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자로서의 자질과 대중스타로서의 덕목 두루 갖춘 진정한 배우

안성기와 야쿠쇼 코오지, 이들이 국민배우인 까닭
연기자로서의 자질과 대중스타로서의 덕목 두루 갖춘 진정한 배우

1999년 4월 21일 일본 도쿄의 한 카페. 그는 두시간에 걸친 인터뷰에도 지친 기색없이 기자들의 질문에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사진기자의 요청에 따라 바닥에 눕는 포즈까지 싫은 내색 없이 취했다. 그가 ‘일본 영화의 얼굴’로 부상한 이유를 금세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인터뷰 말미에 한마디 던졌다.

“한국에 가서 안성기씨를 만나고 싶다.” 일본의 대표적인 배우 야쿠쇼 코오지(役所廣司)다. 그가 3년 5개월 만에 그의 바람대로 한국에서 안성기를 만났다.

제 8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였다. 부산영화제 개막작인 ‘도플 갱어’의 주연을 맡았던 야쿠쇼가 영화제 참가해 안성기와 함께 자리한 것이다. 두 사람의 만남은 1995년 영화를 통해 이뤄졌다. 1995년 오구리 고헤이 감독의 ‘잠자는 남자’에서 두 배우가 함께 출연한 것이다. 하지만 공식적인 만남의 자리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한일 양국 최고의 스타

안성기와 야쿠쇼 코오지. 한일 양국의 최고 배우의 만남이라는 사실만으로 대중매체와 대중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영화적 의미와 연기자로서의 자질, 그리고 스타로서의 지녀야 할 덕목을 고스란히 드러내주었기에 더욱 주목을 받을 만 했다.

야쿠쇼를 국내 관객에 소개할 때 자연스레 등장하는 수식어는 ‘일본의 안성기’이고 일본에선 안성기를 보도할 때 표현하는 용어는 ‘한국의 야쿠쇼 코오지’일 정도로 두 사람은 공통 접점이 많고 안성기(51)와 야쿠쇼(47)가 생일(1월 1일)까지 같은 기연을 갖고 있다.

한일 양국의 대중문화 환경과 스타 시스템은 다르지만 그래도 두 사람은 스타라는 공통점 외에 공통 분모가 많다. 한일양국 연예계에 발을 들여놓은 연예인들이 가수든, 연기자든 스타로서 비상할 꿈을 갖고 있다면 이 두 스타의 공통분모를 체화하는 노력이 반드시 필요할 것이다.

5세때 아역으로 출발한 뒤 대학을 졸업하고 성인배우로 재출발한 안성기와 동사무소 직원으로 4년간 일하다 20대에 연기자로 데뷔한 특이한 이력의 야쿠쇼는 연기 경력과 활동 영역이 차이가 있지만 탄탄한 연기력과 다양한 캐릭터를 자연스럽게 소화해내는 능력이 탁월하다.

요즘 만능 엔터테이너를 표방하며 인기만을 믿고 연기의 기본 조차 안되는 수많은 가수, 연기자들이 영화나 드라마에 출연하는 상황에서 이들은 분명 연기의 의미와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존재들이다.

“연기란 처음엔 아무 것도 주어지지 않았던 인물에게 다양한 성격을 부여한다는 점에서 예술이다. 보통 사람들보다 감정을 더 넓고 깊이 있게 들어갔다 나왔다 할 수 있어야 한다. 연기자는 자기 시간을 많이 가져야 한다. 번잡한 생활에 휘둘리면 연기가 방해를 받는다”(안성기)

“최상품의 연기를 하고 싶다. 하지만 내가 혼자 튀는 연기보다 출연 배우들과 조화를 이루는 것이 중요하다”(야쿠쇼) 두 사람 모두 연기에 임할 때 진지한 자세를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이들의 연기에 대한 진지함은 영화나 드라마 등 겹치기 출연을 하지 않는 자세에서도 엿볼 수 있다. 탤런트와 영화배우가 어느 정도 구분돼 활동하고 있는 미국과 달리 한국과 일본은 연기자들이 텔레비전과 영화를 오가며 활동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안성기는 5세때 영화 ‘황혼열차’로 데뷔해 연기자로서 휴지기를 가진 후 1980년 영화에서 ‘바람 불어 좋은날’로 성인 연기자로 본격적으로 나서 ‘만다라’ ‘깊고 푸른 밤’ ‘고래사냥’ ‘칠수와 만수’ ‘하얀 전쟁’ 등 영화에서만 농밀하면서도 뛰어난 내면 연기를 해왔다. 안성기는 아무리 영화 섭외가 많이 들어와도 출연하는 작품에 최선을 다하기 위해 겹치기 출연을 거의 하지 않는다.

야쿠쇼는 일본에서 개봉돼 600만명을 동원한 ‘실락원’, 미국에서 1,000만 달러의 흥행성적을 올린 ‘쉘 위 댄스’, 1997년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우나기’에 출연해 중년의 감정과 존재감을 과장되지 않은 편안함으로 소화해냈다. 물론 그는 안성기와 달리 영화뿐만 아니라 텔레비전 드라마와 연극무대에도 서고 있다.

