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이 남긴 어두운 기억의 조각들한국전쟁사의 그림자와 그 속에 갇힌 진실 끄집어내기

[문화] 오태석 연극 <자전거>
분단이 남긴 어두운 기억의 조각들
한국전쟁사의 그림자와 그 속에 갇힌 진실 끄집어내기


노장 오태석(64)씨가 다시 자전거에 올라 타고 비극의 역사를 주유한다. 그의 극단 목화 레퍼터리컴퍼니가 공연중인 ‘자전거’는 분단이 남긴 어두운 기억들은 여전히 살아 있다는 사실을 연극적으로 보여 준다. 분단의 역사라는 소재는 최근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나 ‘실미도’에서 보듯 우리 민족 최대의 소재일 뿐 아니라, 잘만 되면 성공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그러나 몇 백억 제작비에, 몇 백만 관객 동원이라는 엄청난 물량 공세가 과연 역사적 진실과 동의어가 될 수 있을까. 그것은 자본력과 영상적 상상력이 결합돼 빚어 올린 또 다른 환(幻)은 아닐까. 연극 ‘자전거’는 분단의 진실을 코딱지 만한(스크린 속의 현장에 비기자면) 소극장 공간에서 압축적으로 보여 준다.

그의 극장 아룽구지는 지하에 무대가 있다. 그런 건물 1층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 관객은 이미 이 연극에 동참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챈다. 문둥이 시인 한하운 시인의 ‘보릿고개’가, 소복을 입은 두 밀랍 인형이 관객을 먼저 맞는다. 한 인형의 안와(眼窩)는 끔찍하게도 움푹 파여 있다. 포탄 파편으로 입은 부상일까, 아니면 잔인한 역사의 흔적일까. 1 시간 30분 동안의 무대는 한국전쟁의 원형질 속으로 객석을 몰고 간다.

결코 복제는, 자기 표절은 하지 않는다는 연극쟁이의 뚝심이 이번에는 어떻게 발휘됐을까? 1983년에 김우옥씨의 연출로 초연했던 이 작품은 21세기 무대에서 어떻게 변했을까? 다 아는 바, 오씨는 자신의 고향 말씨인 충남 서천의 화법을 서울 한 바닥 무대에 능청스레 올려 놓는 데 천부적인 장기를 보여 왔다. 그러던 그가 이번 작품에서는 몸을 크게 뒤척였다. 경남 산골의 말투가 대학로 바닥에서 고스란히 살아 난 것이다. 그것은 우선 거창 땅이 1951년 빨치산 토벌을 빌미로 민간인 700여명이 희생된 비극의 현장이라는 사실에 근거한다.

어느덧 65세. 옛날식으로 말하면 이순을 넘겨 고희를 바라 보는 나이지만, 요즘식으로 말한다면 버전 업의 미덕을 실천해 보이는 데 주저함이 없다. 표절에 복제를 마다 않는 그것은 결과적으로 역사적 진실에 바싹 접근하는 효과를 낳았다. 거창 출신의 연극인 백하룡 등을 초청해 집중 실시한 방언 교육 덕에 참가 배우들의 입심은 현지 주민이 울고 갈 판이다. 극중에 나오듯, 정확한 억양이 뒷받침되지 않고서는 도저히 이해될 수 없는 “가아가 가가(그 애가 걔냐)?”라는 식의 말도 덕분에 너끈히 재현된다.

오씨는 이번 작품에서 음악이란 언어에 못지 않는 극의 요소라는 점을 입증한다. 우리의 전통 가락이 무대를 휘감는 가운데, 들려 오는 몇 편의 이질적인 객석의 관심을 무대로 집중시키는 효과를 자아 낸다. 모차르트의 ‘마술피리’ 테마 가락은 어린 시절의 추억을, 러시아어로 불려지는 육중한 진혼곡에는 민간인 학살 장면을 떠오리게 한다. 입구에 있던 한하운의 시는 무대에서 전쟁 뒤 비참하게 살아가는 두 나환자들과 연결된다.

“‘자전거’는 나에게 한국 희곡 100년사에서 가장 매력적인 작품”이라고 연극 평론가 김남석씨는 말한 바 있다. 참여 배우의 생각 역시 마찬가지다. 이번 작품에서 한의원역으로 동참하고 있는 극단 목화의 창단(1973년) 단원 정진각(54)씨는 “오 선생의 작품 중 한국적 정서가 가장 진한 작품”이라며 “지금껏 못 해 본 역할이 오면 기꺼이 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그렇게, ‘자전거’는 또 하나의 전승(傳承)이 돼 가고 있다. 4월 4일까지 (02)745-3966

장병욱 차장


입력시간 : 2004-03-11 15:23


장병욱 차장 aj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