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짜가수 정형근의 '세상과 돌아 앉은 26년' 음악적 아성 열고 농사 지으며 세상과 소통

[문화] 스스로 작은 돌이 된 포크계의 전설
괴짜가수 정형근의 '세상과 돌아 앉은 26년' 음악적 아성 열고 농사 지으며 세상과 소통

26년 동안 시대와 장르의 구분을 비웃으며 자신의 창작물 안에서 자신의 음악사를 묵묵하게 써오는 별종 중 별종 가수가 있다. 바로 ‘농사 짓는 가수’, ‘괴짜 가수’ 혹은 ‘엽기 가수’로 불리는 정형근(49)이다.

그는 정말 괴상한 음악을 한다. 작은 소리로 까발리는 듯, 읊조리는 듯한 중저음 창법은 기본이고 동물이 포효하는 듯한 울부짖음, 장난기 가득한 익살에 랩도 구사한다. 50의 나이를 목전에 둔 그의 음악을 듣다 보면 경박한 듯 하면서도 너무도 진지해 갈피를 잡기 힘들다. 노래 제목도 평범치 않다. ‘ 얼래리꼴래리’, ‘ 룰루랄라’ 등등. 한국적인 선율과 세련된 재즈 향이 묘한 앙상블을 이뤄 따스함과 가슴 찡한 멜로디를 전해 주는 ‘돌’, ‘ 귀향’ 같은 곡들은 정상에 가까운 편이라 오히려 어색하기만 하다.

장르를 해체하는 그의 노래엔 과격한 열정과 더불어 연륜에서 배어 나오는 느긋함이 공존한다. 심각한 주제인 광주민주화운동에서 통일 문제까지도 그는 솔직하고 해학적인 가사의 연금술로 녹여버리는 마법을 발휘한다. “마누라가 바람 피우면 참을 수 있을까 없을까”(횡설수설), “저 바다가 없었다면 공작선도 없었겠지요(북한의 섬마을 선생님)”와 같은 부분에선 솔직함을 넘어 유년을 방불케 하는 순수함까지 느껴진다.

그는 고 문익환 목사의 부친인 문재림 목사가 창립한 춘천교동교회를 다니면서 자연스레 사회에 대한 고민을 품었다. 고 김현식은 생전에 그를 두고 “언더그라운드의 재야”라며 혀를 내둘렀다. ‘시인과 촌장’ 출신의 하덕규는 "내가 지하(언더그라운드) 1층이면 정형근 형은 지하 5층이다"라고 말했을 정도. 음반사, 방송의 외면은 당연한 일. 그는 "욕 먹는 동명의 국회의원 때문에 노래를 틀어 주지 않아 피해를 본 것"이라고 슬쩍 뼈있는 농담을 던진다.

- 멈추지 않은 실험정신, 2집 100장 팔려

과연 이 땅에서 대중 음악 가수가 진지한 음악적 고뇌와 극한의 실험 정신을 잃지 않는 것은 천형일까? 그의 음악은 몇몇 평론가와 소수의 마니아만 주목했을 뿐이다. 그의 2집은 딱 100장이 팔렸다.

1979년 10ㆍ26사태 후 우연히 여성잡지에서 '김진성PD, CBS로 돌아오다'라는 기사를 보고 무작정 찾아가 오디션을 통과해 '세븐틴'프로에 고정 출연을 했다. 이 때부터 그는 들국화, 따로 또 같이 등의 콘서트에서 게스트로 출연하거나, 신촌 크리스탈 백화점의 ‘수요 통기타 무대’ 등을 통해 대중에게 얼굴을 알렸다. 생계를 위해 81년부터 6년 간 공무원으로 재직하고 무려 8수를 거듭했지만, 음대 작곡과 진학의 꿈도 놓치 않았다.

그러나 음악, 직장, 대입이라는 세 마리 토끼를 잡으려는 탓에, 결과적으로는 집중력만 분산된 형국이었다. 그때 ‘세븐틴’의 작가 강효일의 조언이 큰 힘을 발휘했다. 글재주가 대단치 않다고 생각, 프랑스 유학을 가 글공부를 계속해 끝내 작가로 성공한 강 작가의 말에 힘을 받은 것이다. "예술은 천재가 없다. 끝까지 하는 사람이 승리를 하는 것"이라는 그의 말에, 음악 외길을 결정했다. 1987년,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1집 '호수에 던진 돌' 발매를 위해 곡 심의에 들어갔다. 헌데 '보리나무야'는 “보리가 어떻게 나무가 될 수 있느냐”고 트집이 잡혀 '보리야'로, '만세소리'는 '노래 소리'로, '동무야'도 '친구야'로 바꿔야 했다.

방송심의도 벽이었다. 타이틀곡 '호수에 던진 돌'의 괴상한 창법이 트집 잡혀 '창법 미숙'으로 방송금지가 되었다. 대학도 포기하고 직장도 그만 두고 뛰어든 음악활동은 이처럼 시작부터 삐그덕 거렸다. 당시는 포크 아니면 음악이 아니라는 음악적 편견이 심했던 시절이기도 했다.

