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치할 수 없는 방송계 독약, 안이한 제작관행 등이 문제

"또 베꼈어?" …표절시비
방치할 수 없는 방송계 독약, 안이한 제작관행 등이 문제

이제 정례화가 돼버렸다. 프로그램 개편 때나 특정 프로그램이 인기가 높으면 으레 등장하는 것이 표절 문제다. 최근 각 방송사의 가을 프로그램 개편으로 새로운 프로그램이 시청자와 만나면서 인터넷 사이트에서, 그리고 신문과 방송에서 표절의혹 공방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다.

여기에 일본 방송사가 이번 방송 프로그램 표절 논쟁에 가세해 이제는 표절 문제가 더 이상 방치될 수 없는 방송계의 현안임을 직시하게 한다.

최근 일고 있는 표절 의혹의 진원지는 이번 방송사 가을 개편으로 7일과 8일에 각각 첫 선을 보인 KBS2의 ‘스펀지’와 SBS ‘TV 장학회’다. 이 방송이 나간 직후 방송사 인터넷 사이트에는 이 두 개의 프로그램이 일본에서 인기가 높은 후지TV의 ‘트리비아의 이즈미(샘)’를 표절했다는 네티즌들의 항의와 비난이 쏟아졌다.

곧 바로 일부 언론에서 네티즌의 의견을 근거로 두 프로그램의 일본 방송 표절 의혹을 제기하고 나섰다. 여기에 이례적(?)으로 일본 후지TV는 11일 발표한 ‘트리비아의 이즈미와 한국 유사 프로그램 문제에 대한 코멘트’라는 제목의 공식 논평을 통해 “의혹이 제기되고 있는 프로그램에 관해 프로그램 자체를 보지 않아 판단할 수는 없지만 방송 내용을 체크 한 후에 법적인 것을 포함해 추후 대응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KBSㆍSBS 프로그램에 의혹

이에 대해 KBS와 SBS 제작진은 일본 프로그램과 자사 프로그램의 표절 관련 의혹을 전면부인하고 나섰고, KBS 제작진은 자사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 “표절은 그 의도와 목적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결과물에 의해 평가되어져야 한다. 콘텐츠가 핵심인 TV 프로그램에서 본질은 당연히 콘텐츠 자체이며 따라서 ‘스펀지’가 ‘트리비아의 이즈미’의 콘텐츠를 도용하지 않는 한 표절은 성립할 수 없다”며 표절 의혹에 단호히 맞서겠다는 입장을 드러냈다.

문제가 되고 있는 ‘트리비아의 이즈미’는 상식의 이면에 숨겨져 있는 기발한 문제를 낸 뒤 출연 패널들이 문제의 기발함과 지식적 가치 등을 평가해 점수를 매기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또한 ‘스펀지’는 ‘이승만은 폭주족이었다’ ‘핸드폰은 폭발한다’ 처럼 기발한 상식에 관한 문제를 패널들이 맞춘 뒤에 50명의 지식 감정단이 이 문제의 가치에 대해 별점을 매기는 방식으로 진행되며 ‘TV장학회’ 도 일반인이 예상치 못한 상식문제를 주제로 패널들이 알아맞히는 방식으로 꾸며진다.

이와 함께 최근 네티즌과 일부 언론에 의해 제기된 표절 의혹은 요즘 시청률 40%를 넘고 50%대를 향해 인기고공 비행을 계속하고 있는 MBC 사극 ‘대장금’이다. 네티즌과 일부 언론은 4일 16회 방송 분에 등장한 ‘올게 쌀’ 이 허영만의 만화 ‘식객’과 소재가 같다는 이유로 표절 의혹을 제기했고 또한 일제 시대를 배경으로 조선왕조의 마지막 주방 상궁인 최 상궁에게 조선 궁중요리를 전수받으면서 경쟁하는 두 여자의 이야기를 다룬 MBC특집 사극 ‘찬품단자’(1995년 방송)를 모방했다는 지적도 제기했다.

이 뿐만이 아니다. 6월에는 프로덕션 제작사인 리스프로가 SBS ‘휴먼다큐멘터리-여자’에 대해 ‘인간극장’의 포맷을 표절했다는 이유로 법원에 방송중지 가처분신청을 냈고, 일부 시청자들은 올 초 인기가 높았던 MBC ‘인어 아가씨’가 대만 드라마 ‘안개비 연가’를 모방했다는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우리 방송계의 표절의 심각성을 단적으로 보여준 것은 1999년 일본 도쿄방송(TBS)의 자사 프로그램의 SBS 표절에 대한 항의 표시와 일본 시사주간지 AERA의 보도다.

TBS는 SBS의 일부 프로그램이 자사 프로그램의 형식과 내용을 표절했다며 공식 문제제기를 한 바 있다. 또한 AERA는 ‘한국TV 들치기 유행’ (1999년 12월 8일자)이라는 기사를 통해 한국 방송이 표절을 일삼고 있다며 30여개가 넘는 프로그램에 대한 일본 프로그램의 표절과 모방의 정도를 상세히 보도했다.

물론 표절의 심각성을 알린 것은 외국만이 아니다. 한국방송영상산업진흥원도 지난 1998년부터 조사보고서를 통해 우리 방송의 프로그램의 형식과 내용의 표절 정도를 발표하고 있다.

