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린·브라운관에 넘치는 가족간 금지된 사랑 쟁탈전

[배국남의 방송가] 욕망 앞에 무너지는 가족애
스크린·브라운관에 넘치는 가족간 금지된 사랑 쟁탈전

“다 잃어도 하나만 가지라면 여자(태영)를 갖겠다” 요즘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드라마 ‘파리의 연인’의 극중 주인공 한기주(박신양)가 조카 수혁(이동건,드라마 뒷부분에 가면 이복동생이라는 사실이 밝혀짐)이 자신이 좋아하는 여성, 태영(김정은)을 양보하라는 말을 듣고 한 대답이다. 물론 이 대사는 방송 직후 인기 검색어로 등장한 ‘박신양 어록’에 곧 바로 등재됐다. 하지만 드라마 속에서 주인공의 이 같은 말은 굉장히 멋있게 들리지만 우리 사회에선 여전히 금기된 사랑과 패륜이라고 지탄을 받을 법한 한 여성을 놓고 벌이는 형제(가족)간의 사랑의 표현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 금기 아니면 왜곡된 사랑

영화 <누구나 비밀은 있다>

요즘 브라운관과 스크린에 넘쳐 나는 것이 한 여자를 놓고 사랑을 벌이는 형제간 그것도 출생의 비밀을 간직한 형제가 벌이는 사랑이거나 자매가 한 남자를 벌이고 행하는 사랑과 섹스 더 나아가 누나에 대한 사랑 등 최소한 우리 사회에서 금기로, 아니면 불온한 사랑으로 인식되는 것이다.

드라마와 영화는 어떠한 형태로든 현실과 사회에 연관을 맺고 있는 픽션이다. 그렇다면 왜 현실 속에선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이런 금기된 사랑이 획일적으로 온갖 장르를 오가며 드라마나 영화의 주요한 주제이자 소재로 등장하는 것일까. 우선 얼마나 이러한 류의 드라마나 영화가 있는 지 보자.

금기된 사랑의 압권은 아무래도 드라마‘파리의 연인’과 영화‘누구나 비밀은 있다’이다.‘파리의 연인’에선 재벌 2세인 기주와 그의 조카 수혁이 파리에서 만난 가난하지만 구김살 없고 당당하게 살아가며 사랑의 의미를 아는 태영에게 반해 연적으로 등장하고 두 사람은 사랑의 대상이 동일인이라는 사실을 알고도 사랑의 대상을 쟁취하기 위해 각자의 방식으로 사랑을 한다. 이 금기된 사랑이 더 충격적인 것은 드라마가 전개되면서 삼촌으로 알고 있었던 기주가 조카 수혁의 이복형이라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금기에 대한 갈등은 증폭될 것이다.

영화 ‘누구나 비밀은 있다’는 여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간다. 세 자매가 한 남자를 모두 사랑의 대상으로 상정하고 있으니 말이다. 세 자매 중 자유연애주의자이며 순진한 남자 친구가 있는 미영(김효진)은 자유분방한 수현(이병헌)을 보면서 사랑의 감정을 느껴 이윽고 애인의 관계로 발전한다. 미영의 집을 찾은 수현을 보면서 언니인 둘째 선영(최지우) 역시 애틋한 감정을 갖는다. 여기서 더 나아가 키스 등 애정 행각까지 서슴지 않는다. 이 영화의 백미는 아마도 금기를 비웃기라도 하듯 맏 언니이자 유부녀인 진영(추상미)까지 동생 애인을 연정의 대상으로 상정한 것이다.

요즘 방송되거나 개봉된 영화 중에서 이처럼 금기된 사랑을 벌이는 드라마나 영화의 행렬은 끝이 없다. KBS 2TV의 일일 아침 드라마 ‘아름다운 유혹’은 이복 자매인 두 여자와 한 남자 사이에 벌이는 사랑이 주요 테마이다. 정희(전혜진)와 그 애인 민우(신성우) 그리고 이복 언니 정희의 애인을 가로 채 결혼한 이복 동생 나경(변정민)으로 인해 빚어지는 세 사람의 사랑과 갈등이 드라마를 견인해 가는 주 내용이다.


