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총각 '운짱'이 그리는 세상풍경기발한 상상력과 독특한 시각적 이미지, 세태 풍자와 내면의 아픔 그려

[문화 비평] 장진의 <택시드리벌>
노총각 '운짱'이 그리는 세상풍경
기발한 상상력과 독특한 시각적 이미지, 세태 풍자와 내면의 아픔 그려


이제 하반기로 접어든 연극열전, 아홉 번째로 장진의 <택시드리벌>이 동숭아트센터 동숭홀에서 공연중이다. 1997년 초연된 <택시드리벌>에서는 최민식이, 2000년 공연에서는 권해효가 주인공 장덕배 역할을 맡았었다. 2004년 올해 공연에서는 영화 <실미도>의 장재영과 강성진이 더블 캐스팅으로 출연한다. 비디오로 영화를 본 다음날 공연장을 찾아서인지 당일 출연한 강성진의 모습이 영화의 이미지와 겹쳐졌다. 스크린이 아닌 무대에서 배우를 직접 보는 것은 연극만의 즐거움이다. 극을 쓰고 연출한 장진은 연극 <아름다운 사인>, <박수칠 때 떠나라>, <웰컴 투 동막골> 등과 영화 <간첩 리철진>, <아는 여자> 등 장르를 넘나드는 작업을 하고 있다. <택시드리벌>을 통해 관객이 즐길 수 있는 극의 재미는 영상작업을 병행하는 연출가의 무대가 보여주는 상상력의 기발함과 독특한 시각적 이미지들이다.


- 오브제와 내적 코러스가 만드는 무대이미지

<택시드리벌>은 39세 노총각 택시기사 장덕배가 택시운전을 하면서 만나는 세상이야기이자 그의 내면 이야기이다. ‘택시드리벌’이란 ‘택시드라이버’의 덕배 식 발음이다. 극은 덕배의 현실 공간인 택시 안과, 덕배가 여러 인물들과 나누는 대화로 점차 환기되는 내면공간으로 이분화 된다. 그러나 이 두 공간의 분위기나 색채는 서로 매우 대조적이다. 덕배가 바라보는 세상이 그의 기사복장처럼 노랗고 경쾌한 빠른 템포로 묘사된다면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는 그의 내면세계는 푸르고 느리고 우울하게 그려진다. 극의 아이러니는 택시를 통해 만나는 세상 사람들의 모습이 덕배의 삶을 찌들게 하고 그를 억압하는 요소들로 나타나는 반면, 그가 되풀이하여 찾아가는 우울한 과거는 그에게 위안과 휴식을 제공한다는 사실이다. 극은 이 두 공간의 상호 소통을 촉발시킬 수 있는 하나의 사물을 통해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무대에는 분홍빛 핸드백이 핀 조명을 받고 있다. <택시드리벌>의 주요한 시각 오브제인 핸드백은 극의 관심을 덕배의 내면으로 이행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 그는 자신의 차에 누군가가 놓고 내린 핸드백을 바라보며 고민에 빠져있다. 여자 핸드백을 보며 혹시나 가방주인과 만나서 새로운 인연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노총각으로서의 낭만적인 상상에 잠기는 것이다.

그런데 덕배는 상상 속에서 혼자가 아니다. 이들은 과연 누구이며 어떤 존재들인가? 덕배가 상상에 잠기는 모습은 내면에서 그가 만나는 인물들 또는 단순히 그가 상상한 인물들과 대화를 나누는 방식으로 다소 특이하게 연극적으로 표현된다. 이들과의 대화 장면은 덕배의 속내와 욕망을 모두 드러나게 한다는 점에서 희극적이다. 덕배의 내면대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그의 속내이야기를 무대 위에 가시화하기 위한 방식이다. 이들의 존재는 덕배의 성격을 구성하는 인격들이라기보다는 그의 내밀한 기억들을 드러내고 극을 진행시키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다.

