힐 때도 많이 응용하며, 오히려 소화를 촉진시키며 위장을 편안하게 하는 효과가 있으므로 위장장애가 있는 사람들에게 보리의 영양과 맛을 그대로 전할 수 있으므로, 맥아를 먹는 것도 한 방법이 될 것이다.

강남경희한방병원 이경섭병원장

입력시간 : 2003-10-02 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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