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을 잉태한 요염한 여인의 입술

[이유미의 우리풀 우리나무] 현호색
봄을 잉태한 요염한 여인의 입술

아직 겨울이 한창인데도, 창 밖으로 보이는 햇살을 바라보고 있자니 그 빛이 하도 부드럽고 포근하여 곧 봄이 올 것만 같다. 부드럽게 대지를 감싸는 노란 햇살, 코끝으로 느껴지는 땅 냄새, 그 안에서 움을 틔우는 새순들의 향기. 그런 상상 속에서 그런 향긋한 봄 내음을 따라, 설레이는 마음을 쫓아가보면 아직은 마른 가지와 누렇게 남아 있는 겨울의 흔적 사이에서 피어나는 반가운 꽃들이 있는데 바로 현호색이다.

현호색(왼쪽), 왜현호색

현호색은 우리나라의 구석구석 어느 곳에서나 자란다. 도심과 조금 떨어진 한적한 시골 풍경 속에서는 어김없이 나타나며 심신 산골을 헤매다가 문득 눈에 들어와 유난히 반가운 꽃이다. 겨우내 얼었던 대지가 몸을 녹이면 가장 먼저 싹을 틔우고 곧바로 꽃을 피워내 이른 봄 한 달 정도 살다가는 열매를 맺는다. 다른 많은 식물들처럼 꽃이 지고 나면 잎이라도 달고서 여름을 보냈다가 가을에 결실하고 겨울을 앞에 두고 죽는 것이 아니고, 봄에 이 모든 일을 마치고는 흔적도 없이 이 땅에서 사라져 버리므로 봄이 무르익기를 기다려 일을 시작하는 게으른 식물학자나 산사람들에게는 좀처럼 그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현호색은 현호색과에 속하는 여러해살이 풀이다. 현호색과에 속하는 많은 식물들이 그러하듯 매우 독특한 꽃모양을 하고 있다. 손가락 두 마디쯤 길이로 옆으로 길게 뻗은 보라빛꽃은 한쪽 끝이 요염한 여인의 벌어진 입술처럼 위 아래로 갈라져 벌어지는데 진짜 입술인양 꽃잎 두 장 모두 가운데가 약간 패어 있다. 꽃이 약간 들리면서 반대쪽 끝으로 가면 아까와는 대조적으로 뭉툭하게 오므라져 있다. 현호색 종류를 총칭하는 학명의 속명 콜리달리스(Corydalis)는 종달새란 뜻의 희랍어에서 유래되었는데 바로 꽃의 이러한 특징이 종달새의 머리깃과 닮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특히 꽃색이 신비스러운데 연보라색, 보라빛이 도는 하늘색, 분홍색에 가까운 보라색 등 전체적인 분위기는 같은 비슷비슷 하지만 분명히 다른 여러 색깔의 꽃들이 함께 모여 핀다. 현호색의 뿌리를 거두면 그 중간에 괴경이라고 하는 덩이줄기가 달려 나온다. 이 괴경은 현호색의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인데 이른 봄 밥상에 올라와 입맛을 돋구는 달래처럼 생겼지만 두 배쯤 크다.

현호색이 정말 재미있는 것은 올망졸망 모여 있는 현호색은 자세히 살펴보면 전부 그 모양이 다르며, 그 잎 모양에 따라서 전부 다른 종류로 구분되어 각자의 이름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잎이 대나무 잎과 같이 길쭉한 것은 댓잎현호색, 빗살무늬가 그어져 있으면 빗살현호색, 잎이 잘게 갈라져 있는 애기현호색, 잎이 크게 작게 서로 다른 크기로 갈라져 있으면 그냥 현호색, 셋으로 갈라져 있으면 왜현호색, 등등 아주 많다.

한방에서는 현호색 뿌리에 달려있는 괴경을 약재로 많이 이용한다. 여러가지 약효가 있으나 특히 진통효과가 뛰어나서 두통이나 치통 등의 진통제로 사용하고, 부인들이 혈액순환을 도와 한기를 다스리는데 이용하기도 하며, 타박상에도 효과가 있다고 한다. 현호색은 보통 다른 약재와 함께 처방하며 한의사의 손에서는 약이 되지만 그 자체에 유독성분이 있어서 전문적인 지식없이 마구 사용하면 위험하다.

한 계절을 살다 서둘러 결실하고, 그 윤기나는 까만 씨앗을 대지에 뿌리고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나면, 현호색이 만들어 내던 그 보라빛 언덕엔 양지꽃, 애기똥풀, 피나물 같은 꽃들이 노란색 꽃물결을 이루며 봄이 무르익는다.

이유미 국립수목원 연구관


입력시간 : 2004-01-16 14:53


이유미 국립수목원 연구관 ymlee99@foa.g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