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티재 넘어 그곳이 용화세상금동미륵대불과 정이품송이 반기는 천년대찰

[주말이 즐겁다] 속리산 법주사
말티재 넘어 그곳이 용화세상
금동미륵대불과 정이품송이 반기는 천년대찰


백두대간의 큰 산인 속리산(1,058m)에서 갈라져 나온 한남금북정맥(漢南錦北正脈)이 서쪽으로 흐르다 잠시 쉬어 가는 말티재(430m)는 예로부터 속리산의 관문으로 이름이 높았던 고개다. 속리산을 찾는 사람들은 말티재를 첫 번째 관문으로 여겼고, 속리산(俗離山)의 한자와 관련하여 '속세와 선계를 가르는 분수령'이라고 해석하기도 했다. 또 남한강과 금강의 분수령이기도 하다.

고려 태조 왕건이 속리산에 들를 때 고개를 넘기 위해 돌을 3~4리나 깔았고, 조선 세조가 이곳을 찾아올 때도 다시 박석(薄石)을 펴 놓았다 한다. 그래서 고개 아래의 마을 사람들은 박석티라 부르기도 했다. 조선 세조가 속리산으로 행차할 때에 타고 왔던 연을 말로 갈아탔다고 해서 '말티'라고 한다지만, 어원으로 보면 '말'은 높다는 뜻의 '마루'에서 왔으니 곧 '높은 고개'란 뜻이다.

• 속세와 선계를 나누는 고개
'대궐터'부터 속리산까지는 제법 운치 있는 길이 이어진다. 고개를 넘어가면 정이품송(正二品松)이 반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우아한 기품의 소나무로 벼슬이 현재의 장관급인 정이품에 이른다. 정이품송은 그러나, 600살이 넘으면서 가지들이 여럿 죽는 바람에 대칭의 미학이 많이 무뎌졌고, 남은 가지들도 부러지는 걸 막기 위해 쇠파이프를 받쳐놓아 체면이 많이 상했다. 지난 겨울엔 폭설로 가지가 3개나 부러지기도 했다.

법주사(法住寺)는 553년(신라 진흥왕 14)에 의신조사가 처음으로 창건한 천년 고찰이다. 그 뒤 776년(혜공왕 12)에 진표(眞表)가 그의 제자들과 미륵 신앙의 중심 도량으로 중창하며 대찰의 규모를 갖추게 되었다. 정유재란 때 왜군들의 방화로 모조리 불에 타버렸으며 사명대사가 대대적인 중건을 시작했다. 그런 과정 속에 건축물을 중심으로 불상, 회화, 공예 등의 많은 미술품들이 새로 만들어져 봉안되어졌다.

아름드리 떡갈나무와 느티나무, 소나무들이 어우러진 오리숲 거닐며 수정교를 건너 금강문을 지나면, 국내에서 가장 크다는 천왕문이다. 가장 큰 사천왕상이 압도할 듯 지키고 있다. 그 너머로는 우리나라 목탑으로는 유일하게 온전히 남아 있는 5층 목탑인 팔상전(捌相殿 국보 제55호)이다.

33m 높이의 금동미륵대불도 눈길을 끈다. 원래 이곳엔 진표율사가 조성했다는 미륵장육상이 봉안되어 있었는데, 조선 말기에 경복궁 복원을 위한 당백전 주조의 명목으로 불상은 철당간과 함께 압수되어 지상에서 영원히 사라졌다. 이후 근대조각의 선구자 정관(井觀) 김복진(金復鎭 1901-1940)이 당시로서는 파격이었던 재료라 할 수 있는 시멘트로 100척의 미륵대불을 작업하는데, 이듬해 요절하는 바람에 미완으로 남게 된다.

백두대간과 한남금북정맥 산줄기가 첩첩 산물결을 이루는 속리산

그러다 20여 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 나라의 도움으로 마무리를 했다. 이후 1990년대 초 다시 청동으로 불상을 만들게 되는데, 청동불상의 용접 부위에 부식이 진행되자 개금불사를 추진해서 2002년 청동대불에 황금가사를 입힘으로써 일단락됐다. 경내에는 이외에도 쌍사자석등(국보 제5호), 석련지(국보 제64호), 사천왕석등(보물 제15호), 마애여래의상(보물 제216호) 등의 거창한 문화재가 많다.

속리산을 찾는 사람들의 절반 이상이 법주사만 보고 돌아간다. 허나 걷는 데 자신 있는 이들은 '세 번 다녀 오면 극락왕생한다'는 속설에 힘을 얻어 문장대까지 발품을 판다.

해발 1033m인 문장대(文藏臺)는 오래 전부터 속리산의 상징으로 군림해 왔다. 현재도 많은 사람들은 속리산의 최고봉인 천황봉보다 문장대를 더 많이 알고 있다. 문장대의 원래 이름은 늘 신비한 구름으로 뒤덮여 있다 해서 운장대였다. 그러다가 신병 치료차 속리산을 찾은 세조가 복천암에 머물던 당시 세조와 신하들과 더불어 시를 지었다 해서 문장대라 불렸다. 문장대 정상에서의 조망이 아주 빼어나다. 법주사에서 문장대를 왕복하는 데 5시간쯤 걸린다.

• 별미 - 약초나물비빔밥 법주사 시설지구에 자리한 식당들의 주 메뉴는 산채비빔밥이다. 그중 속리교 가까이에 있는 신토불이식당(043-543-0433)은 나물로 산나물의 묘를 살리되 보통 산채비빔밥과는 다른 '약초 나물 비빔밥'으로 차별화했다. 취나물, 참나물, 냉이, 씀바귀, 고사리 등 잘 알려진 산나물은 물론 두릅, 다래순, 당귀, 잔대, 머위, 참비름, 산더덕 등 30가지에 가까운 나물과 송이ㆍ능이ㆍ싸리버섯 같은 자연산 버섯을 사용한다. 약초산채비빔밥(1인분) 7,000원.

• 숙식 속리산 집단 시설 지구에 숙식할 곳이 아주 많다. 레이크힐스 속리산호텔(043-542-5281), 속리장(043-543-7049), 속리산여인숙(043-543-4035) 등 수십 개의 숙박 시설이 있다. 금강골의 비로산장(043-543-4782)은 산중의 숙박지. 산채비빔밥, 산채정식 등의 식사도 가능. 방값은 3만원선.

• 교통 경부고속도로나 중부고속도로를 이용해 접근한다. 경부고속도로는 청주IC, 중부고속도로는 서청주IC로 나와 36번 국도→청주→25번 국도→남일→회북→보은→속리산 법주사. 서청주IC에서 2시간쯤 소요. 서울남부터미널→속리산=1일 8회(06:50~19:00) 운행. 3시간30분 소요, 요금 10,200원.

민병준 여행 작가
'이 땅에 가장 아름다운 여행지' 저자


입력시간 : 2004-12-01 2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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