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식의 문화읽기] 맛있는 재즈


음악평론가 임진모는 재즈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흔히 재즈는 어렵다고들 한다. 대중가요나 팝송처럼 몇 번 들어도 쉽게 다가오지 않고, 왠지 고급스럽고 귀족적인 냄새가 난다는 것이다. 하지만 재즈도 초기 입문이 어렵지 그 훈련(?)단계만 벗어나면 한껏 맛있게 즐길 수 있는 음악이다.” 백인중심의 사회에서 노예의 운명을 살아야 했던 한(恨)과 우울을, 흑인 특유의 신명과 영성(靈性)으로 승화시킨 음악이 재즈라는 것은 누구나 아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오늘날의 재즈가 소수의 사람들이 향유하는 난해하고 고급스러운 음악으로 자리를 잡은 것 또한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재즈는 자연발생적인 기원을 가진 하위문화이며, 자기소외와 예술화의 과정을 거쳐서 형성된 대중문화의 타자(他者)이다.

그렇다면 재즈가 이해하기도 어렵고 접근하기도 쉽지 않은 음악이 된 이유는 무엇일까. 먼저 재즈의 중요한 형식인 즉흥연주(improvisation)에서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즉흥연주는 음의 순수성과 절대성을 추구하는 음악적인 실험이자 유희이다. 음을 통해서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음 그 자체의 운동성을 표현하는 과정이기 때문에, 즉흥연주에서는 일반적으로 소통 가능한 의미들이 축소되거나 삭제될 수밖에 없다. 또 다른 이유는 재즈의 발전과정에서 찾을 수 있다. 1930년대를 풍미했던 스윙재즈는 신나게 춤을 추기에 적당한 음악이었지만, 그 이후의 모던재즈는 음악적인 혁신을 거듭했지만 점점 난해해지면서 감상용 음악으로 자리를 잡았다. 로큰롤이 대중음악의 주류로 자리를 잡아가는 과정에서 재즈는 실험적인 예술을 지향하거나 아니면 다양한 장르를 융합(fusion)하면서 음악적인 방향을 찾아나갈 수밖에 없었다.

문화적 환경의 문제도 빼놓을 수 없다. 한국의 라디오는 청취율 경쟁 때문에 아이돌 스타와 10대 위주의 편성이 지배적인 구조를 이루고 있다. 당연히 대중매체를 통해서는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접할 기회가 많지 않다. ‘월드뮤직 속으로’의 저자인 신현준의 지적처럼, 현재 우리가 들을 수 있는 음악은 한국, 미국, 영국의 대중가요에 지나지 않는다. 방송에서는 구두선처럼 공익이라는 말을 반복하고 있지만, 문화적 다양성을 위한 균형감각이 부재한 상황에서의 공익이란 공허할 따름이다. 최근 관심의 대상으로 떠오른 월드뮤직(영국과 미국을 제외한 세계 각지의 민속음악 또는 토속음악)의 경우도, 획일화된 매체환경 아래에서는 유한계층의 호사취미로 고정될 위험이 적지 않다. 방송은 다양한 음악을 가장 저렴하게 들을 수 있는 통로이다. 상대적으로 소외되어 있는 국악, 클래식, 재즈, 월드음악 등에 대한 배려가 필요한 시점이다.

1990년대 초반의 재즈 열풍을 기억한다. 그 당시 재즈는 문화적 아이콘이었다. 드라마에서는 남자배우가 재즈바를 배경으로 색소폰을 연주했고, 립스틱에 묻은 재즈라는 용어가 욕망의 기호로 소비되었으며, 소설가 장정일은 ‘너희가 재즈를 아느냐’며 따져 묻기도 했다. 그리고 그뿐이었다. 10년이 지난 지금 재즈가 어떤 위치에 놓여있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중산계층의 호사취미로 굳어졌을 수도 있고, 재즈의 대중화가 진행 중에 있을 수도 있다. 개인적으로는 월드뮤직에 대한 관심이 재즈를 한국사회의 문화적 맥락 속으로 재도입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문득, 영화 ‘부에노 비스타 소셜 클럽’에서 쿠바 재즈를 들려주었던 콤파이 세군도의 환한 미소가 스쳐지나간다.

분명한 사실은 재즈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많아졌고 인터넷을 통한 커뮤니티 활동도 활발해졌다는 것이다. 여러 사이트 중에서 ‘쉼터’(www.shumtoh.org)의 활동이 눈에 두드러진다. 동호인들의 친목 모임이었던 쉼터가 커뮤니티 활동을 펼쳐나가기 시작한 것은 2001년 10월의 일이었다. 그로부터 2년 남짓한 시간이 지난 현재, 쉼터의 회원은 1만3,497명이며 36만978명의 방문객이 다녀갔다. 쉼터가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이유는 단순하다. 재즈에 대한 순수한 애정과 재즈를 공유하는 즐거움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임을 끌어가는 집행부가 있지만 이들에게서 발견하는 것은 고수의 권위가 아니라 자기희생적인 열정이다. 본업에 바쁜 와중에도 매주 새로운 아티스트를 소개하고 모임을 꾸려나간다. 윗물이 맑아서 그럴 것이다. 쉼터에는 음악적 경험과 지식을 과시하는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다.

쉼터를 감싸고 있는 정서적인 분위기는 공감과 존중이다. 셀로니우스 몽크가 낯설면 눈치 볼 것 없이 어렵다고 말하면 되고, 존 콜트레인에 대해 물으면 조만간 친절한 답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재즈의 다양함을 존중하고 취향의 차이를 긍정하는 모습들이 참으로 매력적이다. 겸손한 사람들이 만드는 음악사이트를 들여다보면서, 문화는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나누고자 하는 사람들의 것임을 깨닫는다.

입력시간 : 2004-01-07 21:40


주간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