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과 거짓을 만드는 승부사들생소한 직업을 가진 캐릭터들이 펼치는 두뇌게임

[시네마 타운] 런어웨이
진실과 거짓을 만드는 승부사들
생소한 직업을 가진 캐릭터들이 펼치는 두뇌게임


‘배심원 컨설턴트’라는 직업을 들어본 적이 있는지? 영화 ‘런어웨이’는 피고와 원고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법정 공방이 아니라 배심원 컨설턴트라는 특이한 직업을 가진 캐릭터들이 펼치는 심리전을 다루고 있다.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는 작가인 존 그리샴의 원작이라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긴장감을 추측할 수 있지만, 거기에다 진 해크만, 더스틴 호프만이라는 두 걸출한 배우가 출연하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기대가 되는 영화다.

영화는 아주 가정적인 아버지인 증권 브로커의 바쁜 하루에서 시작된다. 여느 때와 다름없던 월요일 아침, 회사에 무장강도가 침입하고, 암거래를 통해 구입한 총으로 직원들을 사살하는 사건이 터진다. 2년 후 부인인 셀레스트 우드(조애나 공)는 정의로운 변호사 웬델 로(더스틴 호프만)와 함께 총기회사를 상대로 법적 대결을 펼친다. 총기회사는 더우드 케이블(브루스 데이비슨) 변호사와 랜킨 피츠(진 해크만)라는 유명한 배심원 컨설턴트를 고액을 주고 고용한다.

배심원들의 약점으로 재판을 조작

랜킨 피츠가 하는 일은 법정에 출석하는 변호사의 가방과 신체에 녹음기와 카메라를 설치해 법정에서 배심원을 선택할 때 자신들에게 유리한 배심원을 선택하도록 지시하고, 배심원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해 그들의 약점을 파악, 재판의 결과를 조작하는 것이다. 그는 지하창고에 첨단 작전 본부를 설치하고 각 분야의 실력자들과 팀을 이뤄 치밀하게 계획하고 실행에 옮긴다.

그러나 랜킨 피츠가 계획대로 모든 것이 잘 진행되고 있다고 생각할 때, 말리(레이첼 와이즈)라는 정체불명의 여성이 나타나 랜킨 피츠와 웬델 로 두 사람에게 엄청난 거래를 제시한다. 말리는 자신과 배심원 중 한 명인 니콜라스 이스터(존 쿠삭)가 거래 조건을 수락하는 쪽을 위해 결과를 조작하도록 돕겠다며 능력을 보여준다. 랜킨은 그녀의 제안에 불안해 하고, 랜킨의 술수에 의해 정의로운 방법으로는 법정에서 승소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느낀 웬델도 그녀의 제안을 심각하게 고민한다.

한편 니콜라스는 배심원으로 출석하라는 통지서를 받았을 때부터 ‘배심원이 싫다’며 주변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면 빠져나갈 수 있겠느냐’고 물어보고 다닌다. 배심원으로 선정되고 나서도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배심원이 된 것에 불만에 표시한다. 그러나 그가 랜킨과 다를 바 없는 배심원 컨설턴트이라는 사실이 조금씩 밝혀지면서 영화의 극적 흥미는 고조된다. 결국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던 그의 정체가 벗겨지게 된다.

랜킨은 말리와 니콜라스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갖가지 방법을 동원한다.그 과정은 랜킨이 말리의 제안을 받아들이느냐 마느냐의 절대절명의 순간과 엎치락 뒤치락하면서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게다가 화면은 전형적인 법정 장면처럼 배우의 동선을 부드럽게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스테디 캠이나 포터블 카메라로 촬영돼 박진감이 넘친다. 사건과 사건이 뒤엉키면서 정신없이 돌아가기 때문에 바짝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퍼즐의 열쇠들을 놓치기 십상이다.

또 배심원 컨설턴트라는 직업이 생소하듯이, 랜킨의 아지트인 지하 본부의 대형 모니터 화면들과 법정 장면이 빠르게 교차되는 속도감도 색다르다. 4명의 주연배우 외에 10명이 넘는 배심원을 세심하게 따라가며 그 얼굴과 역할을 기억하는 일도 고도의 정신 집중을 요구한다.

