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의와 무술의 옷을 입은 한국의 리어, 서양고전의 한국화 시도

[문화비평] 전쟁과 야망, 애욕과 배신의 <리어>
제의와 무술의 옷을 입은 한국의 리어, 서양고전의 한국화 시도

무력으로 권력을 장악하는 리어.

‘리어’는 셰익스피어의 비극 ‘리어왕’을 각색한 것으로 2004 봉평 공연축제에 참가, 지난 9월 달빛극장에서 공연돼 많은 관객의 사랑을 받았던 작품이다. 달빛 아래 잣나무 숲을 배경으로 하는 당시 공연 사진들로 미루어 보아, 상당히 신선하고 인상적인 무대였으리라는 짐작이 간다. 그 ‘리어’가 이제 자리를 옮겨 극장 유시어터 무대에 올랐다. 유시어터 공연 무대는 마치 엄숙하고 신비에 싸인 제의의 공간을 마주한 느낌을 준다.

원작 ‘리어왕’은 늙음, 배신, 권력과 욕망 등 복합적인 중추를 가진 잔인하고도 잔혹한 비극이다. 이 극은 특히 ‘햄릿’, ‘오셀로’, ‘맥베스’가 다루지 않은 주제, 즉 어쩔 수 없이 모든 인간에게 다가오는 운명인 늙음으로 인한 인간적 가치들의 상실이라는 비극을 다루고 있으며 그로 인해 보편성과 공감을 획득한 작품이다.

따라서 ‘리어왕’의 비극성에 대해 쉽게 화를 내고 오만하며 다급한 성격을 가진 리어라는 인물의 개인적 성격에서 찾기 보다는, 리어가 늙음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판단을 그르치고 그 판단의 오류 때문에 모든 사람들의 숨겨진 욕망이 겉으로 드러나 이들 모두가 결국 파멸에 이르는 비극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외국의 한 공연에서는 리어를 그야말로 노인성 치매인 알츠하이머병에 걸린 노인으로 해석함으로써 리어의 인간적 한계를 부각시키며, 우리 모두의 장래인 늙음의 문제를 반추하게 한 경우도 있었다. 그렇다면 이번 공연의 중추는 무엇일까?

- 한국의 고대국가로 배경설정

본 공연 각색의 핵심은 ‘리어왕’의 중추를 원전에서의 늙음의 주제보다는 야망, 전쟁, 애욕, 배신으로 설정한 것이다. 극 전체에 내용과 형식의 면에서 제의적 색채를 부과하고, 광대 역할을 확대하고, 전쟁을 나타내는 무술장면을 삽입하며, 극의 배경을 영국이 아닌 한국의 고대 국가로 설정한 것도 다른 점이다.

등장 인물들의 이름도 리어만을 남겨두고 한국적으로 바꾸었다. 리어의 세 딸 고너릴, 리건, 코딜리어를 각각 아라, 아솔, 아사로, 올버니경과 코온월을 가리온과 대모수리로, 에드가와 켄트를 한 사람으로 통합한 ‘바람’으로, 글로스터는 제사장인 ‘청부루’로, 글로스터의 서자 에드먼드는 ‘구름’, 시종 오즈릭은 ‘모도리’로 각색하였다.

또한 굿을 돕는 역할을 하는 산받이들(해, 달, 불, 물, 흙)이 등장하는데 이는 원전에서 과감하게 진실을 말하는 왕의 광대 역할을 여러 사람으로 확대한 결과로써 이들은 탈놀이를 통해 인물들의 진심을 드러내는 장면을 연기하거나 북, 장고, 징, 꽹과리 등의 전통 악기로 음향 효과를 낸다.

이들의 탈놀이는 전통탈춤의 기능이 그러하듯 풍자와 비판의 역할을 하며 극중극의 형태로 놀이처럼 삽입된다. 일종의 극중 관객인 이들은 극을 바라보는 시선과 관점을 제공하는 동시에 코믹 릴리프(비극에서 관객의 심적 부담감을 덜어 獵?희극적 장면)의 기능을 한다. 이들은 극의 대미에서 씻김굿을 하는 무당의 역할을 맡기도 한다.

