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력 넘치는 판타지의 세계캐릭터·사건에 몰입시키는 힘, 감성 흔드는 월드뮤직의 보고

[문화비평] 미야자키 하야오 <붉은 돼지>
생명력 넘치는 판타지의 세계
캐릭터·사건에 몰입시키는 힘, 감성 흔드는 월드뮤직의 보고


미야자키 하야오 애니메이션의 가장 큰 특징이자 매력은 그 특유의 판타지에 있다. 그의 작품 세계에서 일상과 가상의 시공간은 짙은 판타지의 공간이다. 그리고 그 판타지의 중심에 서 있는 인물들은 늘 10대 초, 중반의 소년, 소녀들이다. 늘 어린이들이 즐겁게 보고 빠져들 수 있는 작품을 만들어 온 미야자키 하야오의 필모그래피에서 유일하게 성격을 달리하는 작품이 바로 ‘붉은 돼지’이다. 미야자키 자신이 “ 지친 나머지 뇌세포가 두부가 돼 버린 중년 남성을 위한 애니메이션”이라 말했을 정도로, 1920년대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한 이 독특한 애니메이션은 애초부터 성인 남성을 대상으로 기획되고 제작이 된 작품이다(미야자키 하야오는 자신을 표현하는 캐릭터로 늘 돼지를 사용해 왔다).


- 만화 '비행정 시대' 원작, 흥행 대박

‘ 붉은 돼지’는 1990년, 모형 잡지인 ‘ 모델 그래픽스’에 미야자키 하야오가 그린 15페이지의 만화 ‘ 비행정 시대’를 원작으로 한다. 흥행 가능성이 없다는 이유로 제작이 무산되기도 했고 이후 일본항공(JAL)과의 제휴를 통해 기내 상영용 중편으로 제작되려 했지만 결국 극장용 장편으로 완성되었고, 1992년 7월 개봉되어 약 305만 명의 관객 동원과 28억 엔의 극장 수입을 기록하며 그 해 일본 개봉 영화 흥행 순위 1위를 차지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듬해인 1993년 프랑스 앙시에서 개최된 국제 애니메이션 영화제에서 장편 부문 대상을 수상하며 유럽인들의 관심을 끌게 되었고(프랑스 개봉판에서는 영화배우 장 르노(Jean Reno)가 포르코 로소의 목소리를 맡아 연기를 했다), 그 외에도 47회 마이니치 영화 콩쿠르에서 애니메이션 영화 대상과 10회 골든 그로스상, 일본 영화 최우수 금상, 그리고 제12회 후지모토상 등 일본 내에서도 여러 개의 상을 휩쓸었다.

사실 미야자키 하야오의 판타지 세계에서 ‘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것들’의 묘사는 놀라울 정도로 생생하며 그 생명력은 지극히 강렬하다. 때문에 그의 작품을 보는 이는 어떠한 거부감도 없이 각각의 캐릭터와 사건들에 몰입하고 동화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 붉은 돼지’는 직접적인 판타지의 요소를 거의 담고 있지 않다. 물론 주인공이 ‘ 돼지’라는 얼토당토않은 사실, 그리고 그 돼지가 실은 인간이었지만 자신이 마법을 걸어 돼지로 변한 것이라는, 역시 현실적으로는 말도 안 되는 이 작품의 배경만을 놓고 본다면 이는 판타지의 전형적인 골격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극의 내용이나 캐릭터의 성격 등을 놓고 보았을 때 ‘돼지’란 짙은 은유이다. 주인공인 포르코 로소라는 캐릭터는 30~40년대 느와르 영화의 하드보일드한 탐정을 연상케 할 정도로 ‘ 쿨’한 매력을 지닌 인물이다. 그는 돼지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다른 이들은 그가 자신의 모습을 돼지로 변화시키게 된 배경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뿐, 어느 누구도 이를 이상하다 생각하지 않는다.


