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바다 위의 싱그러운 자태

[이유미의 우리풀 우리나무] 자귀나무
초록바다 위의 싱그러운 자태

여름이 무르익을 대로 익었다. 붉은 계열의 색깔이야 뜨거움을 표현함에도 불구하고, 명주실처럼 고운 실타래를 풀어 피워낸 듯한 자귀나무의 진분홍빛 꽃이 시원스럽게 느껴지니 참 이상하다. 그 모양새 때문일까? 초록빛 잎새를 무성히 매어 달고 퍼지 듯 사방으로 드리운 가지며 그 끝에 매달린 꽃송이들은 야성의 싱그러움을 주면서도 그 개성미가 멋지다.

식물들의 이름은 제 나름대로 사연을 갖고 있는데 자귀나무는 왜 그런 이름을 붙였을까? 옛 은사님은 “혹시 잠자는데 귀신 같아서 자귀나무인가?”하셨지만, 자귀나무는 밤이 오면 어김없이 양쪽으로 마주 난 잎을 서로 맞대고 잠을 잔다. 자귀나무는 콩과, 미모사아과에 속하는데, 닿기만 하면 움츠려 드는 미모사와는 달리 외부의 기계적인 자극이 아니라 빛이나 온도를 감지해 밤이면 잎을 닫는다. 바람이나 초식동물의 먹이가 되지 않기 위해 잎을 최대로 움츠려 방어 태세를 갖추는 것이다. 또 영양분을 만들 수 없는 밤에 에너지를 발산하는 잎의 표면적을 되도록 적게 하기 위한 나름의 전략이다.

두 잎을 마주 닫고 밤을 보내는 이 특성 때문에 자귀나무는 합환목, 합혼수, 야합수, 유정수 등 여러 가지 이름을 가지며 옛부터 신혼 부부의 창가에 이 나무를 심어 부부의 금실이 좋기를 기원하곤 하였다. 자귀나무는 꽃이 유난히 인상적이다. 소나기가 몰려간 뒤 청명한 하늘에 흰구름을 배경 삼아 나무의 가장 높은 곳에서 피어나는 꽃은 한 가지에 스무개 가량의 꽃이 우산모양으로 모여 한 덩어리를 이룬다. 술처럼 늘어진 그 아름다운 꽃은 수꽃의 수술이고, 이 공작새의 날개처럼 한껏 아름다움을 과시하는 수꽃사이에서 미처 터지지 않은 꽃봉오리처럼 봉긋한 망울들을 맺고 있는 것이 암꽃이다.

그러나 시월이 되어 선선한 바람이 불고 익어가는 열매는 콩깍지 모양으로 한 뼘쯤 길게 드리운 꼬투리로 바람에 부딪혀 달그락 거린다. 이 소리가 유난스러워 거슬렸던지 사람들은 ‘여설목’(여자의 혀와 같은 나무)이라 불러 그 소리의 시끄러움을 구설수에 올리기도 했다. 그러나 사람들이 뭐라 하든 자귀나무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결국 후손 번식의 방법이다. 이렇게 바람 따라 열매가 부딪히다 껍질이 깨어지고 그 안에 종자가 땅에 떨어지는 것이다.

예전 자귀나무는 농사를 짓는 지표가 되기도 했다. 자귀나무의 마른 가지에서 움이 트기 시작하면 농부들은 이제 늦서리의 우려가 사라졌다며 서둘러 곡식을 파종하고 싱그럽게 커가던 자귀나무에 첫번째 꽃이 필 무렵이면 밭에 팥을 뿌린다. 하나 둘 터뜨린 꽃망울이 어느새 만발하면 농부들은 굽혔던 허리를 펴고 땀을 식히며 그 해 팥농사는 풍년일 것을 미루어 짐작하고 흐뭇한 웃음을 남긴다. 이러한 자귀나무는 소가 무척 좋아해서 이 나무가 나즈막히 자라고 있으면 소는 어디든지 좇아간다. 그래서 자귀나무를 소쌀나무라고 부르기도 한다.

자귀나무는 합환피라 하여 늑막염과 타박상을 비롯한 여러 증상에 처방하는 약이 되기도 하고 목재는 가공이 쉬워 기구를 만들거나 조각하는 재료로도 쓰였다. 현명한 아내는 자귀나무 꽃을 따다 말려 베게 밑에 넣어 두었다가는 남편의 마음이 좋지 않을 때면 꺼내어 술에 넣어 건넸다고 한다. 아무리 울적해도, 세상사에 화가 나도 마음을 담아 내오는 아내의 향긋하고 아름다운 술잔에 어찌 마음을 풀어내지 않을 수 있을까?

세상이 정말 어렵다고 하는데 그런 배려의 마음으로 가까운 사람들부터 챙겨 보아야 할 것 같다.

이유미 국립수목연구원 연구관


입력시간 : 2004-07-29 10:50


이유미 국립수목연구원 연구관 ymlee99@foa.g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