하지만 그가 철칙으로 여기는 원칙 하나가 같은 시기에 중복 출연을 하지 않는 것이다. 야쿠箏?“영화, 드라마, 연극은 연기패턴과 스타일을 달리해야 하지만 연기를 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특히 연극은 내 자신의 연기에 대한 반응을 직접 확인할 수 있어 기회가 있을 때마다 출연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세 개의 분야에 활동하고 있지만 하나의 작품에 들어가면 다른 곳에서 섭외가 들어와도 고사한다”고 말했다. 메뚜기도 한철이라며 인기가 있을 때 시청자나 관객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수많은 작품에 중복출연하며 식상함을 안겨주는 연기자가 많은 상황에서 이들의 프로적인 자세는 한번쯤 되새김질 할 의미로 다가온다.

스타는 훌륭한 연기력으로만 되는 것은 아니다. 현대는 이미지 소비의 시대라고 일컬어지는 만큼 대중이 선호하는 이미지의 창출 여부가 스타로의 비상을 결정하는 주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이미지를 조형하는 중요한 요소는 극중 캐릭터와 사생활, 공인으로서의 생활 등이 있다. 두 사람의 공통점중의 하나가 스캔들이 없다는 점이다.

최근 스캔들마저 인기 제고의 수단으로 활용하는 고도의 전략이 횡행하고 있는 연예계 상황에서 이들은 놀라우리만치 깨끗한 사생활과 성실함으로 유명하다.

이번 부산영화제 기간 중에 만난 두 사람은 이런 대화를 나눴다. “안성기씨를 소개받을 때 ‘이 사람이 한국에서 널리 사랑받는 국민 배우’라고 들었다. 일본에서는 국민 배우라는 말은 없지만 ‘안성기=국민 배우’라는 말이 참 설득력 있다고 느껴졌다. 그런데 국민 배우 하면 왠지 평소에 나쁜 일도 절대 하지 않아야 하고 청렴결백해야 할 것 같다. 난 그럴 자신이 없는데…”(야쿠쇼)

“사실 국민 배우라는 말은 상당히 부담감을 주는 단어다. 국민 배우라고 나를 칭할 때마다 쑥스럽긴 하지만 아역 시절부터 47년간 영화라는 한 우물에 몰두하는 성실한 모습과 평탄한 가정생활 등을 잘 봐주신 덕이 아닐까 하고 감사하게 생각한다”(안성기)


공인으로서의 모범적 사생활

야쿠쇼도 겸손하게 표현을 했지만 그는 열다섯살 된 아들과 쉬는 날이면 서바이벌게임도 하고, 아내에게 끔찍한 애정을 표시하는 등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가정이라고 여기는 배우다.

또한 두 사람은 스타라는 공인으로서의 의식과 생활 태도에도 공통점이 있다. 안성기는 촬영장에서 연기자 선배로서 최선을 다하는 것으로 정평이 나있다. 연기뿐만 아니라 스태프와의 조화, 그리고 촬영장에서의 솔선수범 등은 익히 잘 알려져 있다. 그리고 유니세프 홍보대사 등 공인으로서 활동도 활발하게 전개하고 있다.

야쿠쇼는 엄청난 수입을 올리는 스타지만 검소하고 소탈한 생활을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의 이름 야쿠쇼는 ‘동사무소’라는 뜻이다. 자신이 예전에 생활했던 모습을 잊지 않고 연기자로서도 성실하게 생활하자는 뜻으로 예명을 야쿠쇼로 지은 것이다. 그는 스타가 된 지금에도 동사무소 옛 동료들과 소탈하게 술한잔 기울이는 것을 최고의 즐거움으로 꼽는다.

두 사람의 모습은 인기가 오르고 스타의 대열에 합류한 뒤 공인의 자세는 상실한 채 마약복용, 폭력, 음주운전 등 불미스런 일마저 저지르는 스타들이 적지 않은 연예계의 상황과 사뭇 대조를 보인다.

연예인들은 말한다. 연예인들의 역할에 비해 사회적 인식은 매우 부정적인 편이라고. 하지만 부정적 인식의 원인 제공자는 바로 연예인이다. 일부 연예인의 잘못된 행동들이 자주 대중매체에 보도되면서 연예인에 대한 인식이 부정적인 방향으로 흘렀다. 안성기와 야쿠쇼의 생활과 태도는 이점에서 많은 것을 시사한다.

사람들은 말한다. 연예계에는 사표가 없다(師表)고. 돈과 인기만을 쫓는 불나방 같은 하루살이 연예인과 돈과 인기를 위해서라면 연기자나 가수로서 지켜야 할 최소한의 자존심마저 내팽개치는 연예인이 적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한길을 묵묵히 그리고 최선의 노력을 다해 가는 안성기와 야쿠쇼를 보면서 그들은 분명 연예계의 사표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대중의 사표로서 역할을 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그래서 한일 양국을 대표하는 두 사람의 이번 만남은 아름다운 의미로 더욱 빛났던 것이다.

배국남 대중문화평론가


입력시간 : 2003-10-15 16:48


배국남 대중문화평론가 knbae24@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