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희망을 노래하며 클래식과 대중가요 크로스오버

가요사랑을 앓는 아트팝의 개척자 '대중가수 전경옥'
시와 희망을 노래하며 클래식과 대중가요 크로스오버

시를 노래하는 대중 가수가 있다. 1998년에 발표한 첫 앨범 '혼자 사랑' 이후 오랜 공백을 깨트리고 최근 2집 앨범 '사랑앓이'를 들고 돌아온 서울 음대 성악과 출신 전경옥이다. 그녀는 클래식과 대중가요를 크로스오버한, 전에는 접하기 힘들었던 새로운 분위기의 노래를 부른다.

대중 가수에로의 변신은 데뷔 때부터 대중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서울 음대 성악과 출신 중에는 그녀 이전에도 대중 가수로 변신을 한 전례가 있긴 하다. 우선 60년대 중반 샹송가수로 명성을 날렸던 '황혼의 엘리지'의 주인공 최양숙이 첫 번째다. 그녀의 뒤를 이어 68년엔 팝 번안가수로 변신해 젊은층의 폭발적 인기를 모았던 조영남이 등장했다. 이처럼 대중가수로 변신한 선배들은 엘리트 음악도라는 프리미엄으로 큰 성공을 거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분명 전경옥도 대중적 관심을 유도할 조건이 충분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녀는 연예인 같았던 선배들과는 사뭇 다른 활동 반경을 고집하므로, 폭 넓은 대중에겐 여전히 생소한 대상이다.

30대 중반의 늦은 나이에 대중 가수로 변신한 것도 이유일 수 있다. 그녀는 화려한 TV나 밤무대보다는 민족 음악 운동에 합세하여 김순남, 이건우 등 해금된 작곡가들의 가곡과 민족 가극단 금강의 멤버로 민중음악계에서 주로 활동했다. 화려한 무대의 성악가가 언더그라운드 민중가요 계열의 가수로 변신했다? 이쯤 되면 호기심의 차원을 넘어 기인쯤으로 여겨질 만 하다. 하지만 전경옥의 이미지는 조용하고 여성스럽기만 하다.

전경옥은 어린 시절부터 음악을 좋아해 피아노와 하모니카를 배우고 기타 학원까지 다녔다.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라디오 심야 방송을 통해 팝송, 가요, 클래식 등 장르를 불문한 다양한 노래는 물론, 김지하나 이상의 글을 탐독했다. 낭만(이상)과 현실(김지하)이 혼돈 된 시기를 보냈던 셈이다. 그러나 노래 잘하는 친구의 영향으로 고2 때부터 성악 공부를 시작했다. 다소 어두웠던 성품은 노래덕에 밝아졌다.

- 고뇌의 삶을 치유해준 민중가요

곧 음악 콩쿠르를 휩쓸며 '인천에서 가장 노래 잘하는 아이'가 되었다. 자신만만하게 서울음대에 입학했을 때만 해도 그녀는 조수미 같은 프리마돈나를 꿈꿨다. 하지만 80년대의 사회적 분위기가 전환점이 되었다. 어느 날, 아는 사람이 잡혀 가고 사라지는 이상한 현실이 부당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좋은 환경에서 성장한 자신과는 달리 세상엔 불우한 사람도 많다는 고민을 처음으로 품었다. 자연스레 시위에도 참여하며 민중을 위해 무언가를 해야겠다는 신념을 가지게 되었다.

대학 졸업 후 국악, 서양 음악 전공자들과 '모든 장르의 음악을 아우르는 좋은 음악을 해보자'는 취지로 민족음악연구회 창립멤버가 되었다. 공장에 들어가 노동 운동을 하는 친구들과 외국으로 유학을 떠나는 친구 사이에서 갈등도 했다. 하지만 가족의 기대를 저버리는 것이 힘겨웠고, 유학을 택하는 것은 양심을 거스르는 일 같았다. 낮에는 피아노 학원을 하고, 차선책으로 밤에는 구로동의 한 노동자교회에서 실무자로 활동을 했다. 이 때의 활동 탓에 고 박종철이 물 고문당했던 남영동 안가에 눈을 가린 채 끌려가 조사를 받는 고초를 겪기도 했다. 이후 98년까지 12년 간 음악가가 아닌 한 사람으로서의 삶을 살았다.

데뷔 음반은 대중에게 자연스럽게 다가가기 위한 열망이었다. 그녀는 스승이자 작곡가이며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인 이건용의 작품을 노래했다. 이 총장은 예술음악과 대중음악의 벽을 넘어 우리의 이야기와 삶을 담은 민족음악 찾기에 혼신의 노력을 실천하는 음악가. 당시 이 교수도 10년 간의 민족음악 작업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이에 두 사람의 음악을 지지하기 위해 후배, 제자들이 자연스럽게 '음악수용자를 위한 모임'을 결성했다. 무려 800여명이 참여해 음반 사전 예약으로 힘을 실어 줘, 제작비 3,000~4,000만 원을 조성해 전달했다. 이런 특별한 사연을 가지고 탄생한 것이 1집.