- 단골처럼 등장하는 출생의 비밀

드라마 <황태자의 첫사랑>

MBC 수목 미니시리즈 ‘황태자의 첫사랑’도 역시 마찬가지다. 출생의 비밀로 인해 서로 형제인지 모른 두 남자, 건희(차태현)와 승현(김남진)은 한 여자, 유빈(성유리)을 사랑한다. SBS 주말 드라마‘작은아씨들’도 드라마 초기에 이 금기된 사랑의 대열에 합류한 바 있다. 네 자매 중 첫째 혜득(박예진)과 둘째 미득(유선)이 한 남자, 선우(김호진)를 놓고 동시에 애정의 행태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올 상반기 시청자의 눈길을 끌었던 드라마‘백만 송이 장미’‘천국의 계단’에서도 어김없이 이 같은 금기된 사랑이 주요 소재로 등장했다.

영화로 눈을 돌려보자. 인터넷 소설 작가로 최고의 인기를 얻고 영화화되거나 제작중인 것만 세편에 달하는 귀여니의 작품을 영상화해 23일 개봉한 ‘늑대의 유혹’ 은 이복 남매, 태성(강동원)과 한경(이청아)의 사랑이 나온다.

이처럼 한 여성을 놓고 벌이는 두 형제의 사랑, 아니면 한 남자를 사이에 두고 두 자매 또는 세 자매가 벌이는 애정, 그리고 심지어 남매간의 사랑 등 어쩌면 우리 사회에선 여전히 금기에 가까운 이런 사랑을 내세운 드라마와 영화가 제작 붐을 이루는 데에는 다양한 이유가 있다.

금기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 변화와 금기 깨기에 대한 쾌락의 증대이다. 금기는 사회의 질서와 위험, 불안을 막기 위한 장치이지만 어떤 개인에게는 형용할 수 없는 불행과 좌절을 안겨주기도 한다. 하지만 금기는 시대와 상황에 따라 변한다. 금기의 사랑에 대한 인식과 행태 역시 사회 상황과 사람들의 의식의 변화에 따라 달라진다. 우리 사회에서의 가장 큰 변화는 욕망을 자제하던 시대가 더 이상 아니라는 사실이다. 욕망의 충족 앞에서는 도덕도, 관습도, 규율도, 형제간의 우애도 무시되는 경우가 많아진 것이다. 개인의 행복과 욕구 충족에 걸림돌로 작용했던 금기가 예전처럼 더 이상 금기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한다. 한편으로 금기의 철옹성에 갇혀 금기를 어기는 일을 좀처럼 하지 않는 일반인들에게는 드라마나 영화가 금기 깨기를 보여주면서 나름의 쾌락을 부여하기도 한다.

이밖에 영화나 드라마에서 금기시되는 사랑의 증가는 필연적으로 가족 행태의 변화에 기인하기도 한다. 이제는 이혼이 특수한 상황이 아니라 보편적 상황으로 전환되면서 이복 남매, 자매들로 구성된 가족들이 급증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금지된 사랑의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이고 드라마나 영화는 이 같은 현실을 포착해 픽션으로 재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 시청률 지상주의가 만든 억지

드라마 <아름다운 유혹>

하지만 이 같은 대중문화 콘텐츠의 범람은 무엇보다 ‘쉽게 눈길을 끌고 보자’ 는 제작진의 안이한 드라마나 영화 제작 관행과 창작 태도가 불러온 것이다. 이제는 인기 공식으로 견고하게 자리잡으면서 영화나 드라마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것이 재벌 2세와 캔디형 신데렐라, 출생의 비밀, 콩쥐와 팥쥐식의 선과 악을 대변하는 여자들의 대립구도, 그리고 출생의 비밀로 덧칠해진 형제나 자매의 동일한 사랑의 대상, 남매간의 사랑 등이다.

다른 것도 마찬가지지만 출생의 비밀로 덧씌우진 금기된 사랑을 다루는 것은 출연자가 제한된 드라마에서 시청자의 반응에 따라 매우 쉽게 갈등과 선정성, 자극성의 폭을 조절해 사람들의 시선을 끌 수 있는 공식이자 장치이기 때문이다. 또한 한 드라마나 영화의 소재나 형식이 인기를 끌면 모든 방송사나 영화사들이 새로운 소재나 캐릭터 개발에는 안중에 없고 인기를 끈 소재나 형식의 아류 생산에만 골몰하는 작가나 감독, 연출자의 해바라기 근성이 금기된 사랑을 내세운 작품들의 범람을 불러오는 가장 큰 원인이다.

드라마나 영화는 제작진이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화면과 스크린 너머의 시청자와 관객의 삶과 생활 그리고 의식에 영향을 미친다. 이제 금기된 사랑을 재탕, 삼탕 하는 퇴행을 그만했으면 한다.

배국남 대중문화평론가


입력시간 : 2004-07-29 10:27


배국남 대중문화평론가 knbae24@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