- 사실성 짙은 비행기 제작

이 무정부적인 캐릭터는 현실에서 한 발 떨어져 있으려는 전형적인 영웅의 스타일을 따른다. 그러나 누구나 공감하는 히어로로 자리매김을 하기엔 ‘ 돼지’라는 모습이 너무도 안 어울린다. 이런 모순적인 부딪침 속에서 그는 더더욱 쿨하게 느껴진다. 물론 미야자키 특유의 낙천적이고 동화적인 요소가 아예 거세된 것은 아니다. 극에 잔재미를 부여해주는 ‘ 착한 악당’들이나 자립적인 소녀 피오 등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친숙한 캐릭터들이 등장한다. 마지막 부분에서 미야자키는 인간에 등을 돌린 채 무정부적인 삶을 살아온 포르코 로소가 마침내는 다시 인간(사회)으로 회귀한다는 암시를 해 주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긍정적인 세계관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특유의 부드러운 선과 풍성한 색채가 돋보이는 작화 역시 탁월한데, 특히 미야자키의 특기인 하늘을 나는 장면에서의 멋진 풍경과 세밀한 묘사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이다. 어린 시절부터 비행기 그림을 그려왔던 미야자키 하야오의 섬세한 눈은 여러 비행정들과 비행기, 그리고 엔진 등의 메카닉 디자인에 사실성을 부여해줌으로써 작품의 퀄리티를 한껏 높여주었다. 그리고 또 하? 극적인 긴장감과 감정이입에 커다란 역할을 하는 요소는 음악이다.


- 탁원한 편곡과 멜로디에 깊은 매력

미야자키 하야오는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1984)와 ‘천공의 성 라퓨타’(’86), ‘이웃의 토토로’(’88), ‘마녀의 특급 배달’(’89)에 이어 다시 히사이시 조에게 음악을 맡겼고, 그는 또 하나의 멋진 작품을 탄생시켰다. 개인적으로 히사이시 조의 여러 작품들 중 ‘천공의 성 라퓨타’, ‘이웃의 토토로’와 함께 최고의 사운드트랙으로 꼽고 싶은 작품이 이 ‘붉은 돼지’이다. 여기엔 히사이시의 다른 작품들이 그러하듯 미니멀리즘(minimalism)에 바탕을 둔 복잡하지 않은 멜로디와 점층적으로 감정을 고조시키는 탄탄한 구성, 화려한 오케스트레이션과 잔잔한 피아노 연주 등 그의 음악적 특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적절한 긴장감을 전해주는 급박한 전개와 서정적이고 포근한 감성을 전해주는 아름다운 선율 등, 각각의 짤막한 소품들을 수놓는 탁월한 멜로디와 편곡은 들을수록 깊은 매력을 선사한다. 앨범의 제작을 위해 히사이시는 70인조의 대규모 오케스트라를 동원해 이 풍성한 사운드를 완성했다.

첫 소절만 들어도 ‘히사이시 조의 음악’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는 박진감 넘치는 첫 곡 ‘시대의 바람~사람이 사람다웠던 때~’를 비롯하여, 아름다운 테마 선율이 피아노로 흘러 나오는 연주곡 ‘돌아 갈 수 없는 날들’, 가슴속에 차분히 잠겨 오는 포근한 바이올린 선율이 짧아서 더욱 아쉬운 ‘세피아색의 사진’, 왈츠 풍의 편곡이 돋보이는 ‘Friend’ 등 뛰어난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다. 긴장감 넘치는 오케스트레이션과 랙타임 풍의 피아노 연주로 전개되는 ‘광기~비상~’은 히사이시 조의 솔로 앨범 에 수록되었던 ‘Two Of Us’를 모티브로 한 곡이다. 플루트와 플라멩코 기타 연주가 어우러지는 ‘여름의 끄트머리에’도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이다.

하지만 아마도 이 앨범에서 가장 주목하게 되는 부분은 (홍난파의 ‘봉선화’와 프레디 아길라(Freddie Aguilar)의 ‘Anak’ 등을 멋지게 불렀던) 일본의 국민적인 가수인 가토 토키코의 노래일 것이다. 미야자키 하야오 자신이 그녀의 열렬한 팬이었던 탓에 결국 그녀는 극중 지나의 역할을 맡아 중저음의 매력적인 목소리를 들려주었고 2곡을 사운드트랙에 수록하게 되었다. 작품의 초반부에 등장하는, 지나가 바에서 노래하는 장면에서 들을 수 있었던 ‘버찌가 익을 무렵’의 원곡은 장 밥티스트 클레망(Jean-Baptiste Clement)의 시에 앙뚜안 르나르(Antoine Renard)가 곡을 붙인 1867년 샹송 ‘Le Temps Des Cerises(체리의 계절)’이다. 20년대 카바레의 분위기를 고스란히 재현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꽤나 매력적이다.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갈 때 잔잔히 흐르는 ‘때로는 옛 이야기를’은 가토 토키코가 직접 작사, 작곡한 작품으로 영화의 기분 좋은 여운을 곱씹게 하는 역할을 충실히 해 준다.

김경진 팝칼럼니스트


입력시간 : 2004-06-09 14:11


김경진 팝칼럼니스트 arzachel@seoulrecord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