연극에서 주인공의 분신이 무대에 직접 등장하는 것은 연극열전 열 번째 공연인 <불 좀 꺼주세요>에서도 보듯이 드문 일은 아니지만 <택시드리벌> 에서처럼 한 사람의 내면에 여러 명의 가상적 인물들이 등장함으로써 무대이미지를 형성하는 것은 특이한 경우이다. 개개의 인격을 구현하기보다는 집단적 화자라는 하나의 역할을 수행하는 이들의 존재는 주인공의 사고를 무대그림으로 전환하기 위한 일종의 내적 코러스이다. 이들은 덕배의 정황을 묘사하거나 해설하고, 그의 감정과 속내이야기를 이끌어내는 산파 역할을 한다. 이들의 신체를 통해 구사되는 무대이미지는 나름대로 독특하다. 그러나 이들을 존재하게 한 작가의 상상력에 비하면 무대 동선 면에서는 상당히 정적인 인상을 준다. 덕배의 사고나 감정의 흐름에 따라 이들의 동선도 좀더 적극적으로 사용했더라면 색다른 무대이미지를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 극의 현실공간과 내면공간

극의 현실 공간인 택시를 통해 덕배가 만나는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주인공 덕배에게 택시 승객들은 힘겨운 시간을 주는 억압적인 존재들이지만 이들의 모습은 매우 속도감 있고 경쾌하게 그려지면서 세태 풍자와 웃음을 제공한다. 극은 덕배의 시선을 빌어 그가 택시에서 만나는 다양한 인간 군상의 이미지를 통해 관객 스스로의 모습을 다시 보게 한다. 한강을 지나다 강물에 투신자살을 하는 손님, 사이버 게임에 빠진 청소년들, 택시 안을 공포로 몰아넣는 ‘어깨들’, 술에 취해 직장 상사를 성토하는 샐러리맨들, 차 안을 더럽히는 술 손님, 평양으로 가자는 실향민, 편협한 지역주의를 내세우는 정치토론 객들이 그들이다. 특히 ‘어깨들’ 장면은 언어가 잔인한 점에서는 아슬아슬하지만 대사와 동작의 반복을 통해서 극의 희극성을 극대화하고 관객의 웃음을 이끌어내는 데 성공하고 있다.

‘어깨들’의 캐스팅 면에서는 2000년 유시어터 공연이 사나운 인상의 등장인물로 더 인상적인 무대그림을 만들었다. 이들이 만드는 공포 분위기에 덕배와 택시 합승객이 질리고 두려워할수록 무대그림과 장면이 만드는 내용의 격차가 클수록 희극성은 배가된다.

덕배의 내면공간, 가장 깊은 기억 속에는 그의 연인이던 화이의 죽음이 도사리고 있다. 덕배를 기다리다 임신한 채 고향의 저수지에 몸을 던진 화이의 설정은 다소 설득력이 부족하다. 어떻든 화이를 지켜주지도, 그녀의 장례에 참석하지도 못한 사실은 덕배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로 남았고, 이 사실은 그의 우울한 심경을 설명해준다. 여자 핸드백이 가져다 준 낭만적 환상이 핸드백 주인의 전화 한 통화로 산산이 깨어진 후, 지친 덕배가 꿈꿀 수 있는 가장 행복한 그림은 화이의 곁에서 그녀와 함께 하나의 사진으로 남는 일이다. 스크림으로 가려진 무대 뒷면에 빛이 들어오면 그곳에는 행복한 한 장의 사진이 담긴 액자가 드러난다. 그 속에는 언제나 웃는 모습의 화이가 있고 화이의 곁에는 덕배의 자리가 빈 채로 남아있다. 극은 소박하게 한 사람이 추구하는 내면세계와 그가 처한 삶의 단면이라는 양면을 대조적으로 보여준다.

<택시드리벌>은 아기자기하고 나름대로 정감을 가진 한 편의 연극이다. 그렇지만 젊은 작가 장진에게는 연극 이미지들과 주제 의식간의 긴밀성이 요구된다. 그가 만드는 기발한 연극이미지들이 주제를 구현하는 하나의 정신적인 사건으로 체험되고, 즐거움의 원천이 되어주기를 기대해본다.

2004년 7월 16일~8월 29일 | 동숭아트센터 동숭홀 |작ㆍ연출 장진 |출연 정재영, 강성진, 조덕현, 장영남, 임승대, 이철민, 유승룡, 이해영, 이재용, 김일웅, 한승희, 박선우, 이지용, 김대령, 박미숙, 이민정. |문의 연극열전 사무국 02)762-0010

송민숙 연극평론가


입력시간 : 2004-08-12 11:29


송민숙 연극평론가 ryu1501@kornet.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