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식의 문화읽기] 신어에 비춰진 사회상


국립 국어연구원에서 흥미로운 보고서를 발간했다. ‘2003년 신어(新語)’라는 제목의 보고서는 지난 한 해 동안 언론과 방송에서 사용된 656개 신어의 의미와 출전을 밝혀 놓았다. 인간은 언어로 사유하고 소통하는 사회적 동물이다. 따라서 언어에는 해당 시대의 특징을 반영하는 사유의 흔적과 사회적 무의식이 드러난다. 그렇다면 2003년에 사용된 새로운 말들을 통해서 한국사회의 흐름을 짚어 보는 것은 어떨까.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고용의 불안정이다. 1월에는 ‘사오정’(45세 정년), 3월에는 ‘오륙도’(56세까지 일하면 도둑), 5월에는 ‘육이오’(62세까지 일하면 五賊), 10월에는 ‘삼팔선’(38세에 퇴직) 그리고 12월에는 ‘이태백’(이십대의 태반이 백수)이 불안과 냉소의 뉘앙스를 풍기며 널리 사용되었다. 지난 1년 동안 경제 불황에 따른 심리적 억압에 시달려 왔으며, 이십대부터 육십대까지 고용의 불안정성 앞에 무차별적으로 노출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

경제적인 억압이 가중되는 상황이다 보니 ‘잘 사는 일’ 또는 ‘웰빙’(well being)이 사회문화적인 화두로 자리를 잡았다. 웰빙은, 크게 3 가지의 층위가 중첩되어 있는데, 건강하게 살고 부유하게 살고 여유롭게 사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건강(健康), 금전(金錢) 그리고 여가(餘暇)는 오늘날 한국인들의 일반적인 욕망인 것이다. 약초를 의미하는 허브(hub)에 대한 열광에는 건강하고 쾌적한 삶에 대한 관심이 나타나며, ‘크레디슈랑스’(credisurance)나 ‘펀듀랑스’(fundurance) 등과 같은 용어에서는 경제적 불안정성 속에서 안정성과 지속성을 보장받고자 하는 욕망을 읽어낼 수 있다. 또한 주5일제 시대를 맞아 ‘신주말(新週末)’의 개념이 확립되었는데, 새롭게 등장하는 레저 용어들은 여가를 통해서 삶의 질을 고양시키고자 하는 사회적 관심을 반영한다.

사회문화적인 차원에서 관심이 가는 말로는 ‘노짱’ ‘얼짱’ ‘몸짱’ 등과 같은 ‘짱’과 관련된 말들이 있다. 짱은 1990년대 후반부터 사용된 말인데, 반장(班長)처럼 감투를 의미하는 ‘장’과 일본어의 애칭인 ‘짱’에서 연원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 이후에는 최고라는 의미와 짜증의 축약어라는 두 가지의 용법으로 사용되고 있다. 예를 들면 얼짱은 얼굴이 최고인 사람과 얼굴이 짜증나는 사람으로 해석할 수 있다. ‘짱’에 내포된 두 가지 의미, 즉 최고에 대한 열광과 일상화된 짜증은 우리시대의 무의식을 살짝 드러내 보인다.

또 다른 말로는 ‘사람들’을 의미하는 족(族)과 사회현상을 지칭하는 증후군(症候群)이 눈에 띈다. 비싸야만 물건을 구입하는 기펜족(Giffen족), 임시직으로 생활하는 도시 전문직을 의미하는 더피족(duppie族:Depressed Urban Professional)을 비롯해서 정말로 많은 ‘족’들이 우리와 함께 살고 있다. ‘족’과 관련된 단어들은 폰카족이나 허브족처럼 문화적 취향을 표시하거나. 딘스족(Double Income No Sex, 섹스를 하지 않는 맞벌이 부부)처럼 생활양식의 변화를 나타낸다. 이러한 단어들은 우리사회에서 취향의 부족화(部族化)와 생활양식의 다양화가 진행되고 있음을 증명하는 예라고 하겠다.

돌이켜 보면 2003년은 신드롬의 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예전 같으면 ‘~열풍’ 또는 ‘사회현상’이라고 할 만한 일들이, ‘페트 신드롬(pet syndrome)이나 이효리 신드롬에서 볼 수 있듯이 증후군(syndrome)이라는 명칭을 얻었다. 신드롬이나 ‘폐인’이라는 말에는 사회병리학적인 관심이 투영되어 있다. 증후군은 원인이 분명하지 않거나 하나의 원인을 지적할 수 없는 복합적인 증세를 보이는 병에 붙이는 명칭을 말한다. 신드롬과 관련된 말들에는, 현상과 원인 사이에 복잡성이 증대하고 있는 한국사회의 모습이 반영되어 있으며, 동시에 문화현상에 대해 집중적인 관심을 종교적 숭배나 중독성의 차원으로 읽어내려는 무의식이 드러난다.

무척이나 공들여 만든 보고서이지만 아쉬운 점도 없지 않다. 11월의 신어로 선정된 스와핑(swapping)의 경우, 사회적인 문제가 된 것은 작년의 일이지만 몇 년 전부터 이 용어가 사용되었다. 2001년에 개봉된 한국영화 ‘클럽버터플라이’에는 스와핑이 중요한 사건으로 다루어진다. 또한 신어로 인정하고 있는 모즈룩(mods look)의 경우 1960년대 중반 이후 영국의 젊은이들 사이에서 유행했던 패션이며, 그 중심에는 비틀즈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인질이 납치범을 이해하고 옹호하는 스톡홀름 신드롬(헬싱키 신드롬)이나, 납치범이 인질에 대해 인간적인 애정을 느끼게 되는 리마 신드롬은 1970년대 중반부터 사용되던 심리학 용어이다. 이러한 일은 새롭게 나타난 신조어와 화제가 되었던 유행어 사이에서 혼선이 생기면서 생겨난 일상적인 실수일 것이다. 보고서를 읽는 동안 지난 1년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가면서 사회와 언어의 구체적인 관계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언어들 사이에 놓인 거울이 사회를 비추고 있었다.

입력시간 : 2004-01-14 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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