이처럼 요즘 방송에서 이슈가 되고 있는 표절(剽竊)은 법률상의 용어가 아니라 우리 생활에서 관행상으로 사용되는 단어로 영어로는 ‘plagiarism’ ‘piracy’ ‘crib’ 등으로 표현되며 남의 작품의 어구나 문장 또는 이름을 무단으로 빼내서 자기 작품으로 속여 발표하는 도용(盜用)을 뜻한다.

근래 들어 프로그램, 영화, 가요 등 대중문화 콘텐츠나 학술적 저작, 문학 등 문화 콘텐츠가 다른 콘텐츠의 형식과 내용을 도용하는 것으로 의미가 확대됐다. 흔히 표절은 베끼기, 모방, 복제와 혼재돼 사용되고 있다.


문화산업 전반에 역기능

표절은 정신의 도둑으로 미시적 차원에서는 저작자의 창착 의욕을 감퇴시키고 재산권을 침해하는 것이며 거시적으로는 한나라의 문화 생산역량을 떨어뜨리고 문화산업의 인프라마저 황폐화하는 역기능을 한다. 표절 의혹이 방송계에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는 것은 다양한 이유가 있다. 자본과 인적자원의 부족으로 방송 초창기부터 오랫동안 미국이나 일본의 콘텐츠를 상당 부분 표절해왔고 그러한 관행이 상당기간 지속됐기 때문에 프로그램이 비슷한 분위기만 나도 표절 의혹이 제기되는 것이다.

과거 한때 방송사들은 프로그램 개편을 앞둔 한 두 달전 일부 연출자를 일본에 보내 일본 프로그램을 대량으로 복사해 우리 프로그램으로 전환하는 일도 있었다는 방송 관계자의 전언은 우리의 표절 관행이 얼마나 심했는 지를 보여준다.

또한 인터넷의 발달, 방송과 통신의 융합, 영상의 국제화 그리고 디지털 기술의 혁명으로 새로운 영상환경을 맞으면서 복제 및 가공이 쉬워지면서 예전보다 훨씬 고도의 모방과 표절 기술이 개발돼 교묘하게 다른 프로그램을 모방 또는 표절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모방과 표절에 대한 기준이 명확하지 않고 표절에 대한 규제나 심의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현실도 방송계에서 표절이 적지 않게 등장하는 이유로 작용한다. ‘도입부 2소절, 중간부분 4소절이 유사하면 표절로 단정한다’는 가요 표절 기준처럼 방송은 창작과 표절의 한계를 무 자르듯 명확하게 선을 그을 수 없다는 이유 때문에 기준 마련이 쉽지 않지만 이 부분에 대해 방송위원회와 방송사의 확실한 근거 설정이 시급한 실정이다.

또한 방송위원회와 방송사 등의 표절 심의와 감독 소홀도 방송의 표절과 모방 문제를 심화시키고 있다. 그 동안 표절이 문제가 돼 방송위가 징계를 취한 것은 거의 없으며 대표적인 사례가 1998년 MBC가 방송한 ‘청춘’이다.

‘청춘’이 일본 드라마를 그대로 베껴 언론에서 줄기차게 문제 제기를 하자 그때야 사후약방문격으로 방송위가 조사를 한 뒤 연출자와 방송사에 징계를 내렸다. 그리고 무엇보다 일부 방송 제작진의 안이한 제작 관행과 표절과 모방에 대한 윤리 의식 결여가 표절 관행을 근절하지 못하는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반면 최근 일고 있는 네티즌과 일부 언론의 표절 의혹 제기 역시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표절문제는 의혹 제기만 되더라도 창작자(연출자)에게 치명적인 영향을 주고 심지어 연출자를 현장에서 사라지게 하는 위력이 있다. 이런 상황인데도 일부 네티즌들은 정확한 내용과 형식 그리고 캐릭터, 진행자의 진행 방식 등 총체적이고 객관적인 검토와 판단, 근거제시 없이 분위기가 비슷하다는 이유로 너무 쉽게 표절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또한 일부 언론이 표절의 근거가 되고 있는 원작과 표절 의혹 작품간의 전문적인 비교나 검토, 법리적인 문제의 판단, 그리고 전문가의 의견 청취 등의 실체적 접근이나 절차 없이 단순히 네티즌의 표절의혹 제기만을 근거로 보도하는 것은 표절 문제의 발전적 해결을 위해서 지양되어야 할 관행이다. 표절 의혹을 제기했다가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되면 ‘아니면 말고’식의 보도 태도는 이제 근절되어야 할 언론 보도 관행이다.

현재 표절은 방송만의 문제가 아니다. 영화, 가요, 패션을 비롯한 대중문화뿐만 아니라 전문적인 학자들의 논문, 문학 작품 등 순수문화에도 전반에 걸쳐 있다. 이제 표절 문제를 더 이상 강 건너 불 구경하듯 방치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방송, 애니메이션, 가요 등 본격적인 일본 대중문화 개방을 앞둔 시점이기 때문이다.

배국남 대중문화평론가


입력시간 : 2003-11-20 17:15


배국남 대중문화평론가 knbae24@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