각색으로 달라진 장면을 보면 극 초엽에서 젊은 리어가 힘과 무술기량을 과시하며 권력을 장악하는 장면이 있다. 이는 곧 이어지는, “이제 나이가 많이 들어” 여생을 편하게 보내고 싶다는 리어의 대사와 충돌을 일으킨다. 에드가와 켄트를 한 인물로 합한 설정은 무난하지만 원전처럼 부친이 아닌 리어의 분노를 사 쫓겨난 상황이므로 실명한 부친과 재회했을 때 구태여 자신의 정체를 감추고 그를 벼랑으로 이끄는 장면은 타당성이 없다.

아사의 성격도 달리 설정된다. 부친에 대한 사랑을 몇 마디 말로 표현하기를 거부하는 코딜리어는 결벽증에 사로잡힌 게 아니라 한결 주의 주장과 행동력이 강해진 아사는 내림굿도 없이 마음대로 영토를 분할하려는 리어의 그릇된 판단을 만류하기 위해 저항하다 추방되는 여성으로 그려진다. 추방된 후에도 되돌아가서 리어를 돕기 위해 무예를 닦고 전면에 나서서 전쟁에 참여하는 적극적인 여성이라는 해석이다.

그러나 아사가 변방의 부족과 만나서 무술대결을 하는 장면에서 그녀가 칼싸움에서 이겨서 그 부족에게 받아들여진다는 설정은 어색하다. 차라리 대본에서처럼 서로를 경계하다가 대화를 통해 변방 부족에게 받아들여지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장면을 위한 장면은 항상 절제를 요하는데, 배우들이 무술을 연마했다고 해서 그 장면들을 가능한 한 많이 연극에 삽입해야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미 홍콩 영화의 마술 같은 무술 장면에 익숙한 관객에게는 배우들의 노고에도 불구하고 원하던 효과가 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단 몇 장면을 위해서 오랫동안 많은 연습을 반복했을 배우들의 노력에 대해서는 찬사를 보내고 싶다.

- 공연의 백미인 시각적 이미지

본 공연은 시각적 이미지를 위해 많은 배려를 한 점에서 두드러진다. 공연장 벽에 내리워진 십이지신의 그림은 왕릉의 거대한 무덤가에 자리한 십이지 상을 연상하게 하고, 간소한 제단은 크게 공간을 차지하지 않으면서 극이 추구하는 주술적 분위기를 만든다.

무대 전체가 고대의 신당이 되는 것이다. 비록 이 제의적 공간에서 정화의 기능보다는 권모술수와 음모가 자행되기는 하지만 말이다. 다소 각이 진 의상은 한국적이라기보다는 동양적이라고 할 만하다. 의상들은 색채와 형태를 통해서 배우의 성격을 드러내고 시각적 즐거움을 창출하는데 일조를 한다.

흰 천으로 무대를 가림으로써 정리를 하는 ‘무대진행 막’은 보기에 경쾌하고 효과적이었다. 흰 천이 무대에서 더 이상 필요가 없어진 소품이나 주검들을 모두 쓸어내는 듯한 느낌을 준다. 흰 천의 다른 용도로는 리어가 자신의 분노를 온 천지에 호소하는 그 유명한 ‘황야 장면’에서 바람을 가시화하는 기능에서 찾을 수 있다. 펄럭임을 통해 공기의 흐름을 시각화함으로써 광풍을 눈으로 만지도록 연출했다.

서양 고전의 한국화는 좋은 시도이나, 언어의 연극인 셰익스피어는 멋진 시각적 요소들의 첨가에도 불구하고 탄탄한 드라마와 정확한 대사 전달을 우선 요구한다. 차후 끊임없는 개선을 통해서 좋은 결과 이루기를 바란다. 셰익스피어에 관심이 있는 연극 애호가들에게는 예술의 전당 토월극장에서 11월 5~28일까지 공연하는 셰익스피어의 초기 사극 <꼽추, 리차드 3세>(한태숙 연출)와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11월 17~21일까지 한국 초연되는 <심벨린>(김철리 연출)도 놓칠 수 없는 흥미로운 공연으로 적극 추천하고 싶다.

때 2004년 10월 29일~11월 28일 |곳 유시어터 | 제작 극단 유시어터 | 원작 셰익스피어 | 각색 · 연출 김관 |출연 호산, 고효진, 최성희, 홍륜희, 황지은, 김영훈, 송지우, 조운, 김대진, 김세환, 조영규, 이국호 외. 문의 유시어터 02-3444-0651~4

입력시간 : 2004-11-17 15:52


주간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