- 풍부한 감성으로 읽어낸 시대

이 교수는 "시를 완전히 자기 것으로 노래하는 사람을 별로 보지 못했다. 전경옥은 시를 읽는 사람이다. 그의 목소리나 그가 부르는 선율은 그 시를 전하기 위한 그릇 혹은 수레 같다"고 말한다. 전경옥은 성악을 전공한 음악적 기반을 바탕으로, 시심이 풍부한 감성과 시대를 읽는 정서를 담아 전혀 새로운 예술적 분위기의 대중 음악을 1집에서 시도했다. 그래서 '아트 팝'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탄생시켰다. 당시 한겨레신문등 많은 언론은 '스승의 노래들을 서늘하도록 아름다운 목소리로 클래식과 아트 팝 두 장의 음반에 담아 냈다'고 주목했다. 하지만 언론은 가수의 새로운 음악을 알아보지 못했다. '은사에게 바치는 헌정 음반'으로만 의미가 부여되었다. 이후 전경옥은 동덕여대와 청운대에서 보컬 실기 강의를 해 왔다. 하지만 강단보다는 노래를 부르고 싶어 작년에 다시 음반 작업에 들어갔다.

최근 발매된 2집 '사랑앓이'에서는 1집보다 훨씬 자신에게 맞는 옷을 입어 편안했다. 이번에는 도종환, 안도현, 문익환, 류형선의 시를 노래했다. 특히 민족 음악 연구회를 통해 알게 된 오랜 친구인 작곡가 류형선의 도움은 지대했다. 류형선은 "말이 살아 있고 그 말이 가락과 더불어 멋진 신방을 꾸며 우리의 정서가 살아있는 그런 노래, 전경옥은 자신의 입 언저리에 그런 노래가 꿈틀거리게 하고 싶어 했다"고 말한다.

전경옥은 자신의 노래가 한층 더 대중적인 공간에서 펼쳐지기를 갈망한다. 하지만 장르의 독창성에도 불구, 일반 대중가수들에 비해 다소 무겁게 느껴지는 보컬과 톡톡 튀는 개성이 부족한 점 등은 앞으로 해결해야 될 과제다. 지금은 힘겨운 음악적 환경에서도 자존심을 잃지 않고 자신만의 음악 세계를 위해 그저 고집스럽게 걸어가는 과정이다. 노래가 놀이로만 대접받는 세상 분위기 속에 노래로 상처받은 사람들의 가슴을 어루만지고 싶고, 노래로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싶다는 희망을 품고 사는 전경옥. 그 고단한 대중 음악가의 길은 안쓰럽지만 그래서 더욱 귀하게 느껴진다.

사실 2집은 1년 전에 녹음을 마쳤지만 천신만고 끝에 세상에 나왔다. 그녀는 2집에 대해 "마치 지나간 나의 세월을 보는 듯 애틋하고 각별하다"고 털어 놓는다. 가수가 음반을 낸다는 것은 당연한 일. 하지만 대중적인 인지도나 인기에는 도통 관심이 없기에 그 당연함조차 힘겨웠다. 그녀는 팬들의 열광적 반응이 최상이라고 믿지 않는다. 갈채에 몸을 맏기기 보다는, 더 이상 마음속에 뜨거운 것이 솟지 않을 때 더욱 힘들어 하는 아티스트다.

- 맑고 따뜻한 삶의 노래

"누구의 시처럼 거울 앞에 돌아 온 나이가 되었지만 다시금 세상을 향해 노래한다. 누가 들어주지 않아도 멈추지 않을 것이다. 노래를 할 때, 살아 있다는 맑은 느낌을 받는다. 이 사회에는 왜 진정성이 아닌, 상품 같은 노래만 있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 의식이 내겐 중요하다. 세상을 맑고 따뜻하게 살고 싶은 내 노래의 진정성을 통해 누군가와 만나고 싶다." 2집은 희망이 없어 쓸쓸한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고 추억과 그리움을 전해주는 애틋함이 담겨있다. 그녀의 노래들은 앨범 타이틀처럼 시대의 아픔에 신음해온 작곡자와 가수의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에 대한 '사랑앓이'다.

그래서인가. 최근 침체된 대중 음악계에 활력을 불어넣고, 음악성 및 전문성을 가진 음반들을 찾아 내어 주류음악과 비주류음악의 균형 있는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제정된 제1회 한국대중음악상 크로스 오버 부분에 전경옥은 나윤선, 이병우 등과 함께 후보로 노미네이트되어 경합을 벌이고 있다. 바쁜 공연 활동에 매몰되기 보다는, 일상 생활을 유지하며 노래 활동을 벌이는 전경옥. 그녀는 서두르지 않고, 아주 천천히, 대중 속으로 파고 드는 중이다.

최규성 가요칼럼니스트


입력시간 : 2004-03-18 15:53


최규성 가요칼럼니스트 kschoi@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