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국남의 방송가] 팬들은 일회용 인스턴트 용품이 아니다


“옛날 같은 기분이 나서 기쁘다. 팬들이 기다리는 것 같고 일단 다 바라는 바 다”(문희준) “개인적인 것보다는 팬들이 우선이다”(장우혁) “지나고 보니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다시 모여 못다 채운 음악적 욕심을 풀고 싶어졌다. 다시 돌아오라는 팬들의 성화도 재결합을 고민하는 데 결정적으로 작용했다”(슈)

3월27일 서울 올림픽 홀에서 두 시간여 진행된 딥 퍼플(Deep Purple)의 내한 공연을 보면서, 또 그 후에 내내 머리를 떠나지 않은 것이 두 가지 있다. 1968년 결성 데뷔한 후 일부 멤버의 교체가 있으면서도 자신들이 지향하는 음악을 추구하며 명맥을 이어가는 딥 퍼플에 대한 부러움이 하나이고, 또 다른 하나는 우리의 대표적인 아이돌 스타 그룹이었던 HOT와 SES의 멤버들이 최근 나돌고 있는 재결합설에 대한 개인적 입장을 보도한 내용들이다.

1990년대부터 최근까지 가요계의 흐름 중 가장 강력한 것이 댄스 그룹을 비롯한 그룹 등의 왕성한 활동이다. 10대 청소년 팬들의 열화와 같은 지원을 바탕으로 수많은 댄스 가수 그룹들이 가요계의 정상을 차지하며 가요의 주요한 흐름을 형성해 왔다. 하지만 하나의 그룹이 장기간 활동하면서 음악의 정체성을 변함없이 유지하거나 아니면 세월에 따라 음악의 스타일을 변화하며 팬들의 곁을 지키는 경우는 거의 없다.

서태지와 아이들, HOT, SES, 젝스키스 등 선풍을 일으켰던 댄스 그룹들은 이미 사라졌다. 그야말로 몇 달짜리 그룹에서부터 몇 년 활동하는 그룹들까지 천차만별이지만 해체의 속도는 점점 더 빨라지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또한 핑클처럼 그룹명만 있을 뿐, 멤버들이 따로 솔로로 활동하거나 연기자로 활동하면서 가뭄에 콩 나듯이 앨범을 내는, 그야말로 유명무실한 그룹 활동을 하는 경우도 급증하고 있다.

그룹 해체 현상은 우리의 경우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외국의 유명 그룹도 멤버들의 이해 갈등으로, 또는 지향하는 음악 세계로 인해가 차이로 해체와 재결합, 멤버 교체가 흔하게 일어난다.

하지만 우리의 경우, 추구하는 음악적 세계나 스타일의 차이로 해체하기보다는 인기나 수입배분, 전속 계약금의 문제 등 지극히 가수나 기획사의 상업적인 이유로 해체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또 해체나 다름없는 상태에서 이름만 남겨둔 채 그룹 활동보다는 연기나 멤버의 솔로 활동에 치중하는 것 역시 이윤 극대화를 노린 기획사의 얄팍한 사업 전략에 의한 것이다. 여기에서는 스타의 존재 기반이자 대중문화의 토대를 형성하는 팬의 요구와 바람은 철저히 배제된다.

그동안 그룹이나 소속 기획사는 팬클럽을 조직적으로 운영해 팬들을 인기 고조 수단이나 홍보의 전령사 등으로 최대한 활용하고 팬들의 기대와 이해에 반하는 활동을 하면서도 대외적으로 팬들을 가장 소중하게 여긴다고 기계처럼 반복하고 있다.

공식적, 비공식적 팬클럽을 통해 수만명의 회원들의 활동으로 엄청난 인기를 누리며 그룹 활동을 했던 HOT는 수많은 팬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계약금과 활동 조건 등 기획사와 멤버들의 개인적인 이해 관계로 2001년 5월 해체에 이르렀다. 이들의 해체 앞에선 그동안 그렇게 소중히 여긴다던 팬들의 존재는 안중에도 없었다. 슈, 바다, 유진 등 3명으로 구성된 SES의 해체도 팬들의 바람과는 다르게 음악적인 이유보다는 경제적인 이유로 해체의 길을 걸었다. 젝스키스도 마찬가지이고, 그외 많은 그룹들이 비슷한 이유로 활동을 계속하기를 바라는 팬들의 간절한 소망을 짓밟은 채 사라져갔다.

지난해 8월부터 멤버들의 소속사 변경과 원소속사와의 재계약 등의 문제로 활동을 접었던 god도 장기간 앨범 출시나 무대활동 등 가수로서의 활동을 거의 하지 않고 있어 팬들의 안타까움을 사고 있다.

팀 해체와 함께 팬들을 우롱하는 것이 바로 이름만 걸어 놓은 채 활동하지 않는 것이다. 핑클의 경우 2002년 4집 앨범을 발표한 이후 그룹 활동을 하지 않고 대신 멤버 개인별로 활동하고 있다. 4집 발표이후 가수 활동을 한 멤버는 솔로 앨범을 낸 이효리와 옥주현 뿐이고 성유리는 연기자, 이진은 방송 진행자로 활동하고 있다. 핑클처럼 장기간 그룹 이름만 남겨 놓은 채 활동을 하지않는 경우도 적지 않다.

팀 해체나 유명무실한 활동, 장기간의 공백은 팬들의 실망을 초래하고 결국에는 팬들의 외면을 불러온다. 팬은 문화상품의 주요 소비자이자 인기 구축의 핵심 요소일 뿐만 아니라 스타의 정보유통 등 홍보 전령사로서 스타의 존재기반으로 매우 중요한 사람들이다. 정치가들이 필요할 때만 국민이 원하는 것을 실천하겠다고 다짐할뿐 정치 활동에서는 국민을 안중에 두지 않는 것처럼 스타들도 편리할 때, 또 필요할 때만 팬을 찾는 행태가 잦다. 때문에 근래들어 스타에 등을 돌리는 팬이 생기는가 하면 안티팬으로 돌아서는 사람들도 급증하고 있다.

팬의 중요한 존재 의미를 망각한 채 스타들이 개인적 이해를 쫓으면 팬은 더 이상 스타의 버팀목 역할을 하지 않는다. 팬은 스타들이 필요할 때만 이용되는 일회용품이 아니다.

최근 HOT, SES 의 멤버의 입에서 재결합 논의가 나오면서 ‘팬’을 거론했다. 그렇게 소중하게 여기는 팬들을 생각했다면 과연 해체를 왜 했을까. 이제 와서 팬들의 존재의미를 새삼 깨달은 것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재결합의 논의 이면에는 극단적인 상업적 의도가 숨어 있는 것이다.

역동적인 딥 퍼플의 공연을 보면서, 또 공연장을 찾은 나이 많은 중장년층의 관객들을 만나면서 우리도 팬들의 곁을 오랫동안 지키며 함께 나이 들어가는 그룹은 볼 수 없을까 하는 안타까움이 스민다.

연예 기획사와 스타들은 반드시 알아야 한다. 팬은 편리할 때만 등장하는 액세서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팬은 스타를 존립하게 하는 존립기반이자 존재 의미이므로 스타들은 더 이상 팬들을 상업적으로 이용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을 스타들에게 건네고 싶다.

배국남 대중문화평론가


입력시간 : 2004-04-16 17:02


배국남 대중문화평론가 knbae24@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