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운사 늦동백 보러갔더니, 청보리밭 추억이 날 손짓하네춘백 흐드러진 산사 계곡, 광할한 보리밭 속으로 정겨운 여정

[주말이 즐겁다] 고창 선운사
선운사 늦동백 보러갔더니, 청보리밭 추억이 날 손짓하네
춘백 흐드러진 산사 계곡, 광할한 보리밭 속으로 정겨운 여정


농사일을 본격적으로 시작한다는 곡우(穀雨)가 지나면 봄도 아주 깊어진 셈이다. 이 계절, 온 산하를 화사하게 밝혀주던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꽃잎이 난분분 날리기 시작하면 숲은 기적처럼 아침저녁이 다르게 연둣빛으로 물들어간다.

- 4월 말에 절정을 이루는 선운사 늦동백

고창 선운사의 동백은 한겨울이 아니라 성미 급한 봄꽃들이 사위어 가는 요즘 같은 계절이 전성기다. 4월 초에 들어서야 피어나기 시작해 무려 5월 중순까지 피고지며 선운사 골짜기를 온통 붉게 물들인다. 늦동백, 곧 춘백이다. 봄을 학수고대하던 시인은 조금 서둘렀던가 보다. “선운사 골째기로/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안했고/ 막걸릿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 작년 것만 상기도 남었습니다/ 그것도 목이 쉬어 남었습니다” <서정주의 ‘선운사 동구’>

보고픈 붉은 동백꽃을 보지 못하고 되돌아가다 사하촌 주막집에 들러 탁주 한 잔 들이키는 미당(未堂) 서정주(徐廷柱 1915~2000) 시인의 뒷모습이 동백꽃만큼 정겹게 다가온다.

대웅전 뒤 산기슭에서 자라고 있는 500~600년 생 3,000여 그루의 동백나무들은 제각각 붉은 꽃송이들을 무더기로 피워내며 화려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허나 보호 철망 때문에 동백의 붉은 꽃 그늘을 걷지 못하는 게 섭섭하다.

선운사 동백이 유명하다 해서 철망 안쪽의 꽃봉오리만 보고 훌쩍 떠나는 것은 그래서 너무 아쉽다. 선운사가 안겨 있는 선운계곡은 겨우 200~300m의 봉우리들이 둘러싸고 있는 시오리 골짜기인데, 산은 높지 않아도 충분히 깊고 너른 품을 가졌으니 여기서 푸른 봄을 만끽해 보자.

검단선사가 도적떼를 교화하고 이 절집을 창건할 무렵인 그 옛날 백제 때엔 전설의 용추 일부였을 법한 선운사 앞개울 풍경을 놓칠 수 없다. 물가에 줄지어 늘어선 수백 년 묵은 단풍나무에서 솟아난 연둣빛 새싹은 정열적인 동백꽃과는 또 다른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이 그윽한 골짜기 안에는 참당암, 도솔암, 석상암, 동운암 같은 유서 깊은 암자가 바위 위에 혹은 아늑한 언덕에 자리를 잡고 있다. 신록으로 물들어 가는 계곡길을 2km쯤 거슬러 오르면 참당암 갈림길. 오른쪽 계곡 안쪽에는 호젓한 운치가 넘치는 참당암이 들어서 있다. 갈림길에서 큰길로 곧장 가면, 진흥왕이 왕위에서 물러나 왕비와 공주를 데려와서 수도했다는 전설이 전하는 진흥굴을 지나 도솔암 뒤의 마애불(보물 제1200호)이 반긴다. 배꼽 속에는 들어있던 신비한 비결이 햇볕을 보는 날, 새로운 세상이 도래한다는 전설을 들려주는 그 부처다.

■ 숙식 : 선운사 입구 집단시설지구에 미당이 애용했다는 동백장호텔(063-562-1560)을 비롯해 많은 장급 여관과 식당이 있다. 민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데서 잡히는 풍천장어와 산자락에서 자란 산딸기 열매인 복분자로 담근 술은 선운산 명물로 꼽힌다. 장어구이에 복분자술을 곁들이면 금상첨화. 선운사 입구에 산장회관(063-563-3434) 등 장어구이를 전문으로 하는 식당이 많다. 대부분 양식한 장어로 요리한다.

■ 교통 : 서해안고속도로 선운산IC→22번 국도(선운사 방향)→13km→삼인리 삼거리(좌회전)→2km→선운사 주차장. 공음면 선동리 보리밭은 선운사에서 승용차로 30여분 걸린다. 삼인리 삼거리(좌회전)→22번 국도(영광 방향)→심원면→상하면→공음면 사거리(좌회전)→2km→선동리 보리밭 입구.

마애불 뒤를 돌아 바위를 끼고 108계단을 오르면 천마봉 전망 좋은 자리에 아담한 내원궁이 반긴다. 천마봉 건너다보고 마애불로 다시 내려와 ‘만필의 말이 노는 듯한’ 첩첩 바위가 드러난 계곡의 용문굴을 지나 능선에서 남쪽으로 방향을 잡으면 선운산 최고의 절경이라는 낙조대에 닿는다. 이 암봉에서 바라보는 칠산 앞바다 낙조는 천마봉에서 내려다보는 도솔천 계곡의 경관과 더불어 선운산 경관의 쌍벽을 이룰 만큼 절경으로 꼽혀왔다.

백제 여인이 싸움터에 나간 남편을 그리워하며 선운산에 올라가 노래를 불렀다는 <선운산가(禪雲山歌)>. 가사는 비록 전하지 않지만 그 여인이 노래를 부른 곳이 혹 이 낙조대가 아닐까. 선운사에서 낙조대까지 다녀오는 데?왕복 2~3시간쯤 소요된다.

- 고창 청보리 축제도 볼만해

선운사 동백꽃도 좋고 계곡의 신록도 괜찮지만, 이 화창한 계절에 널따란 들판에서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을 만끽하고 싶다면 공음면 선동리 보리밭도 들러보자. 보리밭 면적만 무려 13만여 평으로 우리나라에서 꽤 넓은 편에 속한다. 거기에 소나무 몇 그루와 나지막한 뒷산을 배경으로 한 보리밭 풍경이 아름다워 알음알음 찾아오는 방문객들이 많다.

선동리 보리밭 일대에선 올해 처음으로 청보리 축제가 5월16일까지 펼쳐진다. 이 기간엔 보리밭길 걷기 체험과 보리음식 먹기 체험 등이 매일 열리며, 일요일엔 농악놀이, 창작무용 등을 감상할 수 있다. <자세한 사항은 고창군 홈페이지(www.gochang.go.kr)와 청보리 축제 홈페이지(www.boribat.com)를 참조하거나 전화(063-562-9895)로 문의>

민병준 여행작가


입력시간 : 2004-04-22 15:57


민병준 여행작가 sanmin@emp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