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식의 문화읽기] 삶의 다양성과 문화적 관점


“지난 한 해 동안 접했던 영화와 음악 중에서 가장 인상 깊은 작품은 어떤 것들인가요?”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방송작가 P의 물음 때문이었을까. 순간적으로 기억의 시계바늘이 뒤로 달려가는 것을 느낀다. 점수 매기고 순위 가리는 일에 취미가 없기는 하지만, 좋은 느낌으로 남아있는 작품들을 거론하면 되겠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생각을 정리해 본다.

외국 음악 중에는 ‘콜드플레이’(coldplay)의 ‘in my place’가 기억에 남는다. 2002년 중반에 발표된 노래이지만 최근에 발표된 라이브 앨범의 수록곡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힙합 중에는 마이너리티의 감수성이 배어나는 ‘블랙 아이드 피즈’(black eyed peas)의 ‘Where is the love'가 좋았고, 일본의 시부야 계열인 하버드(harvard)의 음반 ‘lesson’은 풋풋하면서도 세련된 음악적 감수성을 보여주었다. 국내 밴드 중에는 ‘스웨터’(sweater)의 두 번째 앨범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다. 스웨터는 혼성 모던락 밴드인데, 평범한 듯하면서도 비범한 음악을 들려준다. 이들의 음악에는 낮은 수준의 기분 좋은 중독성이 있다.

영화는 많은 매체에서 관심을 가지기 때문에 따로 이야기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만약 다시 보고 싶은 영화를 고르라고 한다면, 크리스마스를 겨냥하고 개봉된 ‘러브 액츄얼리’(love actually)를 꼽고 싶다. ‘러브 액츄얼리’는 얄미울 정도로 상업적인 영화이다. 사랑과 관련된 10개의 작은 이야기들을 모아 놓은 로맨틱 코미디의 모듬정식이라 할 수 있는데, 포르노 대역 배우가 등장하는 에피소드를 빼버린 아시아용 버전을 배급함으로써 ‘전체 관람가’ 등급을 확보했다. 또한 주옥 같은 노래들을 영화에 적절하게 배치함으로써 극장을 나서자마자 사운드 트랙 앨범을 사야겠다는 욕망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치밀한 마케팅 전략에 대한 심정적인 거부감이 생겨나지는 않는다.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영화가 워낙 잘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감독을 맡은 리처드 커티스는 ‘네번의 결혼식과 한번의 장례식’ ‘노팅힐’ ‘브리짓 존스의 일기’의 각본을 썼던 사람으로 유명하다. 커티스의 영화들은 삶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는 사랑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사랑은 절대적인 가치가 아니라 삶을 이끌어 가는 주제동기(leitmotif)로 기능한다. 달리 말하면 삶을 견인하는 초월적인 목표가 아니라 삶 속에서 다양하게 변주되는 음악이 사랑인 셈이다. 삶과 사랑의 음악적 변주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의 영화에서 사랑은 평범한 일상 속에 자리를 잡는다. 그리고 삶과 사랑이 변주되는 일상 속에서 인간에 대한 애정, 친구들 사이의 우정, 그리고 연인에 대한 사랑이라는 벽돌들을 정교하게 쌓아올린 에피소드들이 제시된다. 커티스의 영화에서 사랑의 다양성은 삶의 다양성이며, 다양한 삶과 사랑은 각자의 고유한 자리들을 갖는다.

삶과 사랑의 다양성을 긍정하는 영화답게, 러브 액츄얼리에서는 주인공을 확정할 수 없다. 주인공이 아예 없거나, 주인공이 너무 많거나, 등장인물 모두가 조연인 영화이다. 등장인물 모두가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살아갈 따름이다. 주인공이 없다는 것은 우리가 사는 세계가 하나의 관점에서 기술(記述)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데, 영화는 삶을 내려다보는 초월적인 관점 대신에 삶의 다양한 지평들을 모아놓은 ‘기대의 콜라주’를 제시한다. 쿠엔틴 타란티노의 ‘펄프 픽션’이 폭력의 미학을 통해서 주인공의 자리를 지워나갔고, 로버트 알트만의 ‘숏컷’이 늪과 같은 일상의 마력 속에 주인공을 함몰시켰다면, 러브 액츄얼리는 삶과 사랑의 다양한 변주 속에서 주인공의 자리를 흐릿하게 만든다.

눈에 띄는 것은 로맨틱 코미디라는 장르에 대한 유연하면서도 전복적인 태도이다. 리처드 커티스는 로맨틱 코미디의 양식화된 문법을 적절하게 활용하는 동시에 장르의 문법을 수정한다. 여기에는 장르는 영화를 찍어내는 붕어빵 기계가 아니라 세계를 이해하고 서술할 수 있도록 하는 독특한 시선이어야 한다는 미학적인 태도가 가로놓여져 있다. 장르는 영화를 진부한 것으로 만들 수도 있지만, 동시에 영화의 새로움을 입증할 수 있는 영화 내부의 맥락이다. 너무나도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당연한 이야기를 실천하는 영화는 결코 많지 않다. 어설프게 장르의 문법을 파괴하기보다는 장르의 문법에 내재된 생산성들을 적절하게 불러낸 영화로서 한동안 기억될 것 같다.

그렇다면 신년 벽두에 로맨틱 코미디 영화 한 편을 떠올린 이유는 무엇일까. 돈과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천박함의 새로운 경지를 열어 보이는 시대에는, 문화적 다양성과 전복성이 시대의 저급함을 버텨나갈 ?있게 하는 힘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아마도 문화는 삶의 다양성을 즐겁게 기록하는 일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던 듯하다.

입력시간 : 2004-01-02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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