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세월을 이어준 돌다리징검다리와 형교의 중간형태, 토목사·교량사 연구에 중요 자료

[주말이 즐겁다] 진천 돌다리
천년의 세월을 이어준 돌다리
징검다리와 형교의 중간형태, 토목사·교량사 연구에 중요 자료


금북 정맥이 고을 전체를 크게 돌아 감싸고, 백곡천 미호천 군자천이 기름진 땅을 빚어낸 충북 진천(鎭川). 기후도 온화하고 자연 재해도 적어 산물이 아주 풍성한 고을로 이름 높다. 덕분에 사람살이도 넉넉해 예로부터 ‘진천은 살아서 머물 만한 고을’이라는 뜻의 말, ‘생거진천(生居鎭川)’이라 불렀다.

중부고속도로를 타고 진천 구간을 달리다 보면 ‘농다리’를 알리는 큰 입간판이 보인다. 진천 문백면 구곡리 굴티마을 세금천(洗錦川)에 놓인 독특한 이름의 이 돌다리는 고려 개국 초기에 놓인 것이라 하는데, 지금도 사람 통행이 가능하다. 단순한 형태의 원시 교량이 무려 1천 년을 훌쩍 넘는 오랜 세월 동안 별다른 탈없이 견뎌낸 힘은 무엇일까.

- 수량 넘치면 잠수교 기능

농교(籠橋)로도 불리는 농다리는 구조적으로는 징검다리와 형교(桁橋)의 중간 형태로서 수량이 늘면 잠수교의 기능도 한다. 사력암질의 붉은색 돌을 그대로 쌓았는데, 돌의 뿌리가 서로 엇물려지도록 쌓고 틈새는 작은 돌로 메웠다. 자연석을 성글게 쌓았기 때문에 밟으면 움직이고 잡아 당기면 돌아가는 돌이 있어 ‘농(籠)다리’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농다리는 교각의 양쪽을 유선형으로 만들어 구조적으로 유수압에 저항할 수 있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또 돌이 흔들리는 것도 물 흐름을 거스르지 않게 하여 장마에도 떠내려가지 않도록 배려한 때문이라 한다.

이렇듯 단순해 보이면서도 토목 공학의 원리를 잘 사용해 쌓은 농다리는 원래는 전체 28칸으로 길이가 100m가 넘었다. 현재는 양쪽으로 조금씩 줄어들어 25칸만 남아 93.6m다. 그리고 25칸의 교각 위에 길이 170cm, 넓이 80cm, 두께 20 cm 내외의 장대석을 얹어 만들었으며, 교각 사이의 폭은 80cm 내외다. 교각이 28칸이었던 까닭은 하늘의 기본 별자리인 28숙(宿)을 응용했기 때문이라고.

이 다리는 우리나라 토목사(土木史)나 교량사(橋梁史)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꼽히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조금씩 허물어진 것을 다시 손보는 과정에서 쌓아 올리기를 반복하는 바람에 다리의 폭과 두께가 일정하지 않고 다리의 방향도 중간에 조금 휘어 있다. 그래서 얼핏 바라보면 거대한 지네 한 마리가 냇물을 헤엄쳐 건너는 것같이 보인다. 교각의 넓이가 그 위에 올린 상판보다 더 넓으므로 튀어나온 교각의 양끝이 지네 발 역할을 하는 것이다.

다리가 처음 세워진 때를 두고 이런저런 의견이 많지만 전문가들은 고려 개국공신인 임희(林曦)장군에 의해서 처음 지어졌고, 고려 고종 때 무인 임연(林衍)이 크게 개ㆍ수축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삼국 통일 전쟁 시기에 김유신 장군이 다리를 놓았다는 이야기도 전하는데, 이는 진천에서 태어난 김유신 장군의 업적이 미화된 것이라는 지적이 많다. 이 농다리가 임씨들과 인연이 깊은 까닭은, 다리를 처음 쌓았던 임희가 통일신라 말기에 진천 일대를 지배하던 호족이었고 구곡리가 진천 임씨들의 세거지(世居地)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1천년이 넘는 오랜 세월을 버텨온 돌다리를 걷는 기분은 아주 특별하다. 아주 단순한 형태의 다리지만, 한 번 건너 갔다 오고 나서도 자꾸 건너고 싶은 유혹을 뿌리치기 쉽지 않다.

- 김유신 장군 탄생지서 영웅의 흔적찾기

진천은 김유신 장군과 관계 있는 전설과 유적이 많다. 읍사무소 뒤의 도당산 아래엔 김유신 장군의 영정과 위패를 모신 길상사(吉祥詞)가 있어 사시사철 아늑한 풍광으로 사람들을 끌어 모은다. 또 상계리의 김유신 장군 탄생지도 영웅?흔적을 되짚어 보려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

장군이 잉태된 지 20개월만에 태어날 때 태를 묻은 태실(胎室)은 접근하지 못하도록 자연석을 쌓아 놓았는데 넓이가 460평, 높이가 30m에 이를 정도로 방대하다. 후세인들은 이곳을 신성시하여 고려시대까지 제향을 지내 왔다. 탄생지 뒤쪽에 솟은 태령산은 장군의 태를 묻은 산이고, 바로 그 중턱에 장군 식구들이 식수로 사용했다는 샘물인 연보정(蓮寶井)이 있다. 이 밖에 말을 훈련시켰다는 치마대도 있다.

한편 문백면 봉죽리에 있는 정송강사(鄭松江祠)는 ‘관동별곡’, ‘사미인곡’ 같은 아름다운 가사를 지어 가사 문학의 대가로 꼽히는 송강 정철의 사당이다. 사당 입구에는 송강의 공적을 적은 신도비가 있고 유물 전시관에는 옥패, 은패, 친필 편지 등이 보관되어 있다. 사당 남쪽 언덕 오솔길을 300m쯤 오르면 송강 정철의 묘가 보인다. 원래 경기도 고양시 원당면 시원리에 있던 것을 1665년(현종 6), 지금의 자리로 이장하였다고 한다.

민병준 여행 작가


입력시간 : 2004-05-27 14:37


민병준 여행 작가 sanmin@emp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