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읽기] 풍경에 빼앗긴 마음


매그넘(Magnum) 풍경전을 보기 위해 인사동 선 갤러리에 도착한 것은 3월 4일 오후였다. 2월 말까지로 예정되었던 전시회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시간적 여유가 충분하다며 차일피일 미루었고 그러다 보니 전시기간을 넘긴 상황이었다. 인연이 있었던 것일까. 소설가 K가 일주일간 연장 전시된다는 사실을 알려주었고, 그 덕분에 호젓한 분위기 속에서 사진을 감상하는 호사를 누릴 수 있었다. 건물 내부에 층층으로 매그넘 회원들의 풍경사진들이 배치되어 있었는데, 풍경사진으로 둘러싸인 또 다른 풍경 속에 들어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진에 대해서는 문외한에 가깝지만, 사진 속의 풍경들과 공존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던 소중한 경험이었다.

매그넘은 1947년에 설립된 사진 에이전시이다. 이제는 전설이 된 4 명의 사진가인 로버트 카파, 앙리 까르띠에-브레송, 조지 로저, 데이비드 세이무어가 창립멤버들이다. 이들은 사진의 독자성과 자율성을 지켜나갔으며, 사진가가 단순히 기능인이 아니라 '작가'라는 사실을 스스로 입증해갔다. 주로 저널리즘을 통해서 활동하는 사진가들의 모임에서 출발했지만 보도사진과 예술사진의 경계를 유연하게 설정하면서, 세계와 인류를 바라보는 보편적이면서도 진보적인 시선을 견지해 나간 것으로 그 명성이 높다. 이번 전시에는 바라보는 사람의 관점에 의해서 구성된 풍경사진, 풍경을 바라보는 사진가의 시선과 감정을 담아낸 사진, 현대 도시의 시각적인 기호와 메시지들을 포착한 사진, 전쟁의 비극적인 상황을 담은 사진, 풍경의 주인공으로서 인간을 음미하고 있는 사진들이 주제별로 선을 보였다.

전시공간 바깥으로 나온 후에도 그 이미지가 선연히 남아있는 몇 장의 사진이 있다. 인도 푸슈카르 지방의 풍경을 신비한 색조로 표현한 브루노 바비의 사진과, 중국의 황산을 수묵담채화의 느낌으로 담아낸 마르크 리보의 사진 앞에서는 좀처럼 발을 떼기가 어려웠다. 프랑스의 해변 풍경을 담은 해리 그루야트의 사진은, 현실과 초현실의 아슬아슬한 경계선 위에 절묘하게 놓여져 있다는 느낌을 주었다. 또한 2차 대전으로 쑥대밭이 된 폴란드의 바르샤바 풍경 위로 교회의 모습을 담은 로버트 카파의 사진은, 인간의 폭력성을 용인하고 있는 신(神)에 대한 피맺힌 항의면서, 폐허 너머로 여전히 남아있을 지도 모를 구원의 가능성에 대한 희구가 느껴지는 작품이었다.

그 가운데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아부다비의 사막 풍경을 보여준 르네 부리의 사진이었다. 저 멀리 해가 지는 바다의 모습이 비스듬하게 보이고, 사막 군데군데에는 가옥과 야자수가 긴 그림자를 드리우며 서 있다. 화면의 중앙에는 약간 굽은 2차선의 아스팔트 도로가 자리를 잡고 있는데, 자세히 보면 낙타 다섯 마리가 행렬을 이루며 걸어가는 모습이 보인다. 사막의 모래 위에는 자동차 바퀴자국이 만들어 놓은 선(線)과 낙타 발자국이 만들어 놓은 무수한 점(點)이 어지럽게 널려 있다. 그리고 인간이 닦아놓은 아스팔트 도로의 아래쪽은 사막의 바람이 몰고 온 모래로 덮여있다.

별다를 것도 없는 사막 풍경에 마음을 주어버린 까닭은 무엇일까. 특정한 대상이 중심에 놓인 풍경이 아니라는 점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중심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풍경이었고, 인간과 자연이 빚어내는 근원적인 허무가 풍경의 주인이었다. 사막이라는 척박한 자연 환경을 개척해 가는 인간들의 몸짓이 곳곳에 흔적으로 남아 있지만, 인간이 만들어 놓은 모든 흔적들을 지워버리게 될 자연의 힘이 화면 전체를 감싸고 있다. 흔적과 삭제의 변증법이라고 할까, 아니면 제행무상(諸行無常)에 이르는 과정이라고 할까. 범속한 언어로써는 도달하기 어려운 경지가 사진에서 배어난다.

왜 많은 사진가들이 전쟁터에, 사막에, 산과 해변에, 산업화된 도시의 폐허에, 장벽으로 둘러싸인 인공낙원에 눈길을 주었던 것일까. 풍경 속에서 인간의 마음과 자연의 길을 더듬어 보고 싶어서였던 것은 아닐까. 어쩌면 스스로 세계의 중심이자 모든 것이라고 여기는 인간의 오만함을 견제하는 힘을 풍경에서 발견하고자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풍경사진 앞에서 잠시 아득함을 느꼈다면, 그것은 마음 속의 오만함을 비워내는 경험을 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문득, 사진을 두고 '인생의 리얼리티에 관한 시(詩)'라고 했던 브레송의 말이 가슴에 와 닿는다.


입력시간 : 2004-03-11 2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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