랜킨이 폭력과 술수를 사용해 배심원들을 매수하거나 위협하는 악랄한 인간이라는 점은 계속해서 웬델과 비교되면서 더욱 뚜렷해진다. 웬델은 소시민적인 양복과 소탈한 웃음을 지으며 공정하고 정의로운 방식으로 인명을 구하기 위해 법정에 서지만 랜킨은 돈과 권력을 위해 무대뒤에 숨어 승부를 조작한다. 더구나 그는 자신을 비난하는 웬델에게 “나는 절대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다”며 웬델을 비웃는다.

불꽃튀는 대결구도로 빛나는 연기

일반적인 법정 드라마라면 랜킨보다 웬델이 더 영웅적인 주인공으로 주목을 받겠지만 영화 ‘런어웨이’는 오히려 랜킨이라는 캐릭터에 더 시간을 할애한다. 랜킨은 뉴올리안즈에 도착해 택시를 타고 처음 영화에 등장하는 장면에서부터 능력(?)을 발휘한다. 택시 운전사는 그에게 “角汐堧?것 같다”고 말하자 랜킨은 차 안에 있는 주차티켓, 십자가 목걸이, 사진을 쳐다보며 운전사의 사생활을 정확히 짚은 뒤 조언까지 해준다. 랜킨은 배심원을 선정할 때도 이처럼 몇 가지 외형만 보고 그 사람의 성격이나 상황이 자신에게 유리한지 아닌지를 순간적으로 판단하곤 한다.

랜킨은 또 그 같은 예지력으로 법정에서 벌어지는 게임을 즐긴다. 그는 첫 공판에 나가 200년 묵은 마호가니 가구와 가구 광택제, 싸구려 향수, 사람들의 냄새가 뒤섞인 법정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늘어놓지만 실제로는 그 냄새들 속에서 벌어지는 긴장감은 물론, 사람들의 속성을 지켜보며 쾌락을 느낀다. 랜킨은 극중에서 단순하게 악한 인물은 아니다. 철저한 분석력과 지도력을 가졌지만 왜곡된 승부욕으로 악명이 높은 매력적인 캐릭터로 묘사된다.

랜킨과 불꽃 튀는 경쟁을 벌이는 인물은 정의로운 변호사 웬델이 아니라 강한 목소리의 소유자 말리다. 말리는 협상과 심리 파악의 고수인 랜킨을 상대로 숨막히는 결전을 벌이며 한치의 양보도 용납치 않는다. 니콜라스의 연인이자 동료로서, 부드럽고 유연하게 배심원을 포섭하는 니콜라스와는 달리 냉혈한 랜킨을 상대로 위협적인 대결을 펼친다.

영화 ‘키스 더 걸’, ‘돈 세이 워드’ 등 서스펜스 스릴러로 유명한 게리 플레더 감독이 꼭 집어 장르를 이야기하기 어렵다고 밝혔듯이 ‘런어웨이’는 법정 드라마와 스릴러가 버무려진 흥미진진한 영화다. 덧붙이면 대사가 있는 배우가 모두 75명인데 그 중 25명이 법정에서 중요한 역할로 등장한다. 영화를 주의깊게 지켜봐야 하는 이유이다. 영화에는 또 15명이 한 방에 있는 장면들이 많아 인물 구성상으로는 대작이지만 어느 누구도 내러티브의 전개를 방해하거나 필요한 만큼 이상의 주목을 받지도 않는다.

시네마 단신
   

'열정, 대한민국 1950~2004' 한국영화 회고전

'맨발의 청춘' '미워도 다시 한번' '겨울여자' '서편제' '친구'. 20대 청춘에서 60대 노년까지 각 세대의 심금을 울렸던 한국 영화의 주요 작품들이 총출동하는 사상 최대의 한국영화 회고전 '열정, 대한민국 1954-2004'이 1일부터 15일까지 서울 허리우드극장에서 열린다. 상영작 리스트에는 상영 당시 사회적 신드롬을 일으킬 만큼 폭발적인 흥행을 기록했던 인기작들과 대중성은 없지만 한국 영화의 내적 성장을 이야기할 때 빠질 수 없는 작가주의 영화들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프랑수와 오종 특별전

한국시네마테크협의회는 2월9일부터 열흘간 서울아트시네마에서 프랑수와 오종 특별전을 개최한다. '바다를 보라', '시트콤', '크리미널 러버', '워터 드랍스 온 버닝 락', '사랑의 추억', '스위밍 풀' 등 장편 여섯 편과 '베드 신', '어떤 죽음'을 포함한 다섯 편의 단편이 오후 1시 30분부터 하루 네 차례씩 상영된다.


입력시간 : 2004-01-09 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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