이후 14년 동안, 건설 현장감독, 야채 장수, 도배 등 먹고 살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일했다. 그 와중에도 음악은 돈벌이 대상이 아니라는 신념 때문에 밤업소에는 단 한 차례도 나가지 않았다. 그는 헤밍웨이, 생텍쥐페리, 카렐 지브라, 김지하 같은 행동하는 작가들을 좋아한다. 실제로 그의 음악적인 기법이나 정서는 그 들의 작품과 연결되어있다. 그는 김지하의 '황토길'을 곡으로 만들었고 이상은 2집에는 생텍쥐페리의 '야간비행'을 노래를 만들었다.

세브란스 병원 간호사인 부인은 그의 수호천사다. 7년 전인 97년. 1,200만원의 빚을 내 딱 100장이 팔렸던 2집'나는 당신의 바보' 제작을 도와주었다. 6년 간 40여 곡을 작곡해 악보를 쌓아 가는 남편에게 부인은 슬그머니 3집 제작비 1,700만 원을 또 다시 건네주었다. 그래서 늘 미안한 부인에게 음악 외적인 실망만은 주고 싶지 않아 술도 끊었다. 그러나 술과 담배를 심하게 즐겼던 그는 98년에 신장 암 수술까지 했다.

2집 이후에는 록, 댄스, 펑키 등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시도, 형식 파괴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99년부터는 명동 서울YWCA의 ‘부활 청개구리 공연’에도 참여했다. 월드컵 유치 후 한국의 개고기 문화가 국제적인 이슈로 대두되던 2000년 6월 초여름 어느 날, 정형근은 시집 '개 잡아먹는 법(당그래刊)'을 발표했다. 직설적이고 파격적 내용의 시집은 화제가 되었다. 하지만 지레 겁을 먹은 출판사는 자진하여 절판을 결정, 문제의 확산을 막았다.

- 다양한 장르 섭렵, ‘진정한 아티스트’ 평가

신보인 3집 '한 송이 들꽃으로'는 장르와 내용의 해체가 가속화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 힙합과 레게 음악까지 등장했다. 강릉 잠수함 침투사건을 소재로 한 '북한의 섬마을 선생님'에서는 통일을 가정해 넣은 가사, `원산에 광어 회와 설악산에 맑은 술로`라는 대목이 매우 인상적이다. 3집에 대해 평론가 김진성은 "정형근 음악의 색깔을 감성이 아닌 문자 따위로 정의 내린다는 것은 더 없이 부질없고 무모하다. 그는 살아있는 포크음악의 전설"이라고 평했다. 가수 이주원은 "포크음악의 새로운 생태학을 알리는 시작'으로 의미를 부여한다. 원로 음악평론가 이백천도 "이런 음악과 아티스트가 있다는 것은 행운"이라 말한다.

2001년 어느 날, 그는 선배가수 이주원이 인천 백석동에서 농사를 짓는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 갔다. 그에게 농사를 배우기 시작했다. 땅 파고 자연에 속해 있다는 것만으로 그는 행복했다. 아직 논이 없어 쌀 농사는 못 한다. 그러나 농약을 쓰지 않는 콩, 시금치, 배추 등 유기농 채소를 재배하고 있다. 지금은 전문 농사꾼으로 가는 견습 과정이다. 그러나 여느 농부와 좀 다르다. "남들이 안 된다는 작물을 재배해보고 싶다. 좋은 음악도 남들이 다 좋아하면 왠지 싫어진다. 나는 청개구리인가 보다"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 그는 탄핵 반대를 위한 광화문 촛불 집회에는 여러 차례 참여했다. 그의 실천하는 양심이라는 자신의 소신과 맥락을 함께 하기 위해서란다.

데뷔 시절, 그는 김민기나 한대수처럼 유명해 진 후 멋지게 은둔을 해 보고 싶었다. "평가 받은 곡이 없다는 섭섭함보다 오히려 앞으로도 무한한 가능성을 펼칠 수 있는 동심의 세계가 있어 행복하다. 돌아와요 부산항에, 아침이슬이 100년 후에 어떻게 남을 것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유명한 몇 사람들의 음악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피라미드를 이루고 있는 각각의 돌맹이도 모두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빈둥빈둥 노는 것 같지만, 그는 종일 고민을 한다. “이게 틀림없이 실패할 실험임을 알지만, 나의 신념을 지키려 어딘가는 있을 그 끝을 향해 찾아 갈 뿐이다."

그는 요즘 존경하는 생텍쥐페리의 '야간비행'을 소재로 1인 뮤직 드라마 콘서트를 준비하고 있다. 스케일 큰 팝페라를 꿈꾸는 그의 노래가 궁금하다면 홈페이지(www.ixclub.com/music)가 큰 도움을 줄 것이다.

글·사진 최규성 가요칼럼니스트


입력시간 : 2004-04-14 21:10


글·사진 최규성 가요칼럼니스